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28)

9화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머리를 닦던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주울 수가 없었다.

그에게 붙잡힌 손목 피부에서는 이제 간지러운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의 시리도록 맑은 눈은 마치 모든 비밀을 캐내겠다는 듯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의심에 찬 무감정한 시선이 내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 호흡은 자꾸만 커져서 이제는 입술을 조금 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약간의 동정심도 없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네가 차만 잘 끓여도 불만이 없어.”

“네…….”

“하지만 이대로라면 네가 내 삶을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아리엘사, 그런가?”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에요. 공작님. 저는 단지, 단지…….”

‘나는 당신을 돕고 싶은 것뿐이라고요! 그래야 이 세상에서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될 테니까.’ 내 마음속 고함은 그에게 가닿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저쪽 세상에 다녀온 영향인가?”

“…….”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준 것은 카이런 공작이었다. 사후세계를 경험한 후에 성격이 바뀌거나 없던 예지능력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흔했다.

‘맞아요!’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의 목덜미 근처 머리카락을 타고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내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닦아.”

나는 얼른 수건을 주워 그의 머리를 닦았다. 그제야 벽난로의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공작님…….”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언젠가는 말해야만 할 거다. 아리엘사.”

“…….”

그는 나지막이 덧붙였다.

“내 목숨을 구했군. 고맙다.”

이게 소설 속의 장면이었으면, 활자로 이 말을 읽었다면, 나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뒤에 선 채로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내 손끝이 뜨거워지고 바르르 떨리는 것이 그에게 전해질까 봐, 일부러 수건을 느슨하게 붙잡고 그의 두피를 슬슬 문질렀다.

내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

내 방으로 돌아왔지만,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에게 잡혔던 내 손목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아니, 손목 피부부터 심장까지가 다 따갑고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미쳤나 봐. 너 미쳤나 봐. 그만 나대라고, 심장아.’

나는 일부러 창을 열어서 찬 바람을 쐬었다. 그제야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저도 모르게 카이런 공작이 붙잡았던 내 손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마치 그의 잔열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지난번 연무장에서 본 카이런 공작은 까탈스럽고 인정머리 없는 완벽주의자 그 자체였다.

체이어스더러 까다롭고 인정사정없는 성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카이런 공작이 쓰고 남긴 수식어를 그에게 갖다 붙인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공작은 내게는 은근히 물렀다.

대놓고 잘해주는 건 아니지만 미워하지 않는 못난 동생을 다루듯 해야 한다고 하나, 내게만은 그 서슬 퍼런 까탈스러움을 들이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바깥에서 샐까 봐 그러는지 모르는 척 미리 챙겨주기도 했고.

만약에 체이어스가 나처럼 행동했다면, 카이런 공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트가 침몰할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실토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나를 더 추궁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 사실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내가 여자라서?

어릴 때부터 보아온 나를 믿기 때문에?

아니면, 단지 내가 절대 자기에게 위협이 될 수 없는 별것 아닌 인간이어서?

하지만 그가 내게 보이는 태도는 결코 무시가 아니었다. 애정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지만, 예외적인 관용과 몹시 소극적인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한은 나는 그를 위해 더 분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나를 더 의심할 것이다.

무슨 이런 악순환이 있는지.

“휴우…….”

나는 한숨을 폭 쉬며 침대에 앉았다.

카이런 공작의 의심도 문제였지만, 지금 당장 닥친 큰 문제가 있었다.

아까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의 몸을 본 다음부터 나는 음란 마귀에 씌고 말았다.

아무리 그가 주인공이라서 완벽해 보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내 숨결이 습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흐으……?”

그러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아까 그의 옆구리에는 있어야 할 흉터가 없었다.

작품 중반부에 여주가 그가 씻는 걸 훔쳐보면서 저 흉터가 어디서 생겼는지 궁금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까는 그 흉터가 없었다. 끝 모르고 완벽하기만 한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직 그 흉터를 얻기 전이었다.

“사냥.”

나중에 그녀가 물었을 때, 카이런 공작은 여주에게 그 흉터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서 생긴 흉터라고 무뚝뚝하고도 솔직하게 답한다.

강하고 부유한 귀족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주는 그녀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큰소리치는 남자들만 보고 살아왔다.

그래서 여주는 말에서 떨어지다니, 소문 속의 카이런 공작이 실제로는 별것 아닌 남자인가 보다 하며 속으로 실망하고 만다.

심지어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를 모욕적으로 무시하는 행동도 한다.

그 장면에서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던지……. 훌쩍.

아마 그 화에서 댓글창도 폭발했었다.

아버지 후작이 화초처럼 키운 그녀는, 카이런 공작이 자기 아버지를 포함해 자기 가문의 가신 전부를 찜 쪄 먹을 실력자라는 걸 알아볼 눈이 없었다.

하기는, 나중에도 그녀가 그의 진가를 알아본다기보다는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 미묘한 애증의 감정이 쌓여간다는 편이 맞았다.

우리 아빠-게오르그 말고 진짜 아빠-말씀이 맞았다.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한다.

다음 사냥에서 그가 흉터를 남길 만큼 큰 부상을 입는 걸 막아야 한다는 목표가 생기니, 오늘 저녁 느낀 두려움이, 혼란 같은 감정이 명료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불 속으로 꼬물거리며 들어가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우리 남주는 구김살 없이 소중하게 키울 겁니다.’

❄❅❄

나는 카이런 공작이 일찍 보내주는 날이면 공작가의 도서관에서 약용 식물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다. 늘 쓰던 검색창이 간절히 그리웠지만 있는 것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편하긴 해도 의외로 내가 필요한 장서들이 다 있어서, 나는 이 근방에서 나는 열매나 약초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종종 온실로 향했다. 공작의 정원 한쪽에 자리한 유리 온실에는 사과나무 외에도 많은 화초가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각종 허브와 달여 마실 수 있는 약초들을 길렀다.

온실로 간 나는 사다리를 기대 긁힌 자국이 남은 사과나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저기서 떨어졌다니. 엑스트라여, 참 하릴없는 인생이었구나.

“아니야, 긍정! 긍정!”

나는 내 뺨을 가볍게 찰싹 때리고는 허브를 살폈다. 아리엘사가 키우던 허브들은 주로 몸을 따뜻하게 해주거나 진정 효과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공들여 허브를 키운 걸 보면, 카이런 공작은 정말 차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웃자란 아이들은 잎을 솎아주고 향이 독특한 릴리스 허브도 좀 땄다. 북부인들의 사기에 가까운 ‘봄’ 말고, 온실 안 공기는 진짜 봄날 오후처럼 따뜻해서 한번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조금 추워졌다는 느낌이 들었을 땐 오후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온실은 해가 뜬 동안은 약간 더울 정도였지만 해가 지면 급격히 온도가 떨어지는 특성이 있었다.

허브를 돌보느라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에 나는 얼른 돌아보았다.

“체이어스 경.”

“여기 있었니?”

그는 내가 아까 그랬듯이 내가 떨어졌던 사과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본 다음, 다시 나를 응시했다.

묘하게 기분이 불쾌해졌다.

“너는 시간이 나면 꼭 여기 오잖아.”

우연이었지만, 아리엘사의 평소 행동과 내 행동이 겹친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당신하고 단둘이 만난 건 별로 다행이 아니지만요.

“공작님이 드실 차를 길러야 하니까요.”

“흠.”

그는 내 바구니에 담긴 허브 잎들을 바라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보트는 새로 만들고 있다. 네가 탔던 건 부숴서 땔감으로 썼다.”

내가 놀란 눈을 하자 체이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공작님이 화가 나셨거든. 보트 관리를 맡은 하인도 벌을 받았고.”

“벌이요?”

“감옥에.”

“아…….”

하기는, 공작이 죽을 뻔한 사고였다.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너한테는 상을 줘야 할 텐데. 그렇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체이어스의 냉랭한 말투로 듣는 ‘상’은 결코 좋은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빨리 서늘해지는 온실에서 나가고 싶었다.

우리의 말은 겹쳐서 나왔다.

“저는 괜찮아요.”

“네가 어떻게 알고 공작님을 구하러 갔는지 말해준다면 말이야.”

하인이 온실 지붕에 담요를 덮기 시작하자 온실 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여전히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므로 하인은 온실에 담요를 덮어 보온하여 화초들을 보호했다.

내 심장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북부 남자는 심장에도 유해하고 내 건강과 자유에도 유해했다. 한 가지만 했으면 좋으련만.

내가 입을 열자 체이어스가 가로채듯 먼저 말했다.

“물론 너는 우연이라고 하겠지. 내가 너에게 공작님의 간식을 준비하라고 했고, 공작님은 입맛이 몹시 까다로우시니까 원하시는 걸 먼저 확인해야 했을 거야.”

이것은 위기였다. 나는 지금은 아리엘사처럼 소극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딱딱하게 되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의심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들려요.”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담요가 다 덮여 온실 안이 완전히 컴컴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