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눈은 최대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리고 입술도.
내가 세수를 끝냈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내가 부드럽게 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수건을 빨아놓고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회복하면 저항력을 길러주는 차 종류만 집중적으로 먹여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저항력…….
나는 벌떡 일어나 마을로 달렸다.
❄❅❄
“오오, 역시 공작님의 체력은 놀랍습니다. 제가 처방해드린 약이 효과를 제대로 발휘했군요!”
이틀 후, 의사는 거짓말같이 회복한 공작 앞에서 자신의 기쁨을 자화자찬으로 표현했다.
그동안 체이어스는 내 곁에서 팔짱을 낀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고생했소.”
“그럼 쉬십시오. 아리엘사에게 새 약을 전해두고 가겠습니다.”
의사가 나가자 카이런 공작이 옷을 갈아입으며 체이어스에게 말했다.
“공사는 어떻게 돼가지?”
“추가 주문한 자재는 오늘 안에 모두 도착할 겁니다. 촌장은 마을에서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마을에서는 공작님의 분노를 살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좋아.”
“할리사 행정관은 자백서에 서명했습니다. 성으로 호송했습니다.”
“동부 장로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겠군.”
체이어스는 나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나를 내보내려는 것이었다.
“아리엘사. 잠시-”
“-상관없어.”
카이런 공작은 내 손에 들린 옷을 채어가며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체이어스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았지만 못 본 척했다.
그는 카이런 공작이 내가 정무에 대한 대화를 듣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못마땅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불평하는 대신 내가 방 안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생각해두신 사람이 있으십니까?”
“카르고의 아들 가우린을 생각 중이다.”
“선대 행정관의 아들이라면 동부 장로들도 불평을 못 하겠죠. 젊은이가 행정관이 되는 게 아무리 고깝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자가 롬니를 밀고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그가 신고한 정황은 그럴 법했습니다. 무고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나는 숨을 참은 채 가만히 있었다.
카르고의 아들 가우린. 그는 배신자였다.
포슬란 창고에서 곡식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행정관 롬니를 밀고한 자, 차기 동부의 행정관으로 거론되는 자 가우린.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원작의 내용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원작에서 영지 북부의 행정관으로 포슬린 창고를 관리하던 자의 이름이 가우린이었다.
그는 카이런 공작이 야만족과의 전쟁에 나갔을 때 고의로 보급 식량을 보내지 않아 카이런 공작의 패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원래대로라면 롬니를 밀어내고 영지 북부의 행정관이 되었어야 할 자가, 이제 동부의 행정관이 되려 하고 있었다.
배신자가 행정관이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아아……!”
나는 뒤로 물러나다가 의사가 주고 간 약을 늘어놓은 쟁반을 엎고 말았다. 약병들이 깨어지며 엄청난 소리를 냈고, 유리 조각과 약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내가 당황해 주저앉자 체이어스가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갔다.
“하인을 보낼 테니 가만히 있어. 너까지 다치면 혼날 줄 알아.”
둘만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저도 모르게 카이런 공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이 물었다.
“할 말 있나, 아리엘사?”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공작님께서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으니 그런 중요한 결정은 성에 돌아가셔서 차차 하시면……. 걱정이 돼서요.”
일단 약 쟁반을 엎어서 그들의 대화를 끊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렇게 다급한 마음에 한마디를 더 뱉고 말았다.
“공작님이 편찮으실 때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러니…….”
“…….”
카이런 공작은 잠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왜, 지금, 내 판단력이 흐려 보이나, 아리엘사?”
“아니, 그게 아니라……!”
대답을 추궁하는 그의 시선에 숨이 턱 막혔지만, 오히려 이것은 기회였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답했다.
“공정해야 하는 자리에 남을 무고하는 자가 앉는다는 게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공작님께서 지금까지처럼 현명하게 결정하실 텐데……. 저는 단지 공작님께서 건강을 해치시는 게 싫어요…….”
나는 최대한 소심하게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엉망이 된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카이런 공작은 냉랭한 표정으로 나를 놓아주었다.
“그 건은 천천히 생각해보겠어. 그와 롬니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니 말이야.”
“……네. 공작님.”
나는 내심 안도하며 일단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내 손끝의 상처에 내리꽂혔을 땐 심장이 덜컥 멈추는 것 같았다.
“날 따라한 건가?”
“아, 이건…….”
“이건?”
“공작님 미음을 준비하다가…….”
“아리엘사.”
그의 나지막하고 짧은 부름에,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그가 다 알고 묻는 것이 뻔한데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게 더 바보짓 같았다.
“네가 내 손에 발라준 연고, 의사 선생이 준 것 아니야. 그가 이게 뭐지 하는 듯이 인상을 쓰는 걸 봤다.”
내 심장은 폭주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 사람에게는 다 들키고 마는지!
나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려고 몹시 애를 썼다.
“네가 먹인 그 향이 특이한 약도 필시 의사 선생은 모를 테지? 나를 살린 게 본인이 조제한 약이 아니라는 것도.”
“제가, 차 때문에 도서관에 다니면서-”
“-네가 나를 살린 게 두 번째인가?”
나는 내가 만든 약이 차에 대해 공부하다가 알게 된 것이라는 변명을 얼른 생각해냈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은 내 말을 깨끗이 자르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 내가 그를 두 번째 살린 건가?
나는 눈을 커다랗게 굴리며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말해. 아리엘사.”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원하는 답을 듣지 않고는 나를 놓아주지 않을 태도였다.
“벌집 안에는 여왕벌과 알을 보호하려고 만들어진 특별한 항생물질이 있어요. 염증에 효과가 좋아요.”
벌집에서 천연항생제를 추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 이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마을의 공사터로 달려가 버려진 벌집을 뜯어와 다큐멘터리에서 본 추출법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그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느 틈에 다가온 그는 여전히 더운 손으로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열병이 내 손으로 옮아 오는 것만 같았다.
“이 상처는 벌집을 뜯느라고 생긴 건가?”
“제가 좀…… 어설프잖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카이런 공작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는 단지 내 손을 꾹 쥐었다.
그는 내 손을 부드럽게 놓더니 돌아서며 말했다.
“어설프군. 거짓말이.”
“…….”
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공작은 외투를 입으며 평온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외출이나 하지.”
❄❅❄
나는 카이런 공작의 뒤를 따라 말을 타고 가는 동안 내내 겁에 질려 있었다.
며칠 사이 완연히 풀린 낮 기온은 퍽 포근하게 느껴졌고, 녹음을 더해가는 주변의 사철나무 숲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즐길 수가 없었다.
카이런 공작이 나를 으슥한 데로 데려가서, ‘네가 가진 이세계의 지식을 실토해라!’ 하며 나를 협박하는 망상이 떨쳐지지 않았다.
타이라 경과 다른 기사 둘이 내 뒤를 따르고 있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이 말을 멈춘 곳은 숲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드넓은 초원이었다.
북부의 차가운 봄이 파랗게 깔린 초원에서, 멀리서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음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음은 우리를 향해 재빨리 가까워졌다.
“어머……!”
나는 망아지만큼 커다란 사슴 떼가 달려오는 광경을 처음으로 구경하고 압도당해버렸다.
삼 분의 이가량은 뿔이 없는 암컷이었지만, 나머지 수사슴들은 커다란 나뭇가지를 꺾어다 머리에 꽂은 것 같은 커다란 뿔을 달고 있었다.
수사슴들은 암사슴들을 몰이하듯 우르르 달려온 다음, 저희끼리 거리를 벌렸다. 그중 두 마리가 나오더니, 땅을 발굽으로 툭툭 찍으며 서로를 마주 보듯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것이 우두머리를 가리는 싸움이라는 것을 나도 알 수 있었다.
“매년 이맘때만 볼 수 있는 광경이야.”
카이런 공작은 나지막하지만 퍽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기사들이 탄성을 냈다.
마치 그의 말을 기다린 것처럼, 수사슴 두 마리가 서로를 향해 돌격했다. 거대한 뿔이 얽히며 부딪히는 딱딱 소리는 숲으로 날카롭게 퍼졌다.
그 두 마리는 머리를 이리저리 꺾어가며 맞부딪히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뿔의 가지가 끼어 머리를 빼지 못해 아슬아슬한 순간이 펼쳐졌다.
몇 차례 이 과정을 반복하다가, 하나가 뿔에 목이 찢어지며 물러나자 이긴 놈이 묘한 울음소리를 내며 입김을 뿜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른 수사슴이 이긴 사슴에게 도전하겠다는 듯 그것의 주변을 뛰어다녔다.
나는 머지않아 새로운 싸움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과정을 반복하고, 우두머리가 정해지면 그때부터 짝짓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퍽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북부에는 정말로 봄이 온 것이다.
카이런 공작이 이맘때에만 볼 수 있는 장관을 떠올리며 나를 함께 떠올려 주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뛰었다.
나는 슬쩍 뒤로 물러가 타이라 경에게 가까이 가서 말했다.
내가 자신에게서 멀어져 타이라 경에게 가는 걸 보고 카이런 공작이 잠깐 나를 흘겨보는 걸 알 수 있었다.
“타이라 경.”
마침 그때 카이런 공작과 눈을 마주치고 만 타이라 경이 좀 난감해 하며 대답했다.
“으응? 왜?”
“저 사슴들, 저러다 죽기도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