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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5/128)

22화

카이런 공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진이 다 빠졌을 때쯤, 사냥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얼른 언덕을 내려가 카이런 공작을 맞이했다. 이제는 사냥이 끝났고, 그가 끌고 온 암사슴을 요리해야 하니 내가 앞에 나서도 문제없었다.

말을 몰고 들어오는 카이런 공작은 조금 흥분한 상태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져서 나도 저도 모르게 웃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시선을 스치며 웃었다. 우연 같은 시선이었다.

나는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르신 대로 준비되었습니다.”

카이런 공작은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말도 흥분한 듯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말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들기며 내리려고 했다.

그때 나는 말의 귓가에 붙은 그것을 발견했다.

“공작님!”

나는 작게 소리치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나보다 훨씬 키가 크고 근육질인 북부의 전투마의 목덜미를 쏘아보았고, 카이런 공작은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아리엘사?”

하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내 할 말을 먼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체이어스 경, 저게 뭐죠?”

나는 공작의 말 머리 쪽에서 말을 타고 서 있는 체이어스에게 손가락질을 해 보였고, 체이어스는 헉하고 놀라더니 몸을 숙여 재빨리 도깨비풀을 떼어냈다. 워낙 순간적인 일이라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체이어스와 카이런 공작은 놀란 시선을 마주쳤지만 곧 태연하게 행동했다. 다만 체이어스는 나를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카이런 공작에게 재빨리 말했다.

“드실 것을 준비해놓았습니다. 공작님”

카이런 공작은 가볍게 끄덕이며 주변의 가신들에게 말했다.

“이제 쉬지.”

사냥 무리가 말을 매어 놓으러 주변으로 흩어지는 걸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체이어스는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너에게는 할 말이 많다는 듯, 나는 반드시 듣고 말겠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어느 틈엔가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때 게오르그가 다가왔다.

그는 체이어스와 나 사이의 긴장감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아리엘사, 먹을 건 충분하냐? 나 배고프다.”

나는 이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요. 얼른 드세요!”

게오르그는 체이어스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체이어스, 가서 한잔하지.”

“그러죠.”

체이어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도 게오르그와 시비가 생기는 일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나는 아픈 손바닥을 문지르며 식사 준비를 하는 하인들에게로 돌아갔다.

손톱만 한 열매에 끝이 굽은 가시가 잔뜩 난 도깨비 풀은 짐승의 털에 달라붙어 씨를 퍼트리는 식물이다.

어쩌다 그것이 말의 귀에 붙으면 말이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날뛰기 때문에 기수들에게는 위험한 풀이었다.

체이어스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뒷감당을 해야 할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카이런 공작을 지켜낸 것으로 안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사냥이 대단한 스포츠감이라는 내 의견을 완전히 취소하기로 했다.

사슴을 죽여서 피를 빼고,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빼내고, 각 부위를 잘라서 굽는 과정은…… 내가 직접 해야 했다면 나는 분명히 트라우마를 얻었을 것이다.

다행히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 하인들조차도 모두 들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서 구석에 피해 있는다고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딱 두 사람, 나를 주시하는 체이어스는 빼고.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게오르그도 빼고.

나는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구석에 피해 있다가 하인이 다 구워서 가져다주는 사슴고기를 맛보았다.

그리고 울 뻔했다. 너무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 불쌍한 사슴이 이렇게 고소하고 기름지다니…….

금방 사슴이 해체되는 광경에 질겁해서 속까지 울렁거려놓고는, 그게 맛있어서 위장이 마구 자극받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더니 일하기 싫어서 그랬나 보네. 이 먹보가.”

“앗!”

게오르그는 딱밤으로 인기척을 냈다. 나는 눈물이 찔끔 난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까 일이 그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빠, 고기 더 드려요?”

“됐다. 너는?”

“저는 많이 먹었어요.”

“……그럼 됐다.”

게오르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사람들이 있는 불가로 돌아갔다. 그는 아마 내 기분을 살피러 온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과 가신들은 주로 불가에 모여 서서 술과 고기를 먹고 있었고, 저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이 사람들이 즐겁게 별미를 먹고 마시며 봄을 축하하는 데는 짐승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을 보호하기 위해서 체이어스의 의심을 사야 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하룻밤 술자리로 무마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필요한 희생을 한 것뿐이라고, 나는 마음을 담대하게 먹기로 했다.

그리고 북부인들이 봄을 맞이하며 즐거워하는 이 방식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

봄 사냥은 무사히 끝났다. 가신들은 배부르게 먹고 즐겁게 웃다가 돌아갔고, 카이런 공작은 어제와 다름없이 완벽한 몸으로 성으로 돌아왔다.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와 사냥복을 벗어 던졌다. IT 회사 갑부 같은 밋밋하고 갑갑한 내 옷장을 열었다가, 기왕에 낙하산 취직을 한 마당에 옷차림도 연줄의 도움을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포목점 여주인에게 부탁하면 예쁜 원단을 너무 비싸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 할인을 받아서……?

실내용 드레스로 막 갈아입었을 때 누군가 노크했다.

-아리엘사.

“아빠.”

게오르그는 들어와 내가 앉으려던 의자를 쏙 빼내서 앉았고 나는 침대에 그와 마주 앉았다.

“아까는 무슨 일이었냐? 체이어스 놈이 너를 왜 그렇게 째려보는 게야?”

“음……. 제가 공작님 앞에서 조금 무례했던 것 같아요.”

나는 소심하게 말하고는 눈을 조금 치떠서 게오르그의 눈치를 보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 야단치는 게 아니라…….”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오늘 네가 종일 안절부절못하는 게 체이어스 때문이라면 나도 알아야겠다.”

나는 순간 게오르그가 체이어스를 죽이려 드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설마요! 체이어스 경은 안 그래요. 아무 일도 없어요, 아빠.”

“아니, 그랬다.”

게오르그는 팔짱을 끼며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저기요, 저는 지금 체이어스보다 아빠가 더 무섭거든요?

“너……. 혹시 그놈하고 연애하냐? 그런데 싸운 거냐?”

“헉, 아빠!”

나는 게오르그의 삐뚤어진 세계관을 극렬히 반대했다.

안도감과 황당함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발끈해서 말했다.

“아빠가 연애한다고 저까지 연애하는 건 아니거든요!”

“크흠…….”

나는 일부러 포목점 주인을 언급했다. 그는 포목점 여주인과의 관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난감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체이어스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너를 푸대접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모베일에서는 무슨 일 있었냐? 그때부터 이상했어.”

“공작님이 열병을 앓으셨을 때 제가 간호하다가 졸아서…….”

“체이어스가 심사가 틀어졌을 만하군. 네가 얼마나 지극정성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놈은 늘 제가 옳지.”

나는 게오르그의 복잡한 표정을 보며 지금 그가 어떤 선을 그은 것을 알았다. 그가 타인이 넘도록 용납할 수 없는 선은 바로 나인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응시하며 차근차근히 말했다. 이 일 때문에 게오르그가 체이어스와 싸움을 벌이는 건 절대 원치 않았다.

“아빠, 공작님은 그때 위험한 상황이셨다고요. 체이어스 경이 화를 내실 만했어요.”

“크흠…….”

게오르그는 갑자기 내 머리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무겁고 따뜻한 손이었다.

“사다리 병 때문에 네 성격이 변했다고 걱정했더니, 꾹꾹 참는 건 똑같네. 착한 것도.”

“…….”

나는 게오르그를 끌어안았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가 마치 내 진짜 아빠처럼 느껴져서 고맙고 미안했다.

“아빠.”

“왜, 이놈.”

“포목점…….”

“어흠, 흠. 잘 자라. 아리엘사.”

“아빠? 두 분이 어디까지 간 거예요, 네? 아빠?”

하지만 이미 내 방문은 닫혀 있었다.

키득거리며 침대에 눕자 피로가 몰려왔다.

사실 오늘 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진이 다 빠져 있었다. 그 와중에 나를 공작의 암살범을 보듯 하는 체이어스의 눈길에 상처를 받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게오르그의 위로를 받고 나니 그게 다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늘 카이런 공작이 사고를 당하는 것을 막지 않았는가.

-아리엘사?

나는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주방 하녀였다.

“공작님께서 집무실로 오라셔.”

“고마워요.”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갔다.

그가 무슨 질문을 하든 간에, 대답하기 껄끄러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피해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집무실로 갔을 때 카이런 공작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체이어스와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가볍게 손짓했다.

“공작님, 부르셨습니까?”

내가 다가가자 그는 술잔을 내밀었다.

“아리엘사. 이제부터 밤새워 마실 거야. 봄 사냥도 끝났으니.”

나는 공작이 내 잔을 채워주는 것을 보며 눈을 크게 굴렸다. 술을 마시자는 것은 뜻밖이었다.

여러 개의 걱정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쳤다.

내 주량 들키면 어떡하지? 술김에 내 진짜 성격이 튀어나오면……?

거절해야 하나 생각하니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과 함께 술 마시는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를 자기 시녀로만 생각하니까. 물론 아무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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