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나는 말 그대로 찌그러져서 구석을 찾아 앉았다.
나 빼고는 모두 숲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 보여서, 방해나 되지 않는 편이 나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이런 공작의 명령대로 불가에 얌전히 앉아서 주는 식사를 받아먹고 나자 금방 사방이 어두워졌다.
숲에 금세 어둠이 깔리고, 모닥불이 점점 환하게 밝아지는 듯 보이는 광경은 조금은 신비로웠다.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남자만큼이나 말이다.
하인 하나가 내가 탔던 짐마차에서 류트를 꺼내왔다. 그가 말없이 시작한 연주에 모두가 조용히 집중했다.
다정한 선율이 숲으로 퍼지자 숲의 공기가 따뜻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잠시 콧노래만 흥얼거리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나는 말에 선율을 붙인 것 같았는데도 그럴듯한 노래로 들렸다.
“우리는 위대한 그분과 먼 길을 떠났다네. 기사들은 오늘을 위해 검을 벼르고 하인들은 마구를 반짝반짝 닦아두었지.”
하인이 ‘위대한 그분’이라고 노래하며 카이런 공작을 향해 머리를 숙이자, 그는 답례하듯 가볍게 묵례해주었다.
언젠가 카이런 공작이 방벽으로 틈을 부수고 넘어온 마물 무리를 물리쳤을 때, 그는 젊은 나이에 ‘위대한’이라는 단어를 이름에 붙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마물을 두렵게 하는 그를 함께 두려워하며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분’이라고 하면 족했기 때문이다.
아아……. 멋있어.
사람들은 낮은 소리로 함께 웃었다. 불가의 분위기는 편안하고 즐거워졌다.
그리고 하인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귀여운 시녀 아가씨는 방석을 잔뜩 준비했다네. 침을 줄줄 흘리며 숙면할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녀는 공작님을 잘 모시기 위해서 잠을 푹 자두어야 했기 때문이지.”
일행 모두가, 심지어는 체이어스까지 깔깔대며 웃었다. 거기서 웃지 않는 건 나뿐이었다.
갑자기 폭탄을 맞은 나는, 얼굴이 시뻘겋게 된 채로 치맛자락을 꽉 붙잡았다. 부끄러움과 화가 섞이니까 말이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다가 카이런 공작마저 웃고 있는 걸 보았을 때, 나는 벌떡 일어나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뒤에서 기사들이 나를 놀리며 고함쳤다.
-시녀 아가씨, 너무 멀리 가지 마, 늑대가 나오니까!
-늑대 굴에는 방석이 없어, 아리엘사!
나는 일행의 웃음을 뒤로하고 걸었다. 분해서 나오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며 멀리 들리는 물소리를 따라갔다.
어둠 속에서 달빛에 반짝이는 냇물과 마주치기 전에, 나는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아…….”
죽기 전에 꼭 한번 보았으면 했는데…….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기에는 애매하지만, 의미가 없다고 잊어버릴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오로라였다. 언젠가 꼭 한번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소원을 나는 여기서 이루고 말았다.
차갑고 푸른 묵색 하늘에는 별들이 새하얀 점처럼 들이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녹색과 청색이 묘하게 어우러진 거대한 빛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부드러운 바람을 맞은 듯 내 머리 위에서 느리게 일렁이다가 어느 틈엔가 빛깔을 바꾸어갔다.
숨 막히는 광경이란 실제로 존재했다.
카이런 공작이 이 세계의 주인공으로서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면, 이 세계 또한 스스로 존재하며 아우라를 발하는 걸까.
나는 하늘에 드리운 아름다운 빛의 장막에 홀려 턱을 쳐든 채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밤이 되자 찾아온 싸늘한 추위도, 내가 받은 놀림도 다 잊고서 말이다.
“방석을 준비시킨 건 나야.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
뒤에서 불쑥 나타난 것은 카이런 공작이었다.
“공작님!”
나는 아까 일은 다 잊은 후였다.
“아닙니다, 공작님. 그렇게 쿨쿨 자라고 방석을 준비해주신 건 아니잖아요. 전 놀림 당해도 싸요.”
카이런 공작은 내 곁으로 다가와 내가 보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이 없었고, 오로라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보다가 조금 심술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걸 보고 싶으면 그냥 거울만 보면 되는 사람이.
그리고 동시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마차여행을 힘들어할 나를 위해 그런 것까지 신경 써주다니…….
“얼른 돌아가. 가서 망토 걸쳐.”
게다가 그는 내가 추울까 봐 걱정해주고 있었다.
나는 다시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심장이 마구 콩닥거렸다.
정말 잘 따라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또 바보력을 발휘하기 전에 얼른 불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심장은 다른 의미로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내가 불가로 돌아가려 돌아섰을 때, 수풀 속에서 시퍼런 점 같은 불빛들이 나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늑대의 안광이었다.
어느 틈에 카이런 공작이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거의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죄, 죄송해요, 공작님! 제가 멀리 나오는 바람에……!”
늑대들은 머리를 낮춘 채 낮게 으르렁대며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드러낸 흰 이가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게 잘 보였다.
그러나 카이런 공작은 거리를 좁혀오는 늑대들을 마치 길가의 풀을 보듯 무심히 보고 있었다.
‘이런 건 원작에 없었다고!’
“아리엘사.”
나는 그의 부름에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으로 ‘네!’하고 대답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너처럼 오로라를 좋아하는 북부인은 처음 본다.”
“크으…….”
지금 상황에 그게 중요한가요?
나는 입술을 꽉 씹으며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늑대도 무서웠지만, 그가 나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지키고 돌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내 절망감이 무색하게도, 우리 좌우를 둘러쌌던 늑대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팔로 내 몸을 감싸 안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가 검을 휘두른 것을 알았지만, 내 몸을 워낙 강하게 품에 넣어 안고 있어서 얼마간의 흔들림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 고요함이 무서웠지만, 나는 놀랍게도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의 팔이 주는 압박감, 조금 더운 듯한 체온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그가 팔을 풀어주었을 때 고개를 들었다.
늑대 세 마리가 우리 앞에 반동강 나 있었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피가 땅으로 검게 번져가는 꼴이 끔찍했다.
나머지 늑대는 재빨리 숲 깊은 방향으로 사라졌다.
카이런 공작은 나를 놓아주고는 검을 한번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물가로 걸어갔다.
캠프 쪽에서 체이어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로 더듬거렸다.
“고, 공작님?”
“내가 언제 일 보러 가며 네 시중을 받던가?”
“헉, 아, 예…….”
나는 한기에 몸을 웅크리며 일행의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카이런 공작의 체온이 사라지자 숲의 추위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게 다가온 체이어스는 몹시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긴장감은 없고 짜증만 담은 얼굴이었다.
“체이어스 경, 어서 공작님께 가보세요!”
“비명은 왜?”
“늑대가, 늑대가……!”
“공작님은?”
“일 보러…….”
사실대로 대답했는데, 어쩐지 대답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밤 숲에서 늑대를 만난 사람이 태연하게 일 보러 갈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체이어스는 ‘흠.’하고는 돌아섰다.
그는 내가 따라오지 않자 돌아보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제 늑대는 안 와.”
“하지만, 공작님이 지금 혼자 계신데……!”
“아리엘사. 늑대가 우리를 공격하는 건 먹이로 삼으려는 거다. 우리가 산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따라왔을 거야.”
“네?”
“공작님께서 우리가 제 먹이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셨으니, 이제 가는 동안 늑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체이어스는 그대로 돌아갔다.
“빨리 돌아가. 감기 걸려서 공작님 신경 쓰시게 하지 말고.”
내가 불가로 돌아가 불을 쬐자, 기사들이 나를 향해 킬킬대며 늑대가 우는 소리를 흉내 냈다. 그들은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하르펠 성의 주인이 혼자 늑대 떼를 상대하는데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니! 나는 순간 화가 났다.
그러나 아까 류트를 연주한 하인이 그를 ‘위대한 그분’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것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나는 어떤 충격을 받았다.
그는 밤 숲에서 북부의 늑대 떼를 혼자 상대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자였다. 자기 사람들을 혼자서 충분히 보호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래서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것이다.
감동은 내 가슴에 오로라처럼 일렁이며 밀려왔다.
어우, 우리 남주 너무 멋지잖아…….
나는 앞으로 이들이 나를 놀리는 걸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연속해서 겪은 강렬한 감정들에 화를 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까 류트를 연주한 하인이 내 어깨에 내 망토를 덮어주고 갔다. 내가 들으라는 듯 가락을 붙여 흥얼거리면서.
“아아아, 방석이 없으니 이거라도 써야 하려나아.”
나는 헛웃음을 짓고는 망토를 여미며 배우들이 인사하듯 손을 저으며 머리를 숙였다. 일행은 그런 나를 향해 일제히 킬킬댔다.
자리에 웅크리니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눈을 껌뻑거리며 버티다가, 카이런 공작이 돌아오는 발소리를 듣고서야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나는 새들이 새벽 찬 공기를 깨트리듯 지저귀며 멀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머리를 정리하고 숲으로 가서, 딱딱하게 굳은 반동강 난 늑대시체 곁을 지나 냇가에서 세수했다.
이제 정신이 바짝 드는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 무엇이 내 현실인지.
자리로 돌아오니 카이런 공작은 어제와 한 점 다름없는 얼굴로 빵을 뜯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