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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5/128)

4화

말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줄곧 긴장해 있던 그의 미간이 편안하게 펴지는 것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그리고 기뻤다.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달다거나, 싱겁다거나, 말이나 한마디 해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나는 그의 그런 성격이 싫지 않았다. 그러니까 잠 줄여가며 끝까지 읽었지.

그는 원래 까칠하다 못해 성격 파탄에 가까운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남부 후작가의 여름 같은 금발 여인이 그의 마음의 얼음을 녹이기 전까지는.

사랑에 가진 모두를 걸고, 자기 자신마저 내려놓는 그의 모습이 나는 참 좋았다.

그런 그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으니 그의 태도가 많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는 시나몬 차가 마음에 드는 게 분명했으니까.

차를 마신 그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지만, 그의 아우라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아까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건강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 원작 지식이 실제로 쓸모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게 초능력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작의 책상을 물끄러미 보다가 불쑥 뱉고 말았다.

“제가 도울까요? 바쁘시잖아요.”

아차…….

카이런 공작의 눈썹은 아까보다 한층 격하게 일그러졌다.

잠깐 들뜨는 바람에 시녀 아리엘사가 절대 할 리 없는 소리를 해버리고 말다니.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원작에서 아리엘사는 말이 없고 소심한 순둥이였다.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 같은 시녀였다.

그런 그녀가 카이런 공작의 정무에 간섭하는 말을 먼저 꺼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럴 때는 후퇴가 아니라 전진이었다!

나는 그의 손 아래 펼쳐진 장부를 흘금흘금 보면서 빠르게 말했다.

“계산을 맞추는 일이면 제가 돕겠습니다.”

아차 하고,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덧붙였다.

“너, 너무 어렵지 않으면요.”

카이런 공작이 ‘음, 그래?’ 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갈 사람도 아닌데, 당황한 나는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헛소리를 마구 내뱉고 있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장부 위에서 손을 치웠다. 그의 얼굴에는 뚜렷한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어떻지?”

손바닥에 식은땀이 확 올라왔다.

나는 장부에 쓰인 언어와 숫자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종이에 끄적여 둔 메모를 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단지 내가 흥분해서 급발진해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세금 장부와 창고의 재고가 맞지 않아서 고생하시는 거잖아요.”

카이런 공작은 뜻밖이라는 듯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그가 조금이라도 감탄해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의심과 불쾌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최고급 교육을 받은 그가 끙끙대는 문제를 시녀가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어처구니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는 대신 딱딱하게 말했다.

“곡식은 보관해 두면 저절로 부피가 줄고, 쥐가 먹어 손실되는 양도 적지 않다. 지금까지는 봄에 창고를 점검해서 그 양만큼 손실처리를 했지만, 나는 그 구멍을 없애고 싶어.”

“저절로 손실된 것인지 빼돌린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요?”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끄덕였다. 내가 그의 의도를 맞게 짚은 것 같았다.

내가 안도하는 순간, 그가 몹시 간단한 일인 듯 말했다.

“못하면, 벌을 내리겠다.”

아휴, 저 성격.

그러나 내 무덤을 내가 판 상황이라 나는 불편은 접어두고 장부에 집중했다. 나는 천천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이런 공작은 행정관들이 작성한 장부를 감사하고 있었다. 세금으로 받은 곡식이 화폐나 다름없는 곳에서 곡식의 손실은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미적분도 아니고 이쯤이야.

내가 헤벌쭉 웃자, 카이런 공작은 일어나서 자신의 의자를 비워주었다. 그는 내게 내릴 벌을 고민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홀린 듯 공작의 책상에 앉았다.

그가 계속 앉아 있던 의자의 온기가 느껴지자 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머리를 마구 저은 다음, 장부에 집중했다.

이 세계의 일반 수학이란 사칙연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보이지도 않게 사라져버린 곡식을 장부에 집어넣는 건 까다로운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먼저 곡식에 인위적인 손실이 있는지 확인했다. 장부는 생각보다 잘 정리되어 있어서 내가 필요한 숫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카이런 공작은 소파에서 한 다리를 꼰 채로, 내가 끓여 준 시나몬 차를 매우 만족스럽게 홀짝이고 있었다. 내게 던지는 시선은 매서웠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이것은 의외로 간단한 비율의 문제였다. 계산해보니 창고별로 곡식의 손실률은 거의 비슷했다.

누가 곡식에 손을 대었다면 어느 창고 하나만 비율이 유독 높아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각 창고에서 일정 비율만큼 훔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창고는 각기 멀리 떨어져 있었고 관리하는 행정관도 달랐다.

그리고 카이런 공작도 계산하지 못하는 비율을 도둑이 알고 그만큼씩만 훔쳐냈다고 가정하기도 어려웠다.

곧, 곡식 창고의 재고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 했습니다. 공작님.”

“…….”

카이런 공작은 눈썹을 살짝 일그러트리더니 시나몬 차를 내려놓았다. 못마땅한 기색이 확연한데도, 찻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가 책상으로 돌아와서 나는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곁에 섰다.

그는 의자에 앉은 다음, 내가 작성한 표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세금 장부의 수입과 예상 손실률, 실제 재고를 나란히 적은 표였다.

나는 아리엘사의 캐릭터에 맞추려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곡식은 평균 3푼 정도 손실되고 있어요. 지금은 손실된 비율만큼 지출로 처리하시고, 앞으로 세금을 받을 때 예상 손실분을 제한 양을 함께 기록해두면 다음 해에 창고를 관리할 때 편리하지 않을까요……?”

“내 집에 도둑은 없군.”

“감히 누가 공작님을 속이려 들겠어요.”

나는 어색한 아부를 하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향해 던지는 시선에 다리가 굳어버렸다.

“이런 계산 방법은 어떻게 알았지?”

“그야…….”

나는 한마디로 잘난 척하느라고 이 빙의자 버프를 어떻게 해명할지 미리 생각해두는 걸 깜빡 잊고 말았다. 내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고 싶었다.

“네가 셈을 잘했다는 소리는 하지 마. 나는 네가 열 살 때까지 가산표를 못 왼 걸 알고 있으니까.”

가산표라는 말에 떠오른 기억에 따르면, 그것은 일종의 구구단 표였다.

아……. 오…….

내가 당황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아리엘사가 이 빛나는 남주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조금 되살아났다.

그 기억은 매우 긍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원작에는 없는, 엑스트라의 삶이자 기억이었다.

그러나 아리엘사의 즐거운 과거는 내 입장에서는 대체로 흑역사였다. 흑.

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이 위기를 벗어나야 했다.

“그, 그런 부끄러운 말씀을 하시는 게 어디 있어요!”

“…….”

그러나 카이런 공작의 눈에 담긴 순수한 의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리엘사. 지금까지 넌 네 무지를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나와 듣는 수업 시간에 언제부터인가 수틀을 가져와 수를 놓기 시작했던 걸 잊었나?”

허걱.

아리엘사는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빠져나갈 데가 없었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했다.

“수, 수놓으면서 다 들었어요! 손을 쓰면 집중이 더 잘 돼요, 공작님.”

“수를 놓으면서 수업을 들었다?”

내가 들어도 구리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카이런 공작은 심지어 비웃지도 않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너는 천재였군.”

나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공자가 네 살 무렵 첫 수업을 시작했을 때, 가정교사들은 그를 심각하게 걱정했다. 그가 창밖만 보며 수업 내용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놀이 친구로 들어온 아이들도 모르는 척했기 때문이다.

카이런 공자는 가정교사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기색이 없자, 지금까지 그가 말한 내용을 처음부터 똑같이 읊어버린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놀이 상대 아이들에게 관심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지적 능력의 격차 문제였다.

당연히 가정교사는 흥분해서 선대 공작에게 달려가 공자님이 천재라고 보고한다.

때마침 남자아이들이 어린 공자와 몸싸움을 벌이는 사태가 일어났고, 선대 공작은 고민 끝에 공자에게 놀이 친구를 붙여주는 걸 취소했다.

그에 공작 부인이 큰 우려를 나타내며 여자아이라도 붙여주라고 아리엘사가 선택된 것이었다.

그 뒤로 수업 내용은 카이런 공자의 수준에 맞추어서 개인과외처럼 진행되었다. 아리엘사는 공자의 수업 시간에 같이 들어갔지만 따로 기본적인 상식 수준의 숙제를 했다.

평범하고 소심한 여자아이가 천재와 같이 수업을 듣는데 지겨워져서 수나 놓은 것도 당연하다.

어쨌건, ‘천재인 내가 진짜 천재인 너를 못 알아본 거냐?’라는 비아냥이 담긴 말투에 나는 식은땀이 확 났다.

내 회피 스킬이 모두 실패해버렸기 때문에, 나는 뻔뻔함으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제가 계산을 못 하면 벌을 내린다고 하셨는데, 계산을 잘했는데도 질책하시면…….”

내가 살짝 울먹거리며 불쌍하게 말하자 카이런 공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썹 끝이 살짝 삐뚤어진 것으로 보아 약간은 자책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허리를 세우고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며 말했다.

“아리엘사. 포슬란 창고를 책임진 롬니 행정관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네가 그의 결백을 증명한 거다.”

“네……?”

그의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이게 단순한 재고관리 문제가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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