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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8/128)

16화

나는 그때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카이런 공작에게 꿀을 들이부은 옌델 차를 따라주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너무 화가 나 있었고, 겨울딸기 차가 별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긴급 처방을 쓸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스에는 단것이 진리 아닌가.

체이어스는 아직 분이 식지 않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도 모를 거로 생각했답니다.”

“흥.”

카이런 공작의 대답은 그게 다였다.

나는 체이어스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없이는 돌아다닐 수 없는 날씨임에도, 체이어스는 셔츠 바람에 그나마 목의 단추를 몇 개나 풀어놓고 있었다.

대체 뭘 했기에 몸에 열이 오른 거지?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옌델 차의 향에 코를 살짝 찡그리며 체이어스를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이 내가 차에 꿀을 너무 많이 타서 그러는 것인지, 부정한 행정관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체이어스가 말을 이었다.

“우회로로 운송해야 해서 앞으로 들여오기로 계약한 목재에 운송비가 더 붙은 것은 맞지만, 가격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카이런 공작은 차를 조금 마시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번에는 내가 차에 꿀을 너무 많이 넣어서가 확실했다.

“마물들은 놔둬도 되겠군.”

그 말에 체이어스가 안심했다는 듯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행정관과 촌장은 어떻게 할까요?”

“규정대로.”

“하아…….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체이어스는 마치 범죄자들을 동정이라도 하듯 대꾸하고 밖으로 나갔다.

감히 카이런 하르펠을 속이려 들다니, 행정관도 참 간이 큰 사람이었다. 연배로 보아 그 자리에 오래 있은 사람 같은데, 카이런 공작이 이렇게 꼼꼼하게 살필 것을 정말로 예상 못 했을까?

카이런 공작도 나와 같은 생각을 곱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욕심에 눈이 멀면 한 치 앞을 보지 못하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찻잔을 받아가는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심기가 불편할 때 트집잡히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피하려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공작님!”

카이런 공작의 손가락 끝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아까 공사장에서 손이 찔린 상처가 감염된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이 ‘신경 쓰지 마.’라고 말했을 땐 나는 이미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의사에게 달려가 상처용 연고를 얻어와 그의 손가락에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내가 다 끝났다고 물러나자 카이런 공작은 손을 공중에 들고는 잔뜩 찌푸렸다.

붕대를 너무 칭칭 감아서, 그는 검지에 작고 흰 공을 끼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어설픈 솜씨는 공작의 체면을 깎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잠시 뚫어지게 보던 그는 자포자기한 듯이 중얼거렸다.

“핑계 김에 쉬어야겠군.”

핑계 김이 아닌데.

원작에서 그의 체력과 무력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에 대한 수차례의 묘사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피로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막연한 불안감도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그 카이런 공작이다.

나는 다정하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조금 쉬셔요. 방해하지 않도록 체이어스 경께 전해두겠습니다.”

“그래.”

나는 그가 잘 수 있도록 커튼을 쳐두고 얼른 물러 나왔다.

❄❅❄

한숨 자고 일어날 줄 알았던 카이런 공작은 저녁 식사 때가 다가와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방으로 찾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일어나셨나요?”

대답이 없었다.

“공작님,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침대에 들어 있었고, 커튼을 쳐둔 방 안은 어둑했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들어가서 커튼을 조금 걷었다.

“공작님……?”

나는 직감적으로 잘못된 것을 알았다.

나는 재빨리 침대로 다가가 카이런 공작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의 이마는 불덩이 같았다.

“……!”

나는 놀라서 붕대를 감은 그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

카이런 공작은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것도 피로하다는 기색이었다.

“고, 공작님.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감은 붕대를 풀었다. 손가락의 작은 상처 주변은 기분 나쁜 검붉은 색으로 부어 있었다.

의사의 약이 전혀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심해져 있었다.

‘사다리 병’ 같은 이상한 이름은 잘 붙이면서 효과도 없는 약을 주다니!

“공작님, 의사를 불러올게요. 잠시 기다리세요.”

나는 즉시 달려 나갔다.

그는 하르펠 성을 떠난 이후 내내 쉰 적이 없었으니 피곤한 것이 당연했다. 그런 상태에서 상처가 생기자 쉽게 감염된 것이다.

의사에게 달려가며 나는 화가 났다. 갑갑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의 미래를 다 알고 있으면 뭘 하냐고. 그가 병에 걸리는 것 하나 막지 못하는데 말이다.

내가 의사의 손목을 어떻게 끌고 왔는지는 기억에도 없었다.

어쨌든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는 열이 끓는 카이런 공작보다, 의사가 더 식은땀을 흘리며 헐떡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매몰차게 말했다.

“선생님, 공작님 몸이 불덩이 같다고요!”

“흠…….”

“선생님!”

카이런 공작을 살펴보던 의사는 허리를 펴더니 내게 느릿하게 말했다.

“아리엘사.”

“네!”

“네가 흥분하는 건 도움이 안 된다. 가서 끓인 물을 가져와. 깨끗한 물이 많이 필요하다.”

“네.”

의사 선생의 말이 옳았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대답하고는, 카이런 공작과 의사를 남겨두고 주방으로 갔다.

내가 끓인 물을 들고 가자 의사는 거기에 날이 얇은 칼을 씻어내더니 카이런 공작의 환부를 찔러서 피를 흘려냈다.

이미 감염이 몸으로 퍼졌는데 저런 사혈법이 소용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 세계의 의사는 내가 아니라 그였고, 내게는 현대의 상식 말고는 진짜 의학지식은 없었다.

나는 초조해서 주먹을 쥐고 왔다 갔다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모든 걸 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 그의 인생 전부를 안다.

그런데 왜 그의 감염증을 치료하는 방법은 모르는 걸까.

‘이게 뭐람!’

내가 울상을 하고 있을 때 체이어스가 들어왔다.

그는 지금 나는 모든 것이 다 못마땅한데, 누구 하나 끝장내버리면 좀 나아질 것 같기도 하다는 얼굴로 의사의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다가가자 체이어스는 작게 말했다.

“공사장에서의 상처 때문이라고?”

“그런 것 같아요.”

체이어스는 무력하게 누운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며, 아주 작지만 무섭게 말했다.

“믿을 수가 없군. 나는 공작님이 앓아누우신 걸 본 적이 없어.”

밖으로 나가버리는 체이어스의 시선과 말투는 마치 나를 원망하는 듯했다. 나는 가슴이 아파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체이어스도 화가 나고 안타까워서 하는 말인 것을 아는데, 괜스레 내 무능력을 탓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가 미워졌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에게 의존하며 걱정하는 마음은 그도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의사는 카이런 공작의 손에 다시 붕대를 감아주고 일어났다.

“아리엘사. 공작님의 체온이 너무 올라가지 않도록 돌봐드려라. 할 수 있겠니?”

“네. 할 수 있어요.”

“공작님의 호흡이 불안정해지거든 바로 불러.”

“그렇게 할게요.”

의사가 나가고 나자, 나는 외딴곳에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우뚝 서 있어야 했다.

“훗.”

작게 웃은 것은 카이런 공작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환자보다 더 죽을상을 하지? 아리엘사.”

“…….”

‘당신 때문이잖아!’

나는 마음속으로만 외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아까 의사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괜찮으세요?”

“지금 내가 괜찮아 보이나?”

“저에게 핀잔을 주실 기운이 있으신 걸 보니 다행이네요.”

나는 불만스럽게 뱉어버리고 고개를 떨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잠깐 동안 너무 무서웠다.

원작에서 카이런 공작이 폐렴을 앓다가 죽을 뻔한 사건 이후, 영지 시찰 같은 일은 지나가듯 그려진 일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여행에 대한 서술은 ‘공작이 거기도 다녀왔다’는 한 줄로 처리될 수 있도록 무사 무탈하게 끝나야만 했다.

마치 그가 늑대를 베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굴었던 것처럼.

그런데 원작에도 없는 사고가 일어나다니…….

항생제가 없는 이 세상에서 감염증은 치명적이었다.

숲에 쌓아둔 목재에 낀 이끼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깊은 숲에서 자라는 흔치 않은 곰팡이 같은 것이 등산객에게 병을 일으킨다는 다큐멘터리까지 떠오르자 숨이 차오를 정도였다.

카이런 공작이 없는 이 세상은, 주인공을 잃은 소설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게슴츠레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 마음은 놀랍게도 바로 안정되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버티고 이겨낼 것이다. 저 먼 사막에서 얼어붙은 땅끝에 닿을 때까지 그는 그래왔으니까.

나는 눈물이 나올까 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체이어스 경을 불러올까요?”

“놔둬. 지금 행정관도 촌장도 없어서 바쁠 거야.”

“아…….”

행정관과 촌장이 횡령죄로 잡혀가 버렸으니, 이제 복구공사의 지휘는 꼼짝없이 그가 맡아서 진행하게 되었을 터였다.

“너는 그냥 거기 앉아 있어.”

그는 철괴처럼 빈틈없는 밀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냥 거기 앉아 있으라는 말은 잔뜩 비어 있고 실없이 여겨져서, 나는 무심결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는데, 그가 가늘게 연 눈을 내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점점 민망해졌다.

내가 벽으로 눈을 피해버리자 그는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긴 침묵이 어색해서, 나는 작게 툭 뱉고 말았다.

“왜 가시 같은 데 찔리고 그러세요. 애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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