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3/128)

20화

가우린은 이제 포슬린의 곡식 창고를 이용해 카이런 공작을 위기에 빠트릴 수는 없겠지만, 동부 행정관의 권력을 가지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악당은 끈질긴 법이라더니.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아직 동부 행정관을 내정하기 전이었으니 희망은 있었다.

게다가 롬니 행정관이 건재한 상황에서는 가우린이 이대로 행정관이 된다고 해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알았어요. 아빠. 말조심할게요.”

게오르그가 하려던 말을 내가 먼저 하자, 그는 나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게오르그 경!”

그때 여자의 고운 음성이 그를 불렀다.

내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게오르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오호……. 딱 걸렸어!

저쪽 포목점에서 중년 여자 하나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가 팔을 마구 흔들자 곱게 풀어 내린 금발이 등에서 출렁였다.

나는 게오르그를 향해 커다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빠아, 누구예요?”

아리엘사의 어렸을 때의 기억 중에 그런 게 있었지.

“우리 딸은 꼭 곱슬머리가 아니어야 해! 아빠의 평생소원이란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평생 펌이 불필요한 곱슬머리였다. 그리고 저 포목점 아줌마는 가지런한 머릿결이 퍽 아름다웠다.

“호오…….”

내가 배시시 웃자 게오르그는 얼른 몸을 돌려 내게서 얼굴을 숨기려 했다.

나는 눈치껏 말했다.

“아빠, 전 먼저 갈게요.”

“아, 아, 아리엘사,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니까!”

나는 게오르그를 매정하게 버리고 재빠르게 걸어 멀어졌다. 그리고 가판 천막 뒤로 돌아 포목점이 보이는 곳에 숨었다.

포목점 여주인은 게오르그가 다가가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게오르그 경! 오늘은 아리엘사와 나오셨어요? 오랜만의 휴가시군요? 좋으셨겠어요!”

“아. 음. 그렇네.”

흠. 그녀의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장사하는 중이라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미인형이었다. 몸매도 퍽 여성스러웠다.

나한테는 딱밤도 잘도 놓더니만, 그녀 앞에서 커다란 덩치로 연신 헛기침을 하고 있는 게오르그를 보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겼다.

바야흐로 봄이구나…….

돌아서서 고개를 드니 가판대 천막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이곳 북부의 봄은 내게 초겨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냉기 서린 파란 하늘이라도 봄 하늘은 봄 하늘이었다.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투덜거렸다.

절대 봄바람에 싱숭생숭해져서는, 나만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는 절대 아니다.

“여자친구가 포목점을 하는데 딸 옷은 어쩌면 하나같이 그렇게 칙칙한 걸로만…….”

일단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어쩌면 저 쑥맥 아저씨가 그녀에게 ‘제일 두껍고 따뜻한 원단 주시오. 내 딸을 위한 거랍니다!’ 하며 그녀에게 접근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근육질 홀아비와 정체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미인인 자영업자를 내버려 두고 성으로 돌아왔다.

❄❅❄

내 방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카이런 공작이 마음에 걸렸다. 몸이 완전히 나았는지 걱정도 되었다.

그리고 봄바람이 난 아빠를 확인하고 나서 내 마음마저 헛헛해진 탓에 방으로 바로 돌아가기 싫기도 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휴가 날 찾아와서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나를 발견한 체이어스의 눈은 불만으로 가늘어졌다.

그는 나를 못 본 것처럼 태연히 문을 닫은 다음, 집무실에서는 들리지 않도록 나를 복도 구석으로 데려가 말했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휴가였잖아.”

나는 눈을 내리깔며 웅얼거렸다.

“지금도 휴가 중인데요.”

그는 왠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모베일 마을에서 카이런 공작이 했던 말, 체이어스가 한때나마 내게 반했다는 건 정말 한때 잠깐, 어릴 때의 이야기인 게 분명했다.

이웃집 소녀-곧 아리엘사-에게 반한 적도 있다니, 체이어스도 한때는 정상적인 소년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라면서 이성과 감성을 바꿔먹은 게 분명했다.

저 봐, 지금 저 세상 다 못마땅한 눈빛 좀 보라고.

나는 체이어스가 게오르그처럼 여자에게 반해서 얼굴을 붉히거나, 당황해서 실없는 소리를 한다거나 하는 광경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마 저 좋다는 여자가 나타나면-있기나 하다면!-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이렇게 지껄일 남자였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내게 어떤 이점을 발생시키는지 설명해보겠어?’

그는 아마 지금도 오히려 내가 카이런 공작의 일 혹은 휴식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니면 휴가 때 출근하면 급여를 더 줘야 해서?

어쨌든 나는 그의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공작님께서 시키실 일이 없나 하고…….”

“없어. 돌아가 봐. 공작님은 지금 쉬셔야 한다.”

카이런 공작이 내게 시킬 일이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물어봤냐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그는 카이런 공작의 오른팔 책사였고 나는 한낱 시녀였다.

곧, 공작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훈련대장이라고 해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카이런 공작의 유일한 시녀이기 때문에 성의 하인들은 내 말이라면 무조건 들었지만, 그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네. 체이어스 경.”

나는 찌그러진 채 복도를 걸어 온실로 갔다.

“쯧.”

뒤에서 체이어스가 혀를 차는 소리에 나는 얼른 속도를 높여 걸었다. 저자는 아무래도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리엘사.”

“네!”

별안간 들린 부름에 나는 자리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체이어스는 뚜벅뚜벅 걸어 나를 앞질러 갔다.

“그렇게 심심하면 따라와.”

“왜, 왜요?”

나는 가만히 서 있었고 체이어스는 내가 따라올 줄 알고 걸어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거리는 꽤 벌어져 있었다.

그는 잔뜩 찌푸린 채 그 거리를 다시 돌아온 다음, 잔뜩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네가 장부 정리의 천재라며? 공작님의 표현이니까 토 달 생각하지 마. 지금 나한테도 밀린 서류가 잔뜩있으니 와서 그거나 정리해.”

그는 내가 당연히 따라올 거로 생각했는지 다시 몸을 획 돌렸다.

하지만 내가 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싫은데요!”

“하…….”

나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는 그를 버려두고 복도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카이런 공작이 내가 장부 정리를 도운 걸 그에게도 말했을 줄이야. 뜻밖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그가 뭐라고 말했을지 궁금했다. 아리엘사에게 뜻밖의 재주가 있더군? 아니면 아리엘사가 머리를 심각하게 다친 것 같아?

‘아리엘사의 잠재력이 폭발하고 있어. 보고 있으니 매우 기특해.’ 이런 건 아니었겠지…….

나는 이대로 갈 만한 곳이 정원의 온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곳으로 향하며 나는 결심했다.

‘체이어스는 절대 도와주지 말자!’

그라면 평소와 다른 내 모습을 얼렁뚱땅 넘어가 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나를 불러서 일을 도우라고 한 것도 테스트일지도 몰랐다.

내가 전과 달라졌다고 느끼면 내 사다리 병이 가짜라고 의심하거나 아니어도 나를 죽도록 부려먹으려 들겠지.

“무서운 인간 같으니.”

우리가 동부에 다녀온 동안에도 온실은 평소와 다름없이 관리되고 있었다.

정원과 온실 관리를 맡은 하인은 자기 일을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내가 따로 무엇을 부탁할 필요가 없었다.

온실 안은 깨끗했고 내 허브들은 그가 며칠 전에 솎아낸 듯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할 일을 잃고 말았다.

“첫 휴가가 이렇게 심심하다니…….”

나는 구시렁거리며 온실 구석에 있던 의자로 가서 앉았다. 온실로 비쳐드는 햇살은 사람을 몹시 노곤하게 했다.

“방석 없이도 잘 자는군.”

카이런 공작이었다.

“헉! 흡…….”

온실 의자에서 졸다가 고개를 벌떡 쳐든 나는, 입가에 흐른 침을 재빨리 닦았다.

기껏 얻은 휴가에 고작 여기서 할머니처럼 졸고 있는 내 모습이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카이런 공작이 워낙 무표정해서 민망함은 다 내 몫이었다.

“고, 공작님,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너.”

“……네?”

“내일 가신들과 사냥 갈 거다.”

그럼 그렇지…….

[북부인들은 고집 세고 느긋한 걸로 알려졌지만, 봄에 처음으로 북부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시기를 봄이라고 부르며 그 짧은 기간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직 잔혹한 냉기가 묻은 바람을 태연히 맞으며, 북부인들은 햇빛 아래 가축을 풀어놓고, 사냥과 소풍을 즐긴다. 한낮에 기온이 조금만 오른다면 짧은 일광욕을 즐기기도 한다.


당신이 이때 북부인들을 처음 만났다면, 분명히 그들을 성급하고 들뜬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속의 얼음마저 녹으면 농사를 시작해야 하므로, 이 짧은 기간을 즐기는 것은 북부인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머릿속을 스치는 원작의 내용을 곱씹으며 북부인들을 싸잡아 욕했다.

아직 땅속도 녹지 않았는데 이렇게 바쁘시면 여름에는 어쩌자는 거지? 지금은 겨울이라고!

“문제 있나?”

나는 그의 물음에 깜짝 놀라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사냥! 준비하겠습니다.”

“…….”

그러나 공작은 나를 계속 빤히 보고 있었다.

온실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과 공작의 은은한 아우라가 뒤섞이니, 온실이 마치 그의 빛으로 꽉 찬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이제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어쨌건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님?”

“뭘 준비해야 하는지는 알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