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5/128)

13화

우리는 모두 간단히만 요기하고 일찍 떠날 준비를 했고, 나도 얼른 빵을 꾹꾹 씹어 삼키고 짐을 꾸리는 것을 도왔다.

흘끔 바라본 카이런 공작에게선 동요를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 조금 지루해 보였다.

나는 그제야 그가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오르그가 ‘공작님은 누가 돌봐줄 필요가 없는 분이다.’라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나는 다섯 살짜리 카이런 공자를 돌보는 아리엘사의 기분에 빠져 있었다.

주인공인 그의 운명을 내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비밀은 그렇게 달콤한 맛이었고, 사람을 우쭐하게 했다.

하지만 마차 여행을 제대로 견디지도 못하고, 늑대가 어슬렁대는지도 모르고 혼자 밤에 숲으로 들어가는 나야말로 다섯 살짜리나 다름없었다.

“아……. 나 좀 성장한 것 같아.”

내가 하늘을 보며 울적하게 중얼거릴 때, 지나가던 체이어스가 나를 째려보았다.

“쪼끄만 게 크긴 뭘 커. 정신 차렸어? 곧 출발할 거야.”

우씨…….

나는 입을 툭 내밀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 방석 모두 챙겼습니다.”

내 조금 반항적인 대답에, 그는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말에 올랐다. 마차에 오르던 하인들이 킬킬거리며 지나갔다.

말에 오른 카이런 공작이 출발하자 체이어스가 외쳤다.

“출발!”

나는 후미를 따르는 마차에 얼른 올라탔다.

그곳에서 나는 졸지 않고 북부의 숲이 이른 아침에서 낮까지 어떤 빛깔로 바뀌어 가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다.

어제 일로 인해 배웠기 때문에, 나는 쉬는 시간에도 기사들과 하인들의 근처에만 머물며 신중하게 행동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며 그들이 나를 대하는 허물없는 태도가 게오르그와의 친분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아리엘사가 나고 자라는 걸 보아온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아리엘사의 삶에 조금 더 스며들고 있었다.

❄❅❄

동부의 모베일 마을은 내 생각보다 큰 곳이었다. 체이어스는 마을에 들어서자 나와 내가 탄 마차를 마을의 여관으로 보냈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과 기사들은 산사태가 난 장소를 둘러보러 갔다.

나는 카이런 공작을 위해 준비된 여관방에 가서 그의 짐을 풀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내려가 저녁 메뉴를 지시하고, 조리하는 과정을 직접 살펴보았다.

여관은 카이런 공작을 위해 통째로 비워졌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 모두가 카이런 공작 일행이 묵어갈 준비에만 몰두했다.

여관의 직원과 하인들은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내가 공작을 위해 지시하는 말에 토를 다는 자는 없었다.

길 위에서 이동할 때가 아니면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해가 진 후 돌아왔다. 그와 가신들, 동부 행정관 할리사와 모베일 촌장, 그리고 장로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이제야말로 내 쓸모를 증명할 시간이었다. 나는 종일 준비한 음식을 착착 내오도록 했고 누구도 그것에 흠잡는 이는 없었다.

공작 일행은 식사하면서 마을 복구작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벽에 붙은 테이블에서 따로 식사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기억을 되살리려 많이 집중해보았지만, 아리엘사는 하르펠 성 밖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호기심 많은 성격이 아니었고, 평생 성안에 머무르는 것에도 별 불만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몹시 흥미로웠다.

카이런 공작은 행정관에게 명령해서 목재와 건축자재들을 사들이게 했고, 부족한 목재는 숲에서 벌목할 계획을 세웠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나무가 땅으로부터 수액을 빨아올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벌목한 목재를 건조하는 데 걸리는 기간이 더 늘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늦어지기 전에 마을 남자들을 벌목 인부로 동원하기로 했다.

의사 선생은 사라져서 여관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는 부상자들을 한데 모아둔 천막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임시 막사와 무료 식량이 배급되고 있었고, 바로 근처에 부상자 치료용 천막이 있었다.

하르펠 영지의 재해대책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잘생겼고 칼싸움도 잘하는데 유능하기까지 하면 어쩌라는 건지. 나는 뿌듯한 기분으로 안 보는 척하며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재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카이런 공작의 모습은 몹시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밤늦게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다음, 나는 카이런 공작의 방으로 성에서 가져온 겨울딸기 차를 가져갔다.

나는 차를 탁자에 내려놓고 재빨리 그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두었다. 그는 내가 있건 말건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내가 가만히 서 있자 물었다.

“할 말 있나, 아리엘사?”

실은 나는 그의 등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잔근육들을 보느라 잠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가 나를 등져서 내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헛기침을 한번 했다. 입을 열기도 전에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 숲에서, 늑대에게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여행에 방해가 되는 걸 치운 것뿐이다.”

실은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감사하도록 해.’ 같은 대답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와는 상관없었다는 것 같은 대답을 듣자 달아올랐던 마음이 파사삭 식었다.

입술이 저절로 툭 나오고, 어쩐지 그의 까칠함에 대한 방어력이 점점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이제는 그를 휩싼 은은한 빛을 의식하지 못하는 날이 잦았다. 실은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면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가 그동안 조금이라도 덜 아름다워졌다거나, 조금이라도 식상해졌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더 할 말 있나?”

나는 아주, 아주 살짝 삐진 상태로 방에서 나오기 전에 그를 향해 인사했다.

“오늘 노고가 크셨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공작님.”

“아리엘사?”

“……네.”

“오늘 저녁 식사는 훌륭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내 방 침대의 낯선 이불에 엎드려 코를 묻었다.

“으으으으!”

기분이 좋다는 표시가 그렇게 원시적이고 기괴한 소리로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나는 침대에서 다리를 한참 바동거렸다.

내일은 비명을 질러야 할 정도로 부끄럽고 흥분되는 일이 생길 줄도 모르고, 나는 행복한 피로에 곯아떨어졌다.

❄❅❄

나는 다음 날 새벽에 기분 좋게 깨어났다. 어느덧 북부인들의 생활 리듬에 상당히 익숙해진 덕분에 이제는 누가 깨워주지 않아도 알아서 깰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몸단장을 하고, 카이런 공작과 기사들의 아침 식사 겸 회의를 준비했다.

카이런 공작은 여기까지 온 김에 동부를 시찰하고 오기를 원했다.

모베일 마을 복구는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고, 촌장이 사람들을 데리고 벌목 작업에 나선 동안 공작에게도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런 공작은 잠시도 쉬지 않고 시간을 쪼개어 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 같았다.

나는 당연히 그 계획이 싫었다. 오는 길은 늑대 때문에 망쳤고, 와서는 너무 바빴다. 조금 시간 여유가 있다면 쉬면서 주변도 둘러보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나를 대동하고 말이다.

그러나 시찰 일정은 순식간에 결정되었고, 나는 카이런 공작과 기사들이 노정에 먹을 말린 고기와 과일 따위의 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여관 앞에서 카이런 공작이 출발하기 전에, 나는 호위 기사 타이라 경에게 살짝 말했다.

“가벼운 시찰이면 저도 따라가도 되지 않을까요?”

풍채 좋은 노년의 타이라 경은 말 위에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너, 그러다가 네 아버지한테 딱밤 말고 볼기 맞는다.”

나는 발끈해서 대답했다.

“아니, 제가 나이가 몇인데-”

“-게오르그 경이 이미 기사들에게 일러두었어. 너 허튼짓 못 하게 하라고. 너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요즘 공을 찬다며? 쯔쯔.”

“헉…….”

“네 아빠 너무 걱정시키지 마라. 너 그러다 시집도 못 간다!”

그사이 출발한 카이런 공작을 따라 타이라 경은 껄껄 웃으며 멀어졌다. 그리고 나는 인사도 없이 가버린 카이런 공작이 섭섭하고 미웠다.

따지고 보면 시녀가 잡담하느라 주인에게 송별 인사를 빼먹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내 주관적인 상황은 그랬다.

“세상에!”

나는 다 큰 아가씨를 여덟 살짜리 취급하는 노기사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뒤늦게 투덜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내 걱정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게오르그의 얼굴이 떠올라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겁도 났다.

아무리 딸 바보라도 그 정도면 나는 정말 시집을 못 갈 수도 있었다.

나를 아이 취급하며 마흔 살 될 때까지 남자가 얼씬도 못하게 하다가, 아이도 못 가질 정도로 노처녀가 되면 ‘어허, 세월이 이렇게 지났나? 별수 없으니 그냥 아빠랑 살까?’ 하고 모르는 척할 사람 같았다.

물론 그가 계속 살아 있다면…….

나는 게오르그가 좋았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도 좋았다. 퉁명스럽고 거칠어 보이는데도, 어쩐지 마음에 경계감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체이어스는 여전히 불편했지만, 그거야 그가 카이런 공작을 철저하게 보호하려 들기 때문인 거니 진짜 불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들과 그리고 게오르그와 끔찍한 일들을 겪지 않고 오래 함께 살고 싶었다.

어쩌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의 나는 누구를 가까이에 두고 몹시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며 다양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내 삶은 단조롭고 물 빠진 파스텔 톤이었고,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반복되는 삶에 끌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세상으로 떠밀려 들어와서 처음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나쁜 사람일 거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돌아오면 맛있는 음식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체이어스는 하는 걸 봐서 좀 나눠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