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나는 카이런 공작이 아리엘사답지 않은 내 건방진 말투에 화가 났을까 봐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마치 빙긋 웃는 듯 보였다.
너무 긴 시간이 지난 듯 느껴진 후에, 그가 말했다.
“너, 요즘 많이 다르다. 아리엘사.”
“…….”
이번에는 내가 입을 다물었다.
“죄송…….”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카이런 공작이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죄송하지?”
그 정도 목소리를 내는 데도 힘이 들어 하는 게 느껴져서 나는 점점 미안해졌다.
“달라서…….”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빙의자라고 큰소리를 쳤으면, 그의 수호천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으면, 이런 일은 없어야 했다.
배신자가 행정관에게 누명을 씌우는 걸 막고, 그가 호수에 빠져 폐렴으로 죽을 뻔하는 일도 막았는데, 그가 작은 생채기 하나로 위기에 빠지는 걸 눈앞에서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수호천사로는 자격부족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 순간 떠오른 생각에 머리털이 솟는 것 같았다.
‘그가 폐렴을 피해서 지금 앓아누운 걸까……?’
나는 겁에 질린 채로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달라서, 싫으세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그건 아닌데.”
어느 틈엔가 눈을 감은 그의 입꼬리가 약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곧 숨소리가 편안해져 자세히 보니 잠이 든 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 말해주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불안을 곱씹으며 그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렇게 나는 밤새 머릿속으로는 원작의 줄거리를 곱씹으며, 눈과 귀로는 카이런 공작의 상태를 살피며 보냈다.
❄❅❄
그날 밤은 길었다.
카이런 공작의 열은 점점 올라갔다. 그는 식은땀에 젖은 채로 이따금 신음을 흘렸다. 나는 계속 그의 물수건을 갈아주며 땀을 닦아내고 진정시켰다.
그러다 새벽이 되었을 때, 그에게 오한이 찾아왔다. 그가 이를 악물고 오한을 견디는 모습은 정말 가슴이 아파서 봐주기가 힘들었다.
그가 약해지는 모습은 내 마음의 안정을 완전히 흔들어놓고 있었다.
나는 의사의 말대로 그의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는지 강박적으로 살폈다.
나는 그러다 깨달았다. 등잔불 빛이 너무 어두워서 갑갑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그의 아우라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튕기듯 일어나자 의자가 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체이어스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리엘사, 무슨 일이야!”
그가 공작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가 우연히 지금 들어온 것인지, 문 앞에서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그게…….”
“말해. 아리엘사.”
나는 체이어스가 붙잡은 어깨가 아파서 입을 꾹 다물었다. ‘공작님의 몸을 휩싼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어요.’ 따위의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게……. 잠깐 졸았어요.”
졸다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렇게 변명했다. 하지만 결과는 내 예상보다 더 끔찍했다.
“대체, 쓸모없는 녀석이군!”
체이어스는 나를 밀치듯 지나가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기가 앉았다.
나는 그를 원망스럽게 불렀다.
“체이어스 경?”
“공작님 상태를 소문낼 순 없다. 낮에는 방에서 쉬시는 걸로 할 테니 아침부터는 네가 종일 공작님을 돌봐. 한눈팔지 않고 말이다. 지금 좀 자두고.”
나는 억울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네. 체이어스 경.”
내가 나가려 할 때 체이어스가 차갑게 말했다.
“너,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어?”
“그거야…….”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지금 나는 위독한 공작을 돌보다 졸기나 하는 한심한 시녀였다.
“북쪽의 마물을 막을 수 있는 건 공작님뿐이다. 그건 황실 일족이 다 몰려와도 못해. 공작님이야말로 이 세상을 지키는 분이란 말이다.”
“네…….”
“너는 그런 분을 돌보는 소임을 맡았다. 네가 그 정도의 책임감도 없다면 지금 말해라. 내일 아침에 바로 집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까. 최소한 게오르그 경은 좋아할 테지.”
치사하게 게오르그까지 들먹이다니!
나는 이를 꾹 문 채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어요.”
나는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인제 보니 북부 하르펠령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카이런 공작이 아니라 체이어스인 것 같았다.
나는 문에 등을 기대고 가는 한숨을 쉬었다. 최악의 밤이었다.
그때 문 너머에서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나와 체이어스의 작은 소동 때문에 깬 것 같았다.
-너 아리엘사에게 왜 그렇게 심하게 구는 거냐. 반했던 주제에.
헉……. 이건 무슨 소리지?
나는 저도 모르게 문으로 귀를 대었다.
그러나 대답하는 체이어스의 목소리는 짜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기사단 연무장 한가운데로 공을 차서 날리는 애를요?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공작님. 요즘 하는 걸 보면 공작님은 고사하고 염소 한 마리도 못 맡기겠습니다.
나는 그때, 아까 체이어스가 때맞추어 나타난 건 역시 내가 카이런 공작을 잘 돌보고 있는지 안심이 되지 않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심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나는 이제 체이어스가 공식적으로 싫었다.
❄❅❄
날이 밝았을 때 하인이 나를 깨우러 왔다.
내가 카이런 공작의 방으로 달려갔을 땐 의사 선생이 공작의 입에 약을 떠 넣고 있었고, 체이어스는 물러나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를 내버려두고 지금까지 자버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본 의사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고열은 떨어졌다. 저 약을 매시간 먹여드려라.”
“네. 선생님.”
순간적인 긴장이 풀리며, 나는 그가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이런 공작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아우라는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빛을 내고 있었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참으면서, 나는 체이어스에게 말했다.
“공작님이 드실 걸 가져올 테니 조금만 더 부탁드려요.”
그리고 주방으로 가서 카이런 공작을 위한 미음을 끓였다.
그가 열이 떨어져서 다행이라는 감사한 마음과 주인공이 앓아눕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원망의 마음이 미음과 함께 보글보글 끓어댔다.
그리고 내가 밤새워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도.
내가 카이런 공작의 방으로 돌아가자 체이어스는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미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미음을 호호 불어 식혔다.
그사이 눈을 뜬 카이런 공작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침 튀기면 안 먹어.”
반쯤은 진심 같고 반쯤은 농담 같아서, 나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응시했다.
하지만 자주 그렇듯, 그가 진짜로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조심할게요.”
나는 소심하게 말하며 미음을 저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포기하고 그냥 누웠다. 그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렇게 빤히 바라보면 어쩌라는 건지.
그것은 왠지 민망했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정신을 차려서 나를 당혹시킬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는 사실이 반가웠지만 그렇다고 민망한 게 안 민망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겨우 용기를 내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수척해진 볼로 나를 덤덤하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나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뜻밖에 원작 속이었다.
원작 속에서 그가 호수에 빠진 후에 폐렴에 걸렸을 때였다.
그가 힘없이 누워 시녀가 떠먹여주는 미음을 받아먹는 장면의 묘사가 딱 지금 같았다.
세상에…….
내가 그릇을 들고 일어나자 카이런 공작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드세요. 충분히 식었어요.”
카이런 공작은 상체를 슬쩍 일으키더니 말했다.
“먹여.”
“음…….”
그의 말과 표정에는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나를 조금 안도하게 했다.
내가 그의 입에 미음을 떠 넣으려 몸을 가져가자 그의 피부에서는 여전히 후끈한 열이 느껴졌다. 나는 스푼을 든 손이 살짝 떨려서 내 손에 바짝 집중했다.
“아리엘사, 됐어.”
더 못 보겠는지, 카이런 공작은 나를 물러나게 했다. 그는 민망해하는 내게서 그릇을 받더니, 미음을 한 번에 마셔버리고 누웠다.
“공작님, 그렇게 드시면 어떡해요……!”
“음식을 줄줄 흘린 다음에 시트 갈고 내 옷 갈아입히느라 진땀 뺄 거면 이 편이 낫지.”
“…….”
나는 말문이 막힌 채 있다가 물수건을 만들어 왔다. 그에게 세수를 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막상 그에게 다가가려니 몸이 뻣뻣해졌다.
비록 수건으로라도 얼굴을 만진다는 건, 뭔가 지나치게 개인적인 기분이 들었다. 열을 식히려 이마에서 땀을 닦아내는 것과 세수를 시켜주는 건 기분이 너무 달랐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젖은 수건을 든 채로 카이런 공작 옆에 서 있었고, 인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
내가 마치 그의 목욕을 도울 때처럼 눈을 꾹 감고 얼굴을 문질러대자, 카이런 공작은 고개를 비틀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끄으. 아리엘사!”
“죄송합니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땀에 젖은 초췌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작게 말했다.
“체이어스를 불러줘.”
카이런 공작은 체이어스에게 닦아달라고 할 모양이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내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싫었고, 체이어스가 나를 더 무시하게 될 것도 싫었다.
“아니에요, 제가 할 거예요!”
나는 작게 소리치고는 손을 뻗어 카이런 공작의 뺨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의 얼굴 구석구석을 집중해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는 잠시 내 비장한 얼굴을 보더니 눈을 감았다. 입가가 조금 웃는 듯도 싶었다.
나는 그의 양 뺨 다음에 이마를 닦았다. 그리고 눈으로 갔다. 눈썹뼈가 닿는 감각을 생경하게 느끼면서, 나는 그의 짙고 가지런한 속눈썹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