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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1/128)

10화

그러나 체이어스는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인이 지붕에서 내려와 사다리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의심? 내가 뭘 의심해야 하지?”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순둥이 같은 아리엘사의 캐릭터를 완전히 깨지 않으면서 영리한 체이어스에게 받아칠 적당한 말을 찾아내려니 머릿속이 과열될 것 같았다.

“의심이야……, 굳이 하자면 보트에 구멍을 낸 게 저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체이어스 경.”

“호오…….”

그는 물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체이어스는 내가 먼저 그렇게 말한 것이 뜻밖인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하나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리엘사.”

“…….”

“그랬다가는 내가 널 가만히 안 둘 텐데. 너도 알잖니?”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밋밋하게 살기를 흘렸다.

컴컴한 온실에서 하얗게 굳은 나를 내버려 둔 채, 그는 먼저 가서 온실 문을 열었다. 우리가 안에 있는지 몰랐다고, 당황한 하인이 사과하는 소리가 들렸다.

체이어스는 문을 잡은 채로 나를 향해 손짓했다. 심지어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신사처럼 굴고 있었다.

“아리엘사, 어서 나와.”

쿵쿵거리는 심장을 억누른 채로, 나는 얼른 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체이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릴리스 허브 잎을 말려두었다.

체이어스는 내가 카이런 공작을 익사시키려고 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사고가 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의심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나 같아도 수상할 것 같았다!

하지만 카이런 공작의 말대로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게 나은지, 공작에게 했듯이 사후세계를 보아서 특수한 능력이 생긴 거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체이어스의 성격상 어느 쪽이든 쉽게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도 사다리에서 떨어트릴까?”

하지만 턱도 없는 소리였다. 머리가 좋아서 책사인 거지, 그도 뛰어난 기사였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울상을 하고 앉아 있는데 게오르그가 찾아왔다.

“아리엘사.”

“아빠.”

그는 별말 없이 내 머리에 무겁게 손을 얹었다.

“……아빠?”

“체이어스 놈이 뭐라든?”

“…….”

체이어스가 나를 은근히 위협한 걸 게오르그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가 보트 사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내게 알리러 왔었다. 제멋대로 너한테 재수 없게 굴었다간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걸 아니까.”

“아아…….”

“놈 성격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테고, 실은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 이해해.”

“아빠, 전 괜찮아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의자를 당겨와 앉았다. 눈으로는 내가 혹시 울기라도 한 것은 아닌지 열심히 살피면서.

“너, 정말로 보트가 침몰할 걸 알고 있었니?”

“아니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아리엘사.”

“당연히……. 아빠는 하르펠가의 가신이시니까요.”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나는 두려워졌다.

“그래. 내 목숨은 하르펠가 주인의 것이다. 게다가 맹세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공작님을 좋아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목숨을 바치는 건 공작님과 너에게뿐이다.”

“…….”

“그러니 미리 알았건 몰랐건 네가 그분을 구한 것은 고마운 일 아니겠냐. 내 일을 대신해주었으니.”

“아얏!”

게오르그는 내게 딱밤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걱정시키지 마라. 체이어스가 네게 심하게 하거든 바로 말하고. 내 그놈을 언젠가…….”

게오르그는 그대로 돌아갔다. 마지막 중얼거림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끝까지 들었다면 퍽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딱밤이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금방 잊었다.

게오르그는 황제의 음모를 이미 알고 있는 걸까?

내 진짜 아빠가 여기 있었어도 게오르그보다 든든하게 느껴질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체이어스가 나를 더 심하게 대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신경 쓰이는 일’은 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것은 카이런 공작이나 그의 측근들이 원작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인 지금도 이미 황제의 적의를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나는 새로 따온 허브가 적당히 건조되자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에 가져갔다. 차병을 보충해두고 싶었기도 하고, 혹시라도 그에게 감기 기운은 없는지 걱정도 되었다.

“공작님, 아리엘사입니다. 잠시 들겠습니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나는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방을 관리하는 것은 나였기 때문에 그 정도 행동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콘솔 테이블로 가서 말린 릴리스잎을 채워놓은 다음 다른 차가 싱싱한지 하나씩 열어서 확인하고 있었다.

“아리엘사.”

카이런 공작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에, 튜닉은 쇄골이 다 보이도록 흘러내려 있었다.

그는 무언가 몹시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지그시 보더니 다시 털썩 누웠다.

나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헛, 하고 한숨을 쉬었다.

퇴폐미 섞인 아우라라니, 아침부터 감사합니다!

“공작님, 죄송합니다. 계신 줄 몰랐습니다. 대답이 없으시기에…….”

나는 카이런 공작이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체이어스를 발견했다.

둘이서 밤새워 술을 마신 듯했다.

“술병도 채워둬.”

둘러보니 술병들은 바닥만 채운 채로 콘솔 테이블 위에 있거나, 빈 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네, 공작님. 그리고 식사는…….”

카이런 공작은 체이어스를 턱짓하며 말했다.

“저놈이 깨면 부르겠다.”

나는 말없이 물러나 나와서, 술독을 푸는 데 좋은 약차를 끓여왔다. 그 차의 냄새는 고약했지만, 카이런 공작은 말없이 마셨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좋은 일?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것 외에 말인가?”

“…….”

우리 남주는 이렇게 말을 밉게 해요.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나오려고 했다.

그때 카이런 공작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리엘사.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일에는 각자 정해진 범위가 있어.”

“무슨 말씀이신지…….”

“예를 들어 게오르그는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지. 하지만 체이어스는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일만 받아들여.”

나 때문이었다.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 사이에 나를 두고 의견 차이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술을 마신 것이다.

원작에서 두 사람은 싸우고 나면 술로 화해하곤 했으니까.

아직 잠든 체이어스를 흘끔 보니, 그가 내가 보트 사고를 예견한 경위를 추궁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광경이 저절로 떠올랐다. 하르펠의 적이 황제인 이상 모든 것을 확실히 주의해야 한다며.

나는 굳어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체이어스가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사실 상관없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가 궁금했고, 중요했다.

그는 헝클어진 자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 바람에 튜닉 자락이 반대쪽으로 툭 떨어지며 다시 쇄골 부근이 드러났다.

당신, 건강에 나쁘다고.

잡념을 물리치고, 나는 체이어스가 깨지 않도록 나직이 물었다.

“공작님은요……? 공작님께서는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그는 소파에 뒷머리를 얹은 다음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을 천천히 곱씹는 듯했다.

“내가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지, 아리엘사?”

“…….”

“나는 있는 그대로 볼 뿐이야.”

“네, 공작님.”

“나를 속이지 마라. 그땐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

“…….”

잠깐 목이 막혔다. 그러나 내가 ‘네, 공작님.’하고 대답하려 할 때 바닥의 체이어스가 눈을 떴다.

나는 헛기침을 해 목을 고른 다음 말했다.

“체이어스 경, 숙취에 좋은 약차를 드릴게요.”

나는 얼른 차를 따라 가져가며 카이런 공작에게 물었다.

“두 분의 아침 식사는 이리 들일까요?”

“됐어.”

체이어스는 짚단같이 부스스한 꼴로 일어나며 대답하더니, 나와 카이런 공작을 번갈아 쳐다본 다음 나가 버렸다.

주인 없이 놓인 찻잔에서는 흰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훑고 지나간 시선이 너무 차갑고 매서워서, 나는 잠시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때 카이런 공작이 말했다.

“그렇게 해.”

“……네?”

“아침 식사.”

“네. 공작님!”

나는 얼른 나와 주방 하녀에게 집무실로 아침 식사를 들이도록 이르고 돌아왔다.

내가 바닥에 널브러진 술병 따위를 치우는 동안 카이런 공작은 뒷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체이어스가 나를 보던 시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마음이 심란했다.

하지만 동시에, 바닥에 널브러진 이 술병의 부피만큼 카이런 공작이 나를 위해 애써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이어스의 의심은 내 입장에서는 인정머리 없었지만 합리적인 것이었다.

카이런 공작 또한 인정머리 없고 합리적인 사람이므로 체이어스의 주장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지만, 이번에만은 그것을 포기하도록 그를 설득하며 밤을 보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좀 고맙고, 살짝 감동적이었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체이어스는 널 미워하는 게 아니야.”

“…….”

나는 놀라 자리에 서고 말았다. 카이런 공작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꼭 내 속을 훤히 읽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내 속을 다 아는 사람을 만난 것도 처음이었고, 그러면서도 나를 휘두르거나 이용하려 하지 않고 보호해주는 사람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놈 성격이 걱정이 많아서 그래.”

“걱정은, 같이 할 수도 있잖아요.”

나는 작게 투덜거리며 들고 있던 술병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카이런 공작의 조금 놀란 듯한 시선이 내 등 뒤에 매달린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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