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내 심장은 위험하리만치 뛰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그에게 들키면 부끄러워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좀 이상해도 사다리 병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이성이 돌아오자 아까의 내 행동이 너무 바보 같아서 울고 싶어졌다.
과해. 카이런 공작. 당신은 나에게 과해…….
내가 울기 직전이 되었을 때 그가 욕조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무시한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그는 나체였다……?
내가 찔끔 나온 눈물을 닦느라 잠시 눈을 감은 순간에 그가 내 앞을 지나간 건 신의 축복이었다.
아니, 심술인가……?
어쨌든 내가 벽을 보며 순간적인 패닉에 빠져 있는 동안, 그는 순식간에 옷을 걸치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리엘사.”
“……네! 네, 공작님!”
나는 얼른 달려가 그의 머리에 수건을 덮었다.
피곤하다던 말이 생각나서 오늘은 더 꼼꼼히 열 손가락 끝으로 두피를 꾹꾹 눌러 마사지를 하며 말렸다.
하지만 내게 몸을 맡기고 눈을 감은 카이런 공작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내가 진정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어느 정도 마르자 침을 꼴깍 삼키고 답했다.
“다 된 것 같은데요. 공작님.”
그는 말없이 일어나더니, 그대로 침대로 가서 쓰러졌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 방정맞은 심장은 이불 속에서 야단치기로 하고 말이다.
❄❅❄
낯선 내 방으로 돌아오니 한결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음란 마귀가 창밖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이 여관방은 우풍이 세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생활만은 마음에 들었다.
카이런 공작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도 기뻤고, 그가 내가 주는 것이면 뭐든 다 잘 받아먹는 것도 그랬다.
심지어 그는 내게 몸을 맡기기는 데도 스스럼없었다…….
그는 어렵고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나만은 조금 예외적인 존재라는 느낌은 퍽 확실해서 나는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어느 틈엔가 남주맘이 되어버린 나는 그래서 그와 보내는 일상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내일도 우리 카이런 공작과 또 하루를 보내야지.
확실히 여주인공이 아니라 그의 시녀로 빙의한 게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는 언젠가는 남부의 장미라 불리는 후작의 딸과 만나야 했다. 원작이 구축해놓은 대로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안 돼?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 미쳤나 봐!”
나는 멋모르고 나대는 내 심장을 손으로 가만히 짚어보았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은, 분명히 오늘의 과한 시각적인 자극 때문이었다. 아니, 오늘은 촉각 자극도 함께였지! 그래서다.
내가 <눈 내리는 사막>을 파괴할 생각을 하다니 소름이 다 끼쳤다. 내가 이 카이런 공작을 좋아한 이유는 그가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는 모습에 반한 것이었는데 무슨…….
나는 앞으로 핑계를 대서라도 목욕 시중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정신을 놓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도록 말이다.
“음란 마귀, 죽어라!”
나는 공중에다 주먹을 흔들며 외쳐주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심장이 너무 무리했는지, 아니면 카이런 공작의 피로가 내게도 옮았는지, 나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카이런 공작은 다음 날 아침 말끔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리고 나도 완벽한 아침 식사를 내어갔다.
내가 감독한 식사가 완벽한 걸 어떻게 알았냐 하면,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하르펠 성에 함께 사는 기사들은 언제든지 나를 놀려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상당히 특별한 일이었다.
동부 행정관 할리사가 카이런 공작에게 말했다.
“어제 먼 길을 다녀오셨는데 오늘은 하루 쉬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작님.”
내 생각도 그랬다. 그도 어제 피곤하다고 했으니 하루 정도는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끄덕거리며 행정관을 바라보았지만, 카이런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마을 공사 현장을 둘러보겠소.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적당한 일정일 것 같은데.”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행정관은 짧게 머리를 숙이고 식사를 계속했다.
저 지칠 줄 모르는, 책임감 강한 차가운 북부 남자를 어쩌면 좋다지. 자신을 배려하는 행정관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일정을 적당히 조율하는 센스까지 말이다.
“아리엘사, 괜찮니? 입에 벌레 들어가겠다.”
지나가던 하인의 말에, 나는 얼른 모르는 척 식사를 계속했다.
마을을 새로 확장하는 공사 현장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체이어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은근슬쩍 일행의 뒤로 따라붙었다.
할리사 행정관과 촌장은 카이런 공작에게 이것저것 설명했고, 그는 가끔씩 질문하며 주의 깊게 들었다.
행정관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명령하신 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돈이 적지 않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체이어스가 까칠하게 끼어들었다.
“공작님께서 예산을 더 내어주셨잖습니까.”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카이런 공작이 바빠 보인 것이 설마 그 때문이었나 싶었다. 갑자기 늘어난 재난복구 예산을 검토하느라고 말이다.
원작을 읽을 때는 공작은 칼싸움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현실의 공작은 멀티플레이어여야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 해 먹이는 수밖에 없겠어.’
나는 마음속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행정관이 곤란한 목소리로 답했다.
“봄철이어서 목재값이 많이 오른 것도 있지만, 산사태 때 이곳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함께 유실되는 바람에 상인들이 오는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돌아오다 보니…….”
“체이어스.”
카이런 공작이 음침한 목소리로 체이어스를 부르기에 나는 잠시 긴장했다.
“네, 공작님.”
“방벽 마물은 조용한가?”
“크흠…….”
체이어스는 침음을 냈다.
나는 헉 소리를 냈지만 작아서 들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행정관은 입을 쩍 벌린 채였다.
나는 상황을 재빠르게 짐작할 수 있었다.
카이런 공작의 말뜻은, 마을 복구에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드니 마물을 잡아다가 마석을 팔아서 돈을 보충해야겠군, 하는 것이었다.
체이어스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잠잠합니다만…….”
“그거 곤란하군.”
헉.
나는 카이런 공작에게 약간의 똘기가 있다는 걸 그때 확인하고 말았다. 저러니 저 비주얼에도 성격 나쁘다는 소리가 안 사라지는 것이다.
속으로 아이고, 소리를 하면서도 어쩐지 내 입가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경악한 가신들을 내버려 두고 아직 벽만 올라간 공사 중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엘사의 기억 속에는 마물을 직접 본 장면이 없어서, 체이어스도 진저리를 치는 마물이 실제로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안을 둘러본 카이런 공작은 벽을 짚으며 밖으로 나오다가 손을 흠칫 떼었다. 조금 인상을 쓰는 걸 보니 가시같은 것에 손가락이 찔린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공작님?”
행정관이 먼저 묻자 그는 가볍게 끄덕였다.
카이런 공작은 공사터 한쪽에 집채만큼 높이 쌓인 목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굴이 점점 굳었다.
“행정관, 이게 이번에 구입한 목재요?”
카이런 공작의 날카로운 질문에, 행정관은 조금 긴장하여 목을 고르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공작님. 사용하고 남은 양입니다.”
“값이 많이 올랐다고?”
“예…….”
행정관은 대답을 흐렸다. 내가 듣기에도 카이런 공작의 목소리는 확연히 사나워져 있었다.
그러한 공작의 기척을 먼저 느낀 체이어스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검 자루에 손을 가볍게 얹고 있었다.
행정관이 미심쩍게 그를 불렀다.
“공작……님?”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대꾸 없이 목재 더미 옆으로 돌아가 옆면과 뒷면을 가까이서 살폈다. 체이어스는 그를 따라갔다가 험악한 얼굴로 돌아왔다.
“앞면의 목재들은 새것이 분명하지만 속에 쌓인 것들에는 이끼가 앉았습니다. 최소한 이 자리에 한 해 이상 적재되어 있었다는 뜻이지요. 할리사 행정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끼가 앉을 정도라면 수년 전에 벌목했다가 남아서 방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걸 값이 올랐다며 공작의 예산으로 비싸게 값을 치렀다고 속였다면 횡령이었다.
게다가 공작이 살펴보고 지나갈 방향으로 새 목재를 덮어둔 건 의도가 분명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공작님! 그게 아니라……!”
“해명할 말이 있습니까? 할리사 행정관.”
무리로 돌아온 카이런 공작의 눈빛과 말투는 얼어붙은 바위보다 더 싸늘했다.
행정관은 버벅거리며 ‘공작님’을 반복해서 부르다가 기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혔다.
체이어스는 살기가 풀풀 날리는 눈으로 이번에는 촌장을 바라보았다.
“촌장은 이 일을 몰랐을까요?”
“그것이, 그것이……!”
목재 더미를 저렇게 쌓으려면 마을 인력을 동원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촌장도 공범이 틀림없었다.
기사들이 행정관과 촌장을 결박해서 끌고 가자 체이어스가 뒤를 따르며 말했다.
“다 실토해야 할 겁니다. 행정관. 유감이군요.”
재해 때 횡령이라니, 아까 식사하면서 공작에게 휴식을 권한 것도 구린 데가 있어서 한 소리였던 것이다.
나는 분노한 채로 멀어지는 체이어스 무리를 바라보았다.
카이런 공작 곁에 선 타이라 경은 잔뜩 눈을 찌푸린 채로 나와 같은 방향을 보다가, 돌아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라, 네가 여기 있었어? 하는 표정을 했다.
내가 얼른 그들의 시야에서 비켜섰을 때 카이런 공작이 차갑게 말했다.
“돌아간다.”
일행은 여관으로 향했고, 나는 반쯤 달리는 걸음으로 더 빨리 돌아왔다.
차를 끓여야 했다. 진정 효과가 있는 겨울딸기 차를!
❄❅❄
원작은 체이어스의 비인간적인 냉철함에 대해 종종 묘사했지만, 나는 그것을 캐릭터의 설정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이 여관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체이어스가 나타났을 때, 나는 앞으로는 이 남자에게 절대 반항하지 말자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