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예리한 인간 같으니. 물론 나는 사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아……. 음……. 공작님의 사냥복과 간단한 다과와 물, 또…….”
“흠.”
카이런 공작은 한숨을 쉬었고 나는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지금 공작님이 초등학교 소풍 가시는 거 아니잖아!
그는 이제는 포기했다는 듯이 차근차근 말했다.
“잡은 사냥감을 바로 요리해 먹을 거다. 그러니 하인들에게…….”
카이런 공작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내가 가신들이 다 모일 하르펠 성의 봄 사냥을 망쳐버릴 뻔했음을 알게 되었다.
카이런 공작이 내게 준비시킨 주방도구와 식재료 등은 내가 혼자서 고민해서는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다 기억했나?”
“네. 대부분이요…….”
나는 카이런 공작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가 너무 고마웠지만 공작이 시녀를 돌봐주고 있는 이 상황이 한심한 것도 사실이어서, 조금 기가 죽었다.
“왜 절 도와주시는 거죠?”
내가 불퉁한 얼굴로 질문하자 그는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왜, 내가 지나치게 간섭했나? 자존심이라도 상했어?”
나는 놀라서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공작님! 사실은 감사……해요.”
“네가 이 정도 일도 알아서 하지 못하는 걸 알면 체이어스는 새 시녀를 구하라고 할 거다. 나도 이 정도 일도 알아서 하지 못하는 시녀를 계속 곁에 두겠다고 내 책사에게 주장할 근거가 없다.”
“음…….”
공작 정도 되면 매우 귀족적으로 사람을 뭉개는 방법을 아는구나.
나는 그의 섬세한 ‘간섭’이 나에 대한 배려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조금 질린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네가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에 내 시녀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하면 게오르그가……. 흥분할 거다. 혹은 절망한다든가…….”
카이런 공작이 허공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 건 몹시 불길한 징조였다.
“시녀 하나가 ‘하르펠의 방패’를 망가트리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헉, 그게 그렇게까지 말할 일인가요?
나는 속으로 항의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카이런 공작이 쉽게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방금 자신이 한 상상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는지,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게오르그 로크만 경의 이미지는 카이런 공작에게는 더 심각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곧 표정을 정리한 카이런 공작은 다시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히 네가 한번 배운 건 제대로 하는 것 같으니 일단 가르쳐보기로 했어. 휴가일에도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것도 편리하니 말이야.”
“하하하…….”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웃었다.
그러니까 공작이 지금까지 내게 무르게 군 건 내가 그를 구해주어서나 어릴 적 소꿉친구인 나를 특별히 여겨주어서가 아니었다. 내 부친 게오르그에게 입장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영지의 중요한 전력인 가신의 기분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가족 복지?
내가 부모 후광으로 낙하산 취업을 한 인간이었다니……. 웃고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가, 감사합니다. 공작님.”
내가 버벅거리며 인사하자 카이런 공작은 이제 자기 용무는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잊을 뻔했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아리엘사?”
아휴, 깜짝이야.
“네, 공작님.”
“나는 너 말고 다른 시녀를 들일 생각이 없다.”
“……네. 공작님.”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허탈한 기분과 간지러운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너 말고 다른 시녀를 들일 생각이 없다.”
그건 게오르그에게 자기 입장을 곤란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지만, 나는 자꾸 다르게 들렸다. 마치 그가 내게 만족하고 있으며 큰 애착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아마 내가 그렇게 듣고 싶어서겠지…….
나는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북부인들에게 기술만 좀 있었다면 이들이 가장 먼저 롤러코스터를 발명했을 것이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내게 일러준 대로 성의 주방에 알려서 준비시켰고, 옷장에서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사냥복도 찾아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사냥복도 준비해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가, 지난번 목욕하면서 본 그의 완벽한 몸을 떠올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세상에…….”
나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옆구리에는 사냥 중 낙마 사고로 얻은 큰 흉터가 있었다.
지금 그의 몸이 상처 하나 없이 완벽한, 아니 과격하게 섹시한 상태라는 건, 그 사고가 봄맞이 사냥이 열리는 내일 일어날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여기건 나는 그걸 막아야 했다. 나는 여전히 내 남주를 아꼈고, 사람이 다칠 걸 알면서 모르는 척할 만큼 담력이 세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각오와 함께 잠을 청하며, 나는 구시렁거렸다.
“체이어스, 이래도 내가 하찮은 시녀라고 생각해?”
❄❅❄
나는 아침 일찍 카이런 공작의 방으로 가서 그의 준비를 도왔다.
하르펠가의 가신들 대부분이 내성 마당에 모여 있어서 바깥은 북적거렸다.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왜, 긴장되나?”
“아니에요, 공작님. 오늘 꼭 조심하세요. 사냥은 위험하잖아요. 그렇죠?”
원작에서 카이런 공작의 낙마 사고는 과거의 일로만 언급되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정확한 상황이나 시점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사고는 모든 순간에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잘 훈련된 그의 군마가 그를 떨어트린다면 돌발적인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것을 예측해야 했다.
나는 마구간지기가 카이런 공작에게 말을 데려다주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카이런 공작이 말에 오르는 걸 보면서, 나는 불안해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말목을 토닥이며 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휴.”
나는 조바심이 나서 그의 곁에 있고 싶었지만 가신들로 둘러싸여 있는 공작의 곁에 시녀가 특별한 이유 없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카이런 공작은 곧 가신들과 함께 사냥터로 출발했다. 모두 기다리던 봄과 즐거운 사냥에 들떠 있었지만 나는 혼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냥터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던 가신들이 우리를 맞았다. 다 모인 사냥 무리의 인원과 세는 대단했다. 그것은 곧 하르펠 가문의 세였다.
하인들은 십여 마리의 사냥개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개들도 말을 탄 사람들이 들판에 모여 떠들썩한 분위기를 풍기자 흥분한 것 같았다. 사방으로 짖어대는 개들의 팽팽한 목줄이 보기 살짝 위태로울 정도였다.
나는 하인들이 천막을 치고 사냥감을 조리할 임시 조리터를 준비하는 걸 확인한 다음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곳은 사냥터를 조망할 수 있는 명당이었다.
카이런 공작이 곧 말에서 떨어질 예정이라는 사실 말고도, 흥분해 날뛰는 개들과 개 짖는 소리 때문에 살짝 악을 쓰듯 큰 소리로 대화하며 웃는 남자들의 광경은 제법 흥분될 만한 것이었다.
현대인에겐 축구와 야구가 주요 인기 스포츠지만, 나는 이 하르펠령의 사냥터를 현대로 옮겨갈 수만 있다면 사냥이 바로 인기 스포츠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데 돈도 걸 수 있었다. 사냥 복권도 출시될 것이고 말이다.
참석자들이 다 모여들자 하인이 나서서 작은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사냥개들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개들은 이제부터 무엇이 시작되려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냥터에 감도는 정적은 팽팽했고 나는 침을 삼켰다.
카이런 공작이 끄덕이자 하인이 개들의 목줄을 한 번에 풀었고, 그러자 개들이 숲으로 튀어 나갔다.
그 바람에 개들 근처에 있던 말 몇 마리가 당황하여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을 포함한 가신들은 태연하게 말을 진정시켰고, 카이런 공작 일행은 유쾌하게 웃으며 숲으로 달려갔다.
나는 사냥개가 기세 좋게 침범한 숲 위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카이런 공작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도 들리는 포효를 내며 박차를 가했고, 가신들은 그의 신호를 따라 좌우로 퍼지며 함께 달렸다.
마르고 건조한 공기로 공작 일행의 말발굽 소리가 울리는 소리에 내 심장까지 둥둥 울리는 것 같았다.
저렇게 달리다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죽어야 정상 아닌가…….
사냥을 지켜보는 흥분과 카이런 공작에 대한 걱정이 뒤섞인 심장 떨림은 평소보다 견디기가 더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멀어지자 사냥터 전체가 보이는 곳으로 재빨리 자리를 옮겼다.
카이런 공작은 마치 거대한 새떼의 중간에서 나는 길잡이새 같았다. 그를 중심으로 달리는 가신들은 크고 시커먼 철새들 같았다.
잠시 숲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던 개들이 숲여우 한 마리를 몰고 나오자 카이런 공작이 긴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대열이 파도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숲으로 달려 도망가려 애쓰던 여우는 개들에게 몰렸다가 자신이 회피할 방향 양쪽에서 사람들이 달려오자 순간 멈칫거렸다. 그때 선두의 사냥개가 여우의 목을 물었다.
카이런 공작 무리는 일제히 속도를 떨어트리며 여우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가 무사히 말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냥개는 여우의 목을 물어서 제압만 하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이 말에서 내려 여우의 숨통을 끊어놓자 가신들이 웃으며 고함과 박수를 쳤다.
개들은 인간들의 소란 때문에 흥분했는지 하늘로 짖어댔다.
내가 이제야 끝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주책맞은 내 아빠의 목소리가 들판을 쩌렁쩌렁 울렸다.
“공작님, 이제부터 먹을 걸 잡아야지요! 으하하.”
카이런 공작은 여우를 내버려 두고 즉시 말에 올랐다. 그의 휘파람에 사냥개들은 미친 듯 달려 숲으로 사라졌고, 하인 하나가 전속력으로 달려가 여우를 가지고 왔다.
카이런 공작이 무사하게 출발해서 긴장이 풀린 내게, 지나가던 하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제 시작했으니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겠어.”
생각해보니, 여우는 식용이 아니었고, 먹는다고 해도 이 많은 인원이 먹을 양은 아니었다.
인제 보니 여우는 야구로 치면 일종의 시구였다. 가벼운 짐승 한 마리 잡아서 몸을 푼 다음, 진짜 짐승을 사냥하는 것이다.
그 사이 카이런 공작과 가신들은 숲 너머로 사라져서 이제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울상을 하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