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너는 누구지?
하르펠 성으로 출발하는 내가 탈 짐마차 안은 마치 방석 상인의 마차처럼 보였다. 앉을 자리도 좁을 만큼 쌓여 있는 방석은 기사들의 장난이 틀림없었다.
기사들은 기가 막힌 얼굴로 서 있는 나를 보고 키득거리며 지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다 꺼내 집어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소심한 아리엘사이므로, 억지로 마차에 올라타 방석들 사이로 몸을 욱여넣었다.
그러나 화를 참은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마차가 흔들리며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방석 위에 엎어져 잠이 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쳇.
어쨌든 하르펠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날씨도 따뜻하고, 늑대도 없고, 마차에도 익숙해져서 몸도 마음도 편안했다.
무엇보다 카이런 공작이 건강을 회복했기에 근심이랄 게 없었다.
북부의 봄볕 아래, 은은한 아우라를 되찾은 카이런 공작의 말 탄 모습을 보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
우리가 성에 도착했을 때 맨 먼저 달려 나온 사람은 게오르그였다. 그는 훈련을 마치고 먼저 성에 돌아온 터였다.
“훈련은 무사히 마쳤나?”
“보고드린 바와 같습니다.”
“수고했소.”
카이런 공작은 게오르그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나를 향해 말했다.
“너도 게오르그 경과 함께 며칠 쉬도록 해.”
“저는 괜……!”
“이놈이!”
게오르그는 껄껄 웃으며 그 굵은 팔뚝으로 내 목을 감아 살해하려 했다.
카이런 공작은 게오르그에게 질질 끌려가는 나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집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아빠, 아파요, 아프다고요!”
그는 인정사정없이 나를 끌고 가다가 자기가 물어볼 게 떠올랐을 때야 나를 놓았다.
“공작님이 편찮으셨다면서?”
“예, 좀…….”
“너 이놈, 공작님 잘 모시지 않고서!”
카이런 공작을 살린 건 나거든요?
그는 내 얼굴이 어두워지자 미안했는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긴 내가 네 걱정은 안 했다. 못난이는 원래 튼튼하니까! 하하하!”
“아빠는 정말!”
방에 도착해서 다시 보니 그는 몹시 들떠 있는 상태였다. 아마도 내가 무사히 돌아와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따뜻해져서 그를 향해 말했다.
“아빠는요, 훈련 잘 다녀오셨어요?”
“그까짓 거, 녀석들이 고생했겠지. 흐흠.”
북부의 기사들이 강하다는 명성을 얻은 건 카이런 공작의 위명 외에도 이 네모난 남자, 게오르그의 영향이 컸다.
하르펠가의 기사 게오르그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은 멸종한 거대한 북부 들소 떼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자기 일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내가 안부를 물어준 게 기분이 좋은 듯 입가를 씰룩거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컸네. 혼자서 공작님 수행도 다녀오고.”
나는 기사들에게 놀림 받은 기억이 떠올라 발끈해서 말했다.
“아빠가 절 이렇게 애 취급하니까 다들 절 그렇게 놀려대는 거라고요!”
“애를 애 취급하지, 그럼 뭐로 취급해? 저기 북쪽 방벽 너머의 마물 취급해주랴?”
게오르그가 버럭 소리를 질러서, 나는 멈칫 물러나고 말았다.
대체, 이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딸 아니면 마물밖에 없단 말인가?
나는 이자를 더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 배고파요. 우리 밥 먹으러 가요.”
나는 그의 팔뚝을 붙잡아 당겨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커다란 몸이 물먹은 나뭇가지처럼 부드럽게 당겨왔다.
식당에는 이번에 동부에 다녀온 기사들도 와 있었다. 그들은 게오르그를 만나자 방석이며 늑대에 대해 마구 떠들어댔다.
어처구니없게도, 게오르그는 그 이야기들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그들과 편을 먹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아리엘사를 가볍게 대하는 태도는 바로 이 게오르그로부터 시작된 것이 확실했다.
“이건 아동학대라고.”
나는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식사를 했다.
❄❅❄
카이런 공작의 명령대로, 게오르그와 나는 휴가를 함께 보냈다. 우리는 성의 시장에 함께 가서 구경했다.
나는 사실 근육이 저렇게 많은 사람이면 닭가슴살만 먹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먹고 싶을 것 같다는 이유로 먹거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군것질했다.
그의 식사량은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아리엘사, 사탕을 파는구나. 먹고 싶지?”
“아빠는, 제가 애예요?”
“…….”
그가 대답 없이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아서, 나는 재빨리 먼저 말했다.
“네네. 애죠. 아빠한텐. 앗!”
그는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딱밤을 놓았다.
“알면 똑바로 해.”
“아니, 대체 뭘 똑바로……. 진짜 너무하다고요!”
하지만 그때 게오르그는 이미 나를 못 본 체하고 시장 상인 하나와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가만히 보면 그는 은근히 아는 사람이 많았다.
잠시 혼자 남은 나는 천막을 친 상인과 노점상들, 팔려 나온 건지 여기서 노는 건지 분간도 되지 않게 시끄럽게 구는 닭과 염소 따위의 가축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을 지켜보았다.
하르펠 성은 생기 넘치고 평화로웠다. 이게 다 우리 남주가 잘해서 그런 거다.
나는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게오르그와 팔짱을 끼었다. 이 츤데레 아저씨의 엄청난 반전을 알지도 못하고 말이다.
사실 나는 내가 중년 아저씨와 하루 종일 즐겁게 놀고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게오르그는 걸핏하면 내게 딱밤을 놓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지만, 내가 보지 않을 때는 내내 나를 향해 헤벌쭉 웃고 있었다.
저 츤데레 아저씨 같으니.
나는 문득 생각나 물었다. 게오르그라면 알 것 같았다.
“아빠, 가우린 씨는 누구예요?”
“응? 네가 그자를 어떻게 알아?”
게오르그도 동부의 소식을 들은 듯 살짝 인상을 쓰며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공작님이 언급하신 걸 들었어요.”
그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너, 공작님 근처에서 들은 말들을 함부로 입에 담으면 안 된다. 잘 알고 있는 것 같더니…….”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역시 사다리 병인가?’ 하는 얼굴로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잘 알고 있어요. 아빠니까 드리는 말씀이죠.”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할리사 행정관이 수감된 건 나도 알고 있다. 가우린은 동부의 젊은 피지. 아버지의 후광도 있으니 아마 문제없이 차기 행정관이 될 거다.”
게오르그도 체이어스와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가우린을 언급하지 않았어도 누구나 짐작할 만한 일인 듯했다.
“저는 그냥……. 그가 믿을만한 사람인가 하고요. 이번에 모베일에 가서 행정관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깨닫게 되었거든요.”
“오오. 이놈이 좀 컸나?”
게오르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의 귀를 경계하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암. 중요한 자리지. 기사들은 공작님을 따라 말 위에서 죽어야 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행정관은 뒤에 남아 보급을 보내고 백성들을 돌봐야 한다. 그러니 중요하지.”
게오르그가 죽음을 말하자 내 기분은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는 늘 자신이 말 위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원작이 예정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스르르 팔을 놓자 게오르그는 조금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가우린 씨는…….”
“똑똑한 자라더구나. 장로들을 구워삶을 만큼 처신도 잘하고 말이다.”
들을수록 완벽한 배신자 재질이 아닌가.
게오르그는 내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롬니 행정관이 다른 행정관들을 아우르고 있으니 가우린이 좀 미숙하다고 해도 도와줄 거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묵묵히 걸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원작은 가우린이 롬니 행정관을 밀어내고 영지 북부의 행정관 자리를 차지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내가 장부를 빠르게 정리해서 롬니 행정관의 무죄를 증명하는 바람에 그 일이 무산되었는데, 이제는 그가 동부의 행정관이 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