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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2/128)

11화

카이런 공작은 다시 바빠졌다. 그래서 나도 그의 집무실을 종일 떠나지 못하고 그가 시키는 서류를 찾아오거나 차를 다시 타와야 했다.

내가 나가 있는 건 체이어스나 다른 가신들이 찾아와 회의할 때였다.

중요한 정보가 오가는 그런 때야말로 집무실에 있고 싶었지만 내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체이어스가 나를 의심하는데 공작의 정무에 관심을 보였다가는 술 몇 병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카이런 공작은 저녁에 돌아가려는 내게 말했다.

“동부를 시찰하러 간다. 짐을 쌀 수 있겠나?”

“당연합니다!”

나는 얼른 대답해놓고서 민망하게 물었다.

“게오르그 경과 야외 훈련에 가시는 것이 아니고요?”

“날이 풀리면서 동부 모베일 인근의 산이 무너졌다. 마을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어.”

나는 더 묻지 않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침실로 가서 커다란 가방을 꺼내놓았다.

원작에서 카이런 공작이 영지 시찰을 가서 무슨 일을 당한 내용은 없었다. 그가 영지 시찰도 다녀오고 사냥도 하며 봄을 바쁘게 보냈다는 스치는 듯한 설명이 다였다.

따라서 이번 시찰은 그를 안심하고 보낼 수 있었다.

바닥에 앉아서 서랍에서 꺼낸 옷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는데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내 남주의 서랍을 열어서 옷가지를 하나하나 뒤지는 기분이 묘했는데 그걸 또 가방에 챙겨 넣고 있자니……. 아이돌 숙소에 몰래 들어온 극성팬이 이런 기분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오래 입어 부드럽게 된 튜닉을 얼굴에 비비며 흐흐흐 웃어보았다.

“옷이 웃긴가?”

“컥…….”

불쑥 나타난 카이런 공작은 내 뒤에 멈추어 내 몸 너머로 자신의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인기척이라도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본인 방에 들어오면서 노크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변태짓을 한 건 내 쪽이었다. 흑…….

“아니, 아닙니다. 공작님.”

그는 내 머리 위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웃옷만 하루에 두 벌씩 갈아입으란 건가? 바지는 입고 간 걸로 몇 주를 견뎌야겠군.”

“바지는 아, 아직 안 꺼냈을 뿐이에요!”

나는 작게 항변하며 셔츠 몇 장을 다시 빼내 서랍으로 가져갔다. 셔츠는 넣고 바지는 꺼냈다.

사실 바지는 깜빡했다! 공작이 갈아입을 바지를 체이어스에게 빌리러 가는 상상은 끔찍했다. 미리 알아서 다행이었지만 하필 그를 통해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 얼굴은 달아올라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카이런 공작이 내가 짐가방도 제대로 못 싼다고 생각해버리면 앞으로 중요한 순간에 내 말을 듣지 않을 텐데, 정말 부끄러웠다.

“튼튼한 가죽 장화도 필요해. 눈이 녹은 진창이 많으니까.”

“네. 챙기겠습니다!”

나는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그는 한숨을 쉬었다.

“네 것 말이야.”

“아……. 네. ……네?”

그 시찰에 나도 따라간다고?

카이런 공작은 놀란 나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튜닉을 벗어 던지며 침대로 들어갔다.

그가 이불 속에서 조금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요즘은 너와 놀던 다섯 살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아. 물론 그땐 지금과 반대였지. 네가 나를 돌봐줬을 때가 더 나았어.”

❄❅❄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기분이 점점 설레기 시작했다.

이번 시찰에서 위험한 일이 없다면 이것은 그와 함께 가는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여행. 카이런 공작과 여행.

다시 심장이 콩닥거렸다. 가만히 보면 우리 남주는 아닌 척하면서 예쁜 짓을 한다. 자꾸 이러니까 짜증을 내도 그러려니 하게 된단 말이다.

어차피 잘해 줄 거면서……. 피식.

똑똑 노크 소리로 내 망상을 중단시킨 것은 게오르그였다. 그는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빠?”

“모베일에 공작님을 모시고 간다며?”

“네.”

그는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는 그때 야외 훈련에 애들 데려가야 한단 말이다. 같이 못 따라간다고.”

애들이라니, 그 우락부락한 북부 기사 무리더러 애들이라니.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나는 게오르그의 얼굴을 보다가, 그가 카이런 공작에게 나를 데려가지 말라고 부탁할 것을 직감했다.

“안 돼요!”

“뭐가?”

게오르그는 대번에 짜증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공작님 모시고 갈 거예요. 제가 없으면 공작님을 누가 돌봐요?”

“공작님은 누가 돌봐줄 필요가 없는 분이다.”

게오르그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가 중얼거렸다.

“하긴 너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만.”

나는 실은 게오르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카이런 공작은 십 대 때부터 마물 토벌전에 참여하여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위명을 얻은 사람이었다. 시녀를 대동해야 어디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 하필 이런 때 널 데리고 가려고 하시는지. 의사 선생이 따라간다고 해도 거기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네 사다리 병을 돌봐줄 여력은 없을 거야.”

‘사다리 병’이라니. 그 끔찍한 병명이 만들어진 건 순전히 의사 선생 탓이었다.

나는 게오르그가 나를 이번 시찰에 동행하는 것을 막을까 봐 겁이 났다.

“아빠, 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그는 전혀 안 미덥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일어나 그의 양팔을 문지르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빠, 전 괜찮다고요. 그리고 제가 조금 실수해도 공작님께서 봐주세요. 제 상태 때문에요.”

“그러냐……?”

게오르그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쳐들었다.

또 당할 순 없다!

나는 그가 또 딱밤을 놓기 전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괴롭혀 줄 차례였다.

“이놈…….”

게오르그의 얼굴은 단박에 험악해졌고, 나는 그를 향해 인상을 썼다.

“다 큰 딸한테 만날 딱밤을 놓는 법이 어디 있어요!”

“여기 있다, 왜!”

“제가 이러니까 공작님 따라서 성에서 나간다고요!”

“헉…….”

순간 충격에 마비된 것 같은 게오르그를 보며, 나는 내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을 깨달았다.

“아니, 아빠, 그냥 바람 쐬는 기분으로 다녀온다고요. 갔다가 얼른 와야죠. 아빠가 이렇게 걱정하시는데!”

내가 그의 굵은 팔뚝에 달라붙어서 뺨을 문지르자, 그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너 이놈…….”

내가 해쭉 웃자 그는 녹아내리듯 한숨을 쉬었다.

“앗!”

그리고 그 순간 머리에 딱밤이 날아왔다.

그는 방에서 나가며 말했다.

“공작님 잘 모시고, 너도 혹시 상태가 안 좋으면 의사 선생에게 꼭 말하고.”

나는 울상을 지은 채 아픈 머리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그럼요, 아빠. 훈련 꼭 무사히 다녀오셔야 해요?”

“당연하지! 이 아빠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으하하.”

나의 새 아빠 게오르그는 공작이 황제의 명령으로 전투에 참여하기 전까지 지나치게 건강하고 팔팔하게 지낼 것이다.

나는 그러니 당분간은 그를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카이런 공작과의 첫 번째 여행을 즐기자! 당분간은 그것이 내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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