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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9/128)

8화

카이런 공작과 체이어스가 말에서 내리자 호수를 관리하는 하인들이 나와서 말을 받았다. 일부는 호숫가에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할 준비를 했다.

다행이었다. 카이런 공작을 물에서 건져 올리면 바로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카이런 공작은 이 호수에서 익사할 뻔한다. 겨우내 방치했던 보트가 바닥이 삭아서 내려앉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는 부하들은 그의 보트가 떠 있어야 할 수면이 깨끗한 것을 한참 후에 발견한다. 모두가 망연자실했을 때, 그가 헤엄쳐 나와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공작은 폐렴에 걸린다. 페니실린이 없는 시대에 폐렴이란 곧 사형선고였다.

물론 공작은 기적적인 체력으로 회복하지만, 치료를 받다가 독살당할 뻔하는 등 고생이 그치지 않는다.

며칠간 어리바리하게 지내는 사이, 나는 이미 원작의 도입부에 성큼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허투루 보낼 시간이 없었다.

“공작님, 함께 갈까요?”

체이어스가 말하자 보트에 오르던 카이런 공작이 사납게 말했다.

“내가, 너랑 둘이서?”

하지만 체이어스는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공작의 보트를 밀어주었다. 하긴 보트란 시커먼 남자 둘이 타기에는 부적절한 배이긴 했다.

체이어스는 호수를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아리엘사. 공작님이 돌아오시면 드실 걸 준비해둬.”

하지만 나는 체이어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 카이런 공작의 보트가 호수 중심을 향해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리엘사?”

“네.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입으로 기계적으로 말하며 덱으로 갔다. 그리고 남은 보트에 올랐다.

어찌어찌 노를 젓기 시작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겁이 나 죽을 지경이었다. 공작이 탄 보트가 삭은 건 원작에 나와 있었지만, 다른 보트가 멀쩡한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배운 수영 실력으로 북부의 차가운 호수에서 살아날 수 있으려나.

이러다 폐렴에 걸려 먼저 생을 마감하는 게 나일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나는 노를 저으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공작님은 내가 건져내겠다고.

“아리엘사!”

체이어스가 놀란 표정으로 덱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덱에서 도움닫기 하여 내 보트로 몸을 날릴 기세였다.

나는 죽어라 노를 저어 멀어지며 체이어스를 향해 고함쳤다.

“공작님께 뭐 드실 건지 여쭤봐야 해요!”

체이어스는 기가 차서 힘이 빠졌는지 덱 끝에서 멈춰버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모습은 부지런히 멀어졌다.

체이어스가 욕을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에는 불안하기만 하던 물이 찰박이며 뱃전을 때리는 소리와 흔들림은 금방 익숙해졌다. 새파랗게 금이 갈 것 같은 언 하늘은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이따금 새소리가 들렸는데 그마저도 평화로워 잠이 올 것만 같았다. 카이런 공작이 그 특유의 고요함을 좋아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영지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이따금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이 이상의 장소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멍하니 풍광을 바라보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으읏!”

궁금해서 물에 손끝을 담가보니 머리끝이 쭈뼛할 정도로 차가웠다.

나의 남주를 이렇게 차가운 호수에 빠트릴 수 없었다! 이것은 빙의자의 자존심 문제였다.

나는 카이런 공작의 보트가 무사한지 다시 확인했다.

“헉! 고, 공작님……!”

분명히 호수 중간쯤에 떠 있던 그의 보트가 없었다. 호수의 수면은 고요했으며 반짝거렸다.

나는 게오르그의 근육의 잠재력이 아리엘사의 몸에도 잠들어 있기를 바라며 죽어라 노를 저었다.

“공작님!”

공작의 보트가 마지막으로 떠 있던 곳 근처로 왔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수면은 내 목소리를 메아리로 돌려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내 목소리가 사라진 호수는 너무 조용해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흑…….”

나는 외투를 벗었다.

이렇게 찬물에 뛰어들었다가 심장마비가 오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나서 심장이 뜀박질 쳤다. 하지만 망설임은 금방 사라졌다. 지금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푸후!”

그때 물속에서 공작의 젖은 머리가 튀어 오르며 내 뱃전을 붙잡았다.

“공작님!”

“아리엘사.”

내가 그를 보려고 급격히 움직이는 바람에 보트가 마구 흔들렸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보이나? 반대로 가, 아리엘사.”

“네, 공작님!”

나는 카이런 공작이 보트로 올라올 수 있도록 반대편으로 몸을 잔뜩 기울였다.

보트 위로 올라온 그는 마치 젖은 수건처럼 배 안에 늘어졌다. 두꺼운 옷을 입은 채 푹 젖은 그의 모습에서는 도저히 그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수건이었지만.

“공작님……?”

그는 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몸에서는 김이 폴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왜 여기 있지?”

“간식…….”

나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정말 이런 바보 같은 변명밖에 없는 걸까…….

“뭐라고?”

“간식으로 뭘 드실 건지 여쭤보지 않아서요.”

“오, 아리엘사.”

카이런 공작은 피로한 듯 다시 드러누웠고 나는 말없이 노를 저어 덱으로 돌아갔다.

카이런 공작이 푹 젖은 채로 나타나자 큰 소동이 벌어졌다. 호숫가의 보트 창고에서 모포를 가져오고, 모닥불을 더 크게 키웠다. 굽던 고기는 치워버리고 물을 데웠다.

체이어스는 내게 고함을 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는 잘……. 공작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불을 쬐며 따뜻한 물을 마신 카이런 공작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체이어스, 돌아간다. 남은 보트는 다 불태워버려.”

보트 관리를 맡은 하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체이어스는 그를 죽일 듯 노려보고는 카이런 공작을 따라 말에 올랐다. 나도 엉겁결에 따라왔다.

성으로 돌아가서, 나는 재빨리 따뜻한 목욕물을 주문했다. 카이런 공작이 목욕하는 동안, 나는 그의 침실에서 깨끗한 옷을 준비해서 탁자에 올려둔 채로 기다렸다.

두꺼운 가죽 바지는 보기보다 부드러웠다. 튜닉에서는 햇빛 냄새가 났다. 성의 하녀들은 나 같은 덜렁이 시녀보다는 일을 더 잘하는 것 같았다.

내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원작대로 물에 빠지긴 했지만, 거의 바로 물 밖으로 나왔다. 아까 신경질을 부리는 걸 보면 감기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황제는 폐렴약을 하사하는 것을 빙자하여 카이런 공작을 독살하려 시도할 수 없었다.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을 확인한 흥분감은 생각보다 컸다. 마치 카이런 하르펠 공작의 운명을 내가 쥐고 있는 것 같은 고양감마저 들었다.

“…….”

카이런 공작은 어느 틈에 침실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허리에 수건 하나만 감은 채로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헉.

나는 눈을 피하며 얼른 그를 등지고 섰다. 내게는 그의 근육이 꽉 들어찬 완벽한 몸뚱이를 대놓고 감상할 내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는 내가 끓여 둔 생강차의 향이 은은하게 차 있었다. 그것을 맡은 그가 먼저 물었다.

“이건 뭐지?”

“생강차입니다.”

“생강?”

“몸에 좋은 약재인데 의사 선생에게 좀 얻어왔어요.”

“너는 차에 진심이구나.”

“…….”

“아리엘사?”

카이런 공작이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 내 뒤로 다가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고함쳤다.

옷을, 옷을 입으시라고요!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런 공작은 조금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옷시중 드는 것도 잊어버렸나?”

“아…….”

그는 내가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 내가 여주보다는 시녀로 빙의한 게 낫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낫기를 바란 건 맞기는 맞지만…….

내가 고개를 떨군 채 우물쭈물하는 동안, 기다리다 못한 그가 먼저 다가와 튜닉을 채어갔다.

나는 어색함을 무마해보려 생강차를 따라왔다.

그는 옷을 대강 껴입고 의자에 앉더니,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머리는 네가 말려.”

그리고 그는 생강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숨도 참은 채로 그의 머리 위에 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내 손을 통해 그의 어깨가 편안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생강차도 흡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수건으로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그에게서 향유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는 내 손길을 편안해한다. 그리고 자기 몸을 의심 없이 온전히 맡긴다. 마치 나를 완전히 믿는 사람처럼.

그러한 사실들이 떠오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리려 했다.

참 여자 심장 건강에 유해한 사람이다…….

“아리엘사, 어떻게 알았지?”

“몸을 따뜻하게 하는 데는 생강이 최고라고 할머니가, 시장에서 들었어요. 아…….”

목욕으로 데워진 카이런 공작의 손이 머리를 닦던 내 손목을 붙잡았다.

“보트가 침몰할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는 뜻이다. 아리엘사 로크만.”

그의 결박은 단단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내가 거짓말을 한다거나 달아나려고 하면 내 손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을 힘이 그의 손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워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손바닥은 뜨거웠고, 가련하게 날뛰는 내 심장박동은 그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알아챌 터였다.

나는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데.

“그, 그건…….”

“간식 때문이었다는 소리 따위는 하지 마. 게오르그의 딸이 천치일 리는 없으니까.”

그는 나를 위협하려는 생각은 없다는 듯 나지막이 덧붙였다.

“가산표를 외우는 데는 조금 오래 걸렸더라도 말이지.”

나는 조금 헐떡이듯 대답했다.

“그냥, 그냥……. 공작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어요.”

내 손목을 쥔 카이런 공작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내 몸은 힘없이 끌려가 그의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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