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28)

6화

체이어스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너 혹시 어디서 이상한 거 주워 먹은 거 아니지? 공작님께 옮기는 병에 걸렸다거나…….”

“체이어스 경…….”

내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자, 그는 얕은 한숨을 쉬더니 손을 저으며 나가버렸다.

“아니다. 됐다.”

체이어스를 물리친 것은 기분이 좋았지만, 카이런 공작의 의심이 언제든 더 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는 초조함을 느꼈다.

덕심에 들떠 흥분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공작의 명령을 받은 체이어스는 게오르그와 함께 내 방으로 오면서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하며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내가 광증을 보였다면 그게 전염성이 없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나를 감금했겠지. 가짜라거나 수상하게 보였다면, 즉시 나를 지하 감옥에 처넣고 고문했을 거고.

최소한 그는 지금 이 북부 하르펠령이 겉보기와 달리 실제로는 평화롭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도 내 ‘사다리 병’에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아무리 공작의 책사라도 공작의 왼팔인 게오르그의 딸을 무턱대고 구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불을 다시 당겨 덮자 긴장이 풀어졌다. 의사를 만난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앞으로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머리가 아픈 연기를 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조신한 아리엘사 연기를 계속 잘해나갈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카이런 공작과 ‘남부의 장미’라 불리는 여주가 마침내 사랑을 이루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내 피하고 있었는데, 집 생각을 해버린 게 잘못이었다. 나는 흐느끼며 잠들었다.

내 이마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잠든 채로 훌쩍대던 나는 그 온기에 곤히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새벽에 잠에서 깬 나는 아직 내 이마에 남은 그 온기와 압박감이 ‘아빠’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내게 속삭인 말들이 꿈이 아니라 진짜였음을 깨달았다.

게오르그는 밤새워 내 침대 곁을 지키다가 막 돌아간 것 같았다. 그의 몸무게를 버티느라 밤새워 고생한 작은 의자가 안쓰럽게 여겨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 있었고 기분도 훨씬 나아져 있었다.

“아리엘사.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빠는……. 아빠 겁주지 말고 얼른 건강해져, 이놈아.”

나를 밤새워 지키던 게오르그의 애정 어린 속삭임이 떠오르자 두렵고 죄스러웠다.

나는 친딸도 아닌데.

아리엘사는 어쩌면 사다리가 넘어져 땅으로 내동댕이쳐진 순간에 죽었을 텐데.

그는 나로 인해 진짜 딸을 위해 슬퍼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게오르그가 없다면 내 빙의 생활은 보호막도 없이 내팽개쳐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나의 ‘아빠’ 한마디에 목숨이라도 걸어줄 것 같은 그에게 그런 말을 전할 용기는 더 없었다.

그의 보호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아리엘사가 되어주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우리 남주와 게오르그와 밉상이지만 충성스러운 체이어스까지, 모두 내 힘으로 지켜주자.

우리 남주가 이 북부 땅을 잃지 않게, 게오르그가 그렇게 죽지 않게 만들자.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힘이 났다. 그것은 오직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공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카이런 공작의 집무실로 간 나는 최대한 얌전하게 인사하고 즉시 콘솔 테이블로 향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편지에 답신을 쓰는 듯 펜을 빠르게 놀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앞에 겨울딸기 차 찻잔을 내려놓았다.

딸기와는 전혀 상관없음에도 그런 이름이 붙은 허브 차는 특유의 달콤한 향을 책상에 퍼트렸다.

카이런은 찻잔을 코 아래로 가져가더니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꺅.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잘생기셨습니다. 공작님.

아니, 아니야, 진정해.

그가 나직이 말했다.

“평소와 다르군.”

“오늘은 살짝만 우렸습니다. 어떠신가요?”

카이런 공작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머, 검 잡는 손가락이 저렇게 희고 길어도 되는 건가.

진정하자는 결심은 어디가고, 나는 잡념에 몸을 내맡긴 채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더 삼키고는 말했다.

“좋아. 내가 마신 것 중 가장 맛있는 겨울딸기 차야.”

“감사합니다.”

아리엘사라면 상사의 칭찬에 덩실덩실 춤을 추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야 한다. 고작해야 ‘어휴, 다행이다’ 정도의 반응이 적당했다.

그래서 나는 내 허벅지를 손톱으로 꽉 찌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내가 책상에서 물러나려 할 때였다.

“왜 전에는 이렇게 끓이지 않았지?”

왜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이런 공작이 까탈스럽고 독선적이기 짝이 없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는 시녀가 푹 우려주는 차가 입맛에 썩 맞지 않은 것을 평생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가 까탈스럽거나 독선적으로 구는 것은, 오직 그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때였다.]라는 원작을 제가 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작님.

하지만 나는 동정심을 사기 위해 최대한 소심하게 말했다.

“제가 요즘 사다리 때문에…….”

카이런 공작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져서,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을수록 제가 맡은 일에 열중하고 싶었어요. 바로 공작님을 모시는 일이요……. 차라도 더 맛있게 끓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군.”

카이런 공작의 대답은 짧아서 의도를 읽기 어려웠다. 그는 단지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김은 그의 아우라에 가려 흩어지고 있었다.

눈이 행복했다.

“기사들도 흔히 말에서 떨어지고 머리를 다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성격이나 행동이 급격히 바뀌는 법은 없다. 아리엘사.”

따뜻한 차는 그가 마시는데, 내가 순간 훅하고 열이 올랐다.

사다리 병 정도의 구실로는 의심이 풀리지 않은 걸까?

나는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를 납득시켜야만 했다.

나는 너무 긴장해서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사다리에서 떨어졌을 때……!”

‘또 그 얘기인가?’ 하듯 공작이 찌푸린 눈을 들었다.

“저, 저쪽 세상을 본 것 같아요.”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엎질러진 물 말고 내가 엎지른 물.

나를 빤히 바라보는 카이런 공작의 눈동자는 살짝 흔들렸지만, 그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저쪽 세상?”

나는 학원 가는 길에 나를 향해 돌진하던 차에 관해 뱉을 뻔했다.

그 세계에는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차가 너무 많다고. 사람 인생을 허무하게 삭제해버리는 빌어먹을 차가.

하지만 재빨리 입을 닫았다. 나는 단지 당혹하고 슬픈 눈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사실 내 감정이 그랬기 때문에 크게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저는 더 잘 살고 싶어요. 예전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고, 좋은 것 많이 보고, 잘 먹고, 그렇게요.”

카이런 공작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에게도 좋은 딸이 되고, 공작님께도 최고의 시녀가 되고요.”

나는 그를 향해 씩씩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내 진짜 결심이었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내고 나니 더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카이런 공작의 입가에도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눈부셔요, 웃지 마요.

“아리엘사.”

“네. 공작님.”

“체이어스에게는 그냥 머리가 아프다고 해.”

“……네. 공작님.”

카이런 공작은 다시 찻잔을 들었고, 나는 조용히 물러 나와 집무실 구석의 내 의자에 앉았다.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쳤다.

집무실의 모서리, 창 바로 앞에 놓인 작은 책상이 아리엘사의 자리였다. 거기 앉으면 카이런 공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부르면 즉시 달려갈 수 있었다.

보이지 않으니까 그의 숨소리만 나도 더 집중하게 되었다. 오늘은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일에 더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위험했다.

체이어스에게는 그냥 머리가 아프다고 하라는 말에는 자꾸 웃음이 났다. 사실 체이어스라면 ‘저쪽 세상’ 따위의 이야기를 더 수상하게 여길 터였다.

곧, 공작은 내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어렸을 때처럼…….

“아리엘사.”

내 생각의 연속을 자르고, 카이런 공작이 일어났다.

“네, 공작님!”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책상 곁으로 갔다.

“연무장에 간다.”

“네. 공작님!”

나는 그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빤히 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사과파이.”

혼잣말인데도 너무 또렷하게 들려서,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외투를 준비해줘.”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벽 한쪽에 걸려 있는 외투를 발견하고 얼른 뛰어가 가져왔다.

바짝 긴장한 채로 그의 몸에 옷을 걸치는 것까지는 했는데, 단추도 지퍼도 아닌 특이한 걸쇠 여밈은 어떻게 하는지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있으니 긴장되어 더 허둥거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등을 감싸 쥐듯 붙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 올려다보았고, 그는 그런 채로, 마치 배워두라는 듯 천천히 걸쇠를 채웠다.

그의 손바닥이 감싼 내 손등에서는 화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으음…….”

내가 입술을 꾹 다물며 앓는 소리를 내자 그가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러지?”

왜 그러냐고요? 댁이 멋지셔서요.

흥분해서 비명이든 신음이든 흘리지 않으려면 내 입술을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칼라에 모피 장식이 달린 외투를 걸친 카이런 공작의 모습은 곤란할 정도로 멋졌다. 코트 하나로 강인한 남성미가 이렇게 강조될 줄이야.

곤란해하는 내가 어설퍼 보였는지, 카이런 공작이 무심결에 훗 하고 웃었다.

내 얼굴은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해.”

그가 혀를 쯧 차며 구석을 가리켰다. 내 의자가 있는 구석에 내 외투도 걸려 있었다. 소박한 보통의 외투였다.

내 케이프 목둘레에도 목에 바람이 들이치지 않도록 털가죽이 둘려 있긴 했지만 정말로 딱 실용적인 용도라 멋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얼른 내 외투를 가져와 껴입자 카이런 공작이 먼저 문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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