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28)

5화

“롬니가 관리하는 창고는 포슬란뿐이지만 네 검토에 따르면 포슬란에서만 사라진 곡식은 없다. 그가 결백하다는 증거다.”

온몸의 솜털이 다 솟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롬니라는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포슬란 창고 관리자의 이름이 롬니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누구더라…….

그자는 카이런 공작의 군대에 의도적으로 보급 식량을 보내지 않아 공작의 패전에 큰 역할을 한다. 그는 배신자였다.

곧, 나는 롬니 행정관의 결백을 증명함으로써 방금 그 배신자가 포슬란 창고의 책임자가 되는 걸 막은 것이다.

롬니를 고발한 자가 바로 그 배신자이거나 배신자의 일당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땀이 나는 손바닥을 꼭 쥐었다. 시녀가 하기에는 주제넘은 질문이었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공작님, 롬니 행정관이 쫓겨났다면 혹시 누구를 후임자로 택하려 하셨나요?”

“그런 건 그의 죄가 증명되면 생각할 일이다.”

카이런 공작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가 롬니의 결백을 믿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와 그 문제를 말할 생각이 없어서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혹시, 고발자가 누구-”

“-아리엘사.”

“네. 공작님.”

“가봐도 좋아. 체이어스를 불러.”

당연한 대답이었다. 내가 장부 정리를 조금 도와주었다고, 공작이 시녀에게 영지의 정무를 시시콜콜 말할 리는 없었다.

“네. 공작님.”

나는 순순히 물러 나왔지만 가슴이 갑갑해졌다.

이미 모든 사건의 씨가 곳곳에서 뿌려지고 있었던 걸까?

책에서 읽고 즐겼던 모든 사건이 이제부터 내게 닥쳐올 현실이라는 자각에 머리털이 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이런 공작이 나를 불렀다.

“아리엘사.”

체이어스를 부르러 가려던 나는 그의 부름에 놀라서 돌아섰다.

“시나몬 차 한 잔 더 줘.”

이상했다. 그 한마디에 나를 감쌌던 긴장감이 봄바람이 분 듯 흩어지는 것 같았다.

“공작님, 차 드세요.”

나는 얼른 따뜻한 시나몬 차를 타서 대령했다. 차는 우리 둘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

나는 방에 누워서 천장을 보며 카이런 공작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의 외모였다. 은은한 글로우를 뿜는 우리 공작님의 외모.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객관적으로 말하면 그는 까칠했고 아리엘사를 은근히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아주 속상하지는 않은 것은 아마 그의 그림 같은 외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토록 얼빠였나.

눈을 꼭 감고 집중하자 아리엘사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아리엘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도 순둥이였고, 말수가 적었다. 아빠 게오르그가 얼러주면 울음을 터트릴 만큼 겁도 많았다.

그녀가 절대 영리하다거나 눈치 빠르다고는 할 수는 없었음에도 카이런 공작은 그녀의 둔함을 개의치 않은 게 틀림없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2~3인분의 똑똑함을 혼자 다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리엘사는 어린 카이런 공자의 놀이 친구가 된 후 그를 몹시 다정하게 돌봐주었다. 남동생을 돌본다는 느낌 반, 인형 놀이를 한다는 느낌 반이었던 것 같았는데, 물론 그 인형은 공자님이었다.

장래의 공작님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그녀가 타고난 천성이 그랬다.

그러니 공자가 자기를 이기려 드는 가소로운 남자아이들보다 아리엘사를 편하게 여기고 곁에 머물도록 내버려 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했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어린 카이런 공자가 아리엘사에게 자기가 만든 꽃팔찌를 내미는 광경이 떠올랐다. 화창한 정원에서 공부하던 중의 휴식 시간이었다.

표정으로 보아 ‘아이들이 이런 걸 하기에 나도 시험 삼아 해보았어. 그런데 이걸 어디다 버릴지 모르겠어.’ 하는 게 분명했지만, 아리엘사는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성의 남자아이들이 길에서 아리엘사를 괴롭히고 있을 때, 마침 지나가던 카이런 공자께서 구해준 적도 있었다.

그가 작은 돌멩이를 하나 던질 때마다 못된 꼬마들이 차례로 머리에 딱밤을 맞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운동신경은 이미 그때부터 천부적이었다. 귀여워!

아이들이 모두 도망가고 난 다음에, 아리엘사는 ‘고맙습니다, 공자님.’하고 인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숫기 없는 아리엘사는 입을 여는 데 한참이 걸렸고, 그사이 카이런 공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열 살도 안 된 나이였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시크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기억에 나까지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래서 아리엘사는 묵묵히 그의 곁을 지킨 거네. 그런 좋은 기억들 덕분에.”

엑스트라에게도 나름의 사연과 좋은 추억들이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지만, 우리 남주, 어릴 때부터 과묵하고 감정 표현이 없는 카이런 공작의 모습에도 심장이 쫄깃해졌다. 원작에서 이 부분을 읽을 수 없었던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의 까칠한 태도는 백 번쯤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소설 속으로 내던져진 상황은 한없이 절망적이어야 하는데, 남주에 대한 덕심이 그런 걸 다 잊게 하고 있었다.

……좋은 거겠지?

-아리엘사. 자냐?

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노크를 한 사람은 게오르그였다.

“네. 들어오세요.”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체이어스와 처음 보는 노인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곧장 떠오른 기억으로 나는 그가 의사임을 알았다.

“아리엘사. 상태를 보러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머리가 아프다든가, 어지럽다든가. 기억이 깜빡깜빡한다든가.”

나는 내 침대 곁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낯선 세 남자를 보며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 올렸다.

갑자기 왜 몰려온 거지?

나는 아차 하고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카이런 공작이 내가 다쳐서 이상해지는 바람에 안 하던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의사를 보낸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괘, 괜찮아요!”

가능성은 낮았지만, 의사라면 내가 진짜 아리엘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더럭 났다.

하지만 내가 괜찮다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나라도 안 믿을 것 같았다.

게오르그는 내 머리맡으로 섰고, 의사는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내 눈을 까뒤집어 보고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왔다 갔다 했다.

의사가 다시 물었다.

“어제 뭘 먹었는지 기억나니?”

나는 눈을 불안하게 굴리며 대답했다.

“삶은 감자랑 수프랑…….”

“언제?”

“점심, 저녁 다요.”

의사가 게오르그를 쳐다보자 그가 끄덕였다. 그가 가져다준 식사였기 때문이다.

“그럼 그제는?”

“수프랑…… 오븐에 구운 감자에 삶은 닭고기요.”

나는 눈을 굴려서 의사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알 턱이 없잖소, 의사 양반!

나는 수프는 매일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했지만, 그다음은 막막했다. 그래서 얼떨결에 오늘 먹은 걸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내 대답에 게오르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는 그렇게 점점 네모나게 되다가 거구의 녹색 괴물로 변신할 것만 같았다. 나는 정말 무서웠다.

심지어 체이어스까지 눈매를 찌푸리고 있었다.

누가 매 끼니를 다 기억하냐고요! 선생님은 기억하세요?

의사는 매우 어색하면서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겠니, 아리엘사?”

“매일 비슷한 걸 먹으니까 일일이 기억이…….”

더 참지 못하고, 게오르그가 울분을 터트리듯 말했다.

“그 전날은 소를 잡아 만찬을 열었잖아. 어떻게 그걸 기억 못 할 수가 있어!”

“흑…….”

내가 눈만 남기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자 의사가 말렸다.

“허허, 게오르그 경. 환자를 놀라게 하면 안 돼요. 사다리가 아리엘사의 기억을 앗아간 게 분명합니다.”

“사다리가…….”

게오르그와 체이어스가 동시에 충격을 받은 듯 중얼거리자, 의사는 근엄하게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 사다리 말입니다. 머리에 큰 충격을 받으면 사다리에서 추락하기 전의 기억이 흐려질 수 있어요.”

선생님, 진단이 좀…….

“흐으…….”

게오르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체이어스도 심각한 얼굴을 한 채로, 인정머리 없는 질문을 했다.

“그러면 공작님의 시중은 제대로 들 수 있겠습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내가 버럭 소리를 치자, 세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밥 대신 우리 남주를 보며 빙의 생활을 견디는 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는 얼른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며 아리엘사다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가끔 깜빡깜빡하기는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공작님 시중드는 것은 문제없어요. 정말이에요, 아.빠.”

“흐흑, 아리엘사!”

게오르그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나를 불렀다. 누가 보면 내가 백혈병이나 뇌종양에 걸린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빠’를 강조해 부른 것은 상당히 효과가 좋아서 그는 훨씬 안심한 것 같았다.

의사는 게오르그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푹 쉬어라, 아리엘사. 두통이 있다거나 하면 찾아오고.”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체이어스는 뒤에 남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인정머리 없는 의심 섞인 시선에 들어갔던 식은땀이 다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원작에서 묘사하는 그는 냉철한 머리형 인간이었다.

완벽주의 안경남 이미지였으면 그에게도 팬심이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인간을 불신하는 삐딱한 유형에 가까웠다.

성격이 나쁘다는 공통점 말고, 카이런 공작이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과 과단성 있다면 체이어스는 나쁜 의미로 추진력이 좋았다.

그러니까 그는, 카이런 공작을 위해서는 양심 같은 건 나 몰라라 무슨 짓이든 하는 유형의 가신이었다.

그가 게오르그와 함께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걱정 때문이 아니라, 공작님의 티타임에 문제가 생길까 봐 내 상태를 확인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런데 체이어스가 뜻밖의 말을 했다.

“공작님께서 너를 걱정하셨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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