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시간이 생긴 나는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마을 끝 산 아래 지역이 토사에 파묻힌 엄청난 광경을 보고 기함해야 했다. 그 아래 파묻힌 집들은 다시 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숲을 밀어버리고 새로 확장하기 시작한 마을 구역에도 가보았다.
베어낸 나무들은 모두 새로 짓고 있는 집의 목재로 쓰기 위해 다듬어지고 있었고, 외부에서 사들인 목재들이 야적장에 쌓여 있었다.
상인의 인부들이 목재를 마차에서 내려 쌓고 있었는데, 어제 행정관이 상인에게 주문해두었다고 한 목재인 모양이었다.
나는 벌목지 주변을 걷다가 나뭇가지 사이에 달린 시커먼 풍선 같은 덩어리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벌집이었다.
“앗!”
나는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가 그것이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지나가던 인부가 고함을 쳤다.
“벌은 다 죽였으니 걱정 마시오!”
“고마워요!”
나는 그에게 소리친 다음 벌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빈 벌집이어서, 나는 용기 내어 막대를 주워 그것을 찔러보았다.
거무튀튀한 벌집에 내 머리카락과 비슷한 꿀색 구멍이 뻥 뚫리고, 거기서 반짝일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꿀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아까워라!”
이런 걸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얼른 인부들에게 가서 빈 병을 하나 얻어와서 안쪽의 깨끗한 곳에서 꿀을 퍼 담았다. 카이런 공작의 차에 타는 용도로 딱 좋을 듯했다.
꿀 한 병을 다 채운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의사 선생에게 간식도 갖다주었다.
의사 선생은 막사 안에서 환자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는데, 환자 수가 적지 않음에도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
다음 날 오후, 나는 여관 앞에서 카이런 공작의 귀환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보니 그의 아우라는 더 찬란해 보였으며, 몹시 늠름해 보였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아무 일도 없었나 싶어 안도했다가,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컴컴한 숲에서 혼자서 늑대를 때려잡은 다음에도 권태로워 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흘끔 보고 말에서 내려 가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반갑던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사람 얼굴을 마주 보면서 잘 있었냐? 나도 잘 다녀왔다, 인사도 하고 그래주면 얼마나 좋냐고.
그렇게 기다렸는데.
그때 카이런 공작이 내게 시선을 맞췄다. 나는 엉겁결에 큰 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공작님, 잘 다녀오셨어요?”
그러자 그의 옆에서 말에서 내리던 타이라 경이 껄껄 웃었다.
“너는 공작님만 보이는 게냐, 아리엘사.”
“경들도 잘, 다녀오셨습니까?”
나는 사실 ‘경들도 다리 안 부러지고 잘 다녀오셨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리엘사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말할 리가 없을 것 같아서 목에 힘을 꾹 주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틀린 생각이었다.
타이라 경과 다른 기사들은 일제히 껄껄 웃더니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사다리에서 떨어지면 목소리가 커지나?”
“게오르그 경의 목청을 안 닮았기에 친딸이 아닌가 싶었더니, 친딸이 맞네!”
“아니야, 편안한 방석 위에서 푹 쉬어서 기운이 나서 그런 거겠지.”
내가 그들을 노려보는 사이, 카이런 공작은 여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기사들에게 눈을 한번 흘기고 카이런 공작의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나는 그의 방에서 그가 아머를 벗는 걸 도왔다.
금방 기사들과 가벼운 대거리를 한 터라, 카이런 공작과 둘이 말없이 있으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싫은 건 아니고, 멋쩍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동부는 어땠나요? 물론 공작님께서 다스리시는데 평화로웠겠지만요.”
“그래.”
아아, 우리 말 짧은 남주.
조금 미워하려고 했더니, 칼로 다듬어놓은 듯한 그의 얼굴 옆선이 내 결심을 무너트렸다.
그렇다. 잘생기면 죄가 없다.
그가 옷을 다 갈아입자 나는 한동안 못했던 말을 꺼냈다.
“차를 들일까요?”
“그러지.”
나는 헤벌쭉 주방으로 뛰어가 옌델 차에 내가 딴 꿀을 조금 넣어서 올라갔다.
생기를 돋워준다는 옌델 허브는 독특한 향에 조금 쌉싸름한 뒷맛이 있었다. 꿀의 단맛은 그 뒷맛을 훌륭하게 잡아줄 수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카이런 공작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며 쉬고 있었다. 꼬고 있는 긴 다리마저 어찌나 길쭉하니 멋 나던지.
“공작님, 옌델 차입니다.”
그는 찻잔을 받아 향을 맡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향이 다른데?”
“꿀을 조금 넣어보았어요. 새 마을터 근처에서 벌집을 찾아냈거든요. 가장 깨끗한 꿀을 담아왔어요.”
나는 내가 공작이 없는 동안 놀며 시간을 보낸 게 아니라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리엘사라면 조잘거리며 수다를 떨지는 않았을 것이라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마을을 둘러본 모양이지?”
나는 그의 물음에 반갑게 끄덕였다.
“네.”
“숲을 깎아내기 전에 거기 사는 짐승과 뱀, 곤충 따위를 미리 쫓아낸다. 새집이라면 다른 자리로 옮겨주겠지만, 벌집이라면 연기를 피워서 벌을 죽이는 수밖에 없어.”
어머, 우리 남주는 아는 것도 많다. 실은 이 경우에는 내가 모르는 게 많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차를 음미하는 듯하면서도 내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들어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헤벌쭉 말했다.
“다음에도 차를 이렇게 내볼까요?”
“그래.”
카이런 공작은 창밖을 보며 짧게 끄덕였다. 나는 그가 조금 피곤해 보여서 더 주접을 떨지 않기로 했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목욕물은 그가 차를 다 마실 때쯤 맞춤하게 준비되었다.
“공작님, 준비되었습니다.”
카이런 공작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나는 방에서 나오기 위해 돌아섰다.
“아리엘사.”
“네. 공작님.”
“어디 가지?”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이런저런 이유로 타인을 못 견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엘사가 의식하는 한에서는 그것은 낯가림이었다.
그는 남에게 자기 몸을 잘 맡기지 않았다. 그가 몸을 맡기는 상대는 의사 아니면 아리엘사 정도였다.
그는 목욕을 대게 혼자 했지만, 몹시 피곤하거나 기분이 느긋해지고 싶을 때 그는 아리엘사를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 이 세계에서 시녀가 주인의 온갖 몸시중을 드는 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수건으로 허리 아래를 꼭꼭 잘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아, 팔 아파.’, ‘빨리 가서 자고 싶다.’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력도 정상인데 말이다.
물론 그녀는 어릴 적부터 그를 지켜보며 함께 자라다시피 했고, 일로서 반복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장기간의 가혹한 훈련을 거치지 않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나는 불가능하다고!
실은 나는 그를 만나고서야 내가 그를 얼마나 걱정하며 기다렸는지를 깨달았다. 갑자기 이러면 평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원래 없는 것보다 더 없었다.
내가 잠깐 딴 세상에 간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서 있자, 카이런 공작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왜,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공작님!”
하는 수 없었다.
나는 내 안구를 불사를 각오를 하고 카이런 공작을 따라 파티션 너머로 갔다.
눈치 없는 내 심장이 끝을 모르고 뛰었다.
내가 뒤돌아 서 있는 동안 그는 옷을 훌렁훌렁, 몇 번의 동작으로 가볍게 벗어 던진 다음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욕조에 발을 넣는 첨벙 소리에 내 심장이 다 철렁거렸다.
“도, 돌아봐도 될까요?”
“등부터 밀어. 오늘은 좀 쉬고 싶군. 그 정도 여행으로 이렇게 피곤할 리가 없는데.”
“네, 공작님.”
나는 돌아섰다가 헉하고 숨을 참았다.
그는 허리에 두꺼운 수건을 두르고 있어서, 노출된 몸의 면적은 보통 수영장에서 보는 남자 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쫙쫙 갈라진 가슴과 복근에서 겨우 눈을 피했더니 부푼 듯 단단한 허벅지가 물속의 굴절 현상을 조롱하고 있었다.
뜨끈한 물속에 들어간 것이 나인 것처럼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카이런 하르펠 공작님, 나를 용서하세요……!’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의 등 뒤로 갔다. 그리고 한 팔을 쭉 뻗어 스펀지를 붙잡고 물에 푹 담근 다음, 그의 등을 살살 문질렀다.
그의 단단하고 우둘투둘한 등의 잔근육들이 스펀지 아래에서 펄펄 살아서 튀어나오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기는 좋은데……. 좋기는 좋은데! 이거야말로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취미와 일을 가르는 기준이 즐거움이라고 하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고 나서 돈을 받을 때만 즐거우면 일이고, 할 때만 즐거우면 취미라고.
그러니 지금 이 일은 취미가 분명했다. 야릇하고 두근거리는 만큼이나, 동시에 양심에 찔렸다.
어떡하냐고. 이걸…….
그러는 사이 내가 쥔 스펀지는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갔다.
“아리엘사.”
‘잘못했어요!’
그가 나를 신경질적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스펀지를 뚝 떨어트렸다.
“네? 네!”
“지금 딴정신 팔고 있나?”
“네. 아니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스펀지를 다시 집은 다음 그의 등을 곁눈질하며 벅벅 문질렀다.
공작이 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엘사.”
“죄송합니다. 공작님!”
나는 반쯤 울듯 소리쳤다. 카이런 공작은 내 영문 모를 소리에 내가 있는 뒤쪽을 흘끔 흘겨보았다.
“나가서 기다려. 머리 닦아주고 가.”
“네!”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자포자기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이 어떤 벌을 내리든 달게 받으리라며 어금니를 꾹 물고 서 있던 나는, 뜻밖의 말에 고함치듯 대답했다. 그리고 파티션 뒤로 나와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