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는 카이런 공작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나 혼자 데이트하는 기분에 빠진 것은 좀 민망했지만, 그와 처음으로 외출한다는 사실에 조금 들뜬 게 사실이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나는 수십 명의 남자들이 달리고 있는 커다란 운동장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아리엘사!”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일종의 축구를 하고 있던 게오르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내가 멀쩡하게 공작을 수행하여 나온 걸 보고 몹시 기쁜 것 같았다.
“앗!”
그때 시커먼 공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아빠!”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발로 공을 멈춘 다음, 팡 차서 기사들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찬 공은 연무장 한가운데로 예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기사들의 다리 사이를 저 혼자 도르르 굴러갔다.
근육질의 남자 수십 명이 경기를 중단한 채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뭐가 잘못된 거지?
“크흠…….”
카이런 공작이 침음을 흘리는 걸 듣고, 나는 얼어붙었다.
게오르그는 마치 내가 폭탄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사색이 되어 다가오더니 기사들의 시야를 가리도록 나를 감쌌다.
“공작님.”
카이런 공작이 끄덕이자 게오르그는 나를 보호하듯 성안으로 데려갔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울상을 하고 말을 아끼고 있으니 게오르그가 내 양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너, 너, 왜 공을 찬 거냐?”
나는 그가 또 딱밤을 놓을까 봐 슬금슬금 물러나며 말했다.
“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몰라서 물어?”
나는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아기 고양이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게오르그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억누르고 말했다.
“기사단 전체가 보는 데서 공을 차다니, 공작님이 너를 어떻게 보셨겠냔 말이다!”
“네?”
“너는 공을 무서워하잖냐! 게다가 공을 그렇게 뻥뻥 차대면 시집을 어떻게 가려고 그러는 거야!”
“헉…….”
내가 기겁하자, 게오르그는 내가 이제야 깨달았나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기겁했다.
나, 정말 이렇게 후진 세계로 들어온 거야?
얌전하고 소심한 아리엘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기사들이 더 놀란 것 같기도 하지만, 여자가 공을 ‘뻥뻥 차대면’ 안 되는 문화인 모양이었다.
조심하기로 했는데……. 나는 안에서도 새고 밖에서도 새는 바가지였다.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게다가 한 가지 지나치기 힘든 사실도 있어 조심스럽게 확인해두고 싶었다.
“혹시, 저를 시집보내려고 점찍어놓은 기사가 있으세요?”
“……응?”
게오르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동공은 흔들렸다.
뭐야, 이런 것도 물어보면 안 되는 세계관인가?
하지만 다행히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이가 덜덜거리는 게 보일 정도로 더듬으며 말했다.
“너, 너, 너 시집가려고 그래? 이 아빠를 두고?”
다음 순간 그는 다시 녹색 괴물로 변신할 것 같은 눈빛을 했다.
“혹시 기사단의 어떤 놈이 너더러 시집 오라든?”
나는 그가 쥔 거대한 주먹을 보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시집이라뇨, 제가 아빠 두고 어딜 가요! 제가 공 차고 다녀서 이젠 시집 못 갈걸요?”
“흠……. 안 가는 것과 못 가는 것은 다르긴 하다만. 어쨌든 다행이라고 치자.”
그는 갑자기 얼굴이 편안해지더니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나도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연무장 가에서는 카이런 공작이 기사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게오르그가 연무장으로 돌아가서 구호를 외치자 기사들은 순식간에 대형을 이루어 섰다.
조금 전까지 공을 차던 여유로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기사들이 게오르그의 구호에 따라 재빨리 대형을 바꾸는 훈련을 하는 걸 바라보며 카이런 공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근육질의 남자 수십 명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어도, 은은한 빛을 발하는 카이런 공작 한 명이 장소를 압도했다.
나는 내가 빙의한 포지션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나는 그의 오른팔인 체이어스보다 그의 곁에 더 오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 이유도 깨달아야 했다. 그의 뒤에 서서 기다리면서, 카이런 공작의 성격에 대한 평판을-대부분 혹평이다-생생하게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사들의 작은 실수도 용서하지 않았고, 실수나 단점이 보이면 바로 매섭게 질책했다.
내가 보기에는 칼로 내려친 것 같은 줄을 그는 삐뚤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순간이동 하듯 달리는 기사들에게 그는 ‘달팽이만 삶아 먹인 모양이니 주방장을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고 했다.
곁에서 보고 있으니 정말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서, 게오르그가 마지막으로 괴성을 지르자 카이런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훈련의 끝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운동신경이 좋더군. 아리엘사.”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주방장과 감방 이웃이 되지 않으려면 나는 더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고, 나는 이번에는 끙끙대면서도 그의 외투를 벗기는 데 성공했다. 아우라가 휩싼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건 숨 막히는 일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정전기가 마구 뿜어져 나오는 유리 구체에 손을 대는 기분과 비슷했다. 물론 손이 찌릿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찌릿거리는 게 문제였다.
“차를 드릴까요?”
“시나몬.”
“네. 공작님.”
나는 얼른 시나몬 차를 타서 대령하고 내 의자로 돌아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기억을 짜내려고 애썼다.
그렇게 떠올린 아리엘사는, 세상에, 길 가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정도의 운동치였다.
“아리엘사. 천천히 걸어봐. 그러면 덜 넘어질 거야.”
꼬맹이 공자님이 아리엘사에게 던진 말은 그녀의 기억 깊숙이에 남아 있었다.
그 시절의 카이런 공자는 최소한 그녀에게는 다정한 꼬마였는데, 어쩌다 저렇게 까칠하게 컸을까.
아까 연무장을 떠나며 그가 나를 노려보았을 때는 식은땀이 다 났다.
나는 아리엘사의 기억에 닿으려 애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지 않으려면 갈 길이 멀었다.
❄❅❄
나는 다음 날 출근길 복도를 걸으며 ‘조심하자’ 한마디를 외면서 갔다.
밤에 많이 고민을 해보았는데, ‘아리엘사가 왜 저런 짓을?’이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갑갑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리엘사의 기억은 단편적이었고, 원작에는 최소한의 설명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세계의 풍습과 문화를 충분히 알 때까지는 몸을 사리는 게 현명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겨울딸기 차를 가볍게 우려 놓고 구석의 내 자리에 앉았다. 내 문제에 골몰하니 카이런 공작의 아우라를 보아도 마구 두근거리지 않아서 좋았다.
역시 덕질보다는 생존이 우선인 거다.
나는 원작의 내용을 처음부터 곱씹었다. 혹시라도 사소한 부분들을 잊어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체이어스가 들어왔다.
“게오르그 경이 날도 따뜻해졌으니 야외 훈련을 개시하겠다고 합니다.”
“왜 게오르그 경이 직접 안 왔지?”
체이어스는 내가 있는 쪽으로 흘끔 돌아보는 게 틀림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법이다.
“기사들을 기합 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체이어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항의하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
카이런 공작이 다음 말을 기다리며 침묵하자 그가 말했다.
“젊은 기사들이 아리엘사가 시집가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그 애를 이제 기사단에 넣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하는 바람에, 그래서 저더러 가는 김에 보고하라고…….”
나는 헉하고 굳어버렸는데, 카이런 공작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동행한다.”
그러자 체이어스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따뜻해진 김에 잠시 쉬시지요. 그 고발건 때문에 며칠 신경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인들에게 호수를 정리해두라고 시켰습니다.”
나는 즉시 귀를 쫑긋 세웠다.
“아리엘사.”
“네! 공작님.”
“호수에 간다.”
“네. 공작님.”
나는 체이어스의 눈치를 보지 않는 척하며 카이런 공작의 외투를 가져와 입혔다.
체이어스의 의뭉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게 느껴져서, 나는 일부러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찌어찌 외투의 여밈 걸쇠도 잘 채울 수 있었다.
내가 외투를 다 입혔을 때 카이런 공작의 입꼬리에 웃음이 슬쩍 스친 것은 기분 탓 같았다.
나도 외투를 챙겨 입자 체이어스가 말했다.
“너도 따라가게?”
“…….”
나는 재빨리 생각했다. 아리엘사가 물을 싫어하나? 하지만 그런 기억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따라가야만 했다.
“공작님이 가시는걸요? 제가 시중을 들어야지요.”
카이런 공작이 이미 나가버려서 체이어스도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외성 바로 밖에 있는 호숫가로 갔다.
[성에 딸린 호수는 작았지만 물빛은 에메랄드 같았다.]
원작에서 그렇게 표현한 호수는 정말로 보석 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보트를 매어 두는 검은 덱과 호수 주변에 희게 말라 죽은 나무 몇 그루 때문에 그 푸른빛이 더 강조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상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체이어스가 이를 살짝 악물고 있는 나를 흘끔 돌아볼 정도였다.
빌어먹을 북부 놈들. 이 추운 날씨에 물놀이라니!
아마 그들은 호수면에서 얼음이 녹기만 하면 봄이라고 치는 모양이었지만,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생기고 있었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는 한겨울에 바람 부는 운동장에 나온 기분이었다.
원래라면 당장 집으로 뛰어가서 이불에 들어가야 하는 날씨였지만, 내 손에는 땀이 쥐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