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원작의 아리엘사의 대사란 ‘공작님, 차 드세요.’ 정도가 다였기 때문에, 나는 평소 아리엘사의 말투나 행동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니 사다리에서 떨어진 후유증이라는 변명에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게오르그와 보내는 시간은 되도록 줄이고.
“아빠. 졸려요.”
“그래. 푹 자거라.”
“앗!”
내 이마에 가벼운 딱밤을 먹인 게오르그는, 찬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내 이불 가장자리를 꾹꾹 눌러주고 돌아갔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내 심장은 여전히 쿵쾅대고 있었다.
나는 이제부터 다른 사람인 척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작품에서는 다 설명되지 않은 이런 관계와 감정들 속에서 말이다.
나를 이렇게 아껴주는 좋은 사람이 어떻게 죽어버릴지를 안다는 것은 정말 찝찝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그렇다. 나는 게오르그 로크만이 원작 초반에 어떻게 죽는지 알고 있다. 카이런 공작에게 닥칠 위기도.
앞으로 이 성에는 많은 사건이 예정되어 있었고, 그것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뿐이었다.
여기서만은 나는 전보다 더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깨닫자 내 가슴에 더 낮고 둥둥거리는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두려움에는 아주 약간의 설렘이 섞여 있었다.
나는 이불을 정리하고 눈을 감았다. 어서 자고, 내일 최상의 피부 상태로 우리 남주를 만나고 싶었다.
❄❅❄
“북부 스타일, 마음에 안 들어.”
이른 아침, 옷장 문을 활짝 열었지만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옷장 안에는 여러 벌의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거친 모직물로 지은 옷들은 도톰해서 따뜻해 보였지만 모두 어둡고 칙칙한 색상이었다. 디자인도 하나같이 단순해서 이 옷과 저 옷이 다를 게 없었다.
게오르그가 이 성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진 가신인 것을 고려하면, 이건 아리엘사 본인의 취향 같았다.
소심하고 과묵한 엑스트라라고 패션 감각까지…….
“취향은 실리콘밸리 회장님 감이네.”
나는 아리엘사의 옷 취향을 비난하며 옷장 앞에 한참 퍼질러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다고 달라질 게 없어서, 나는 어제 입은 드레스와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는 다른 옷을 입고 출근했다.
카이런 공작은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곧은 자세로 책상에서 장부를 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님.”
나는 최대한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아리엘사라면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몸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사람을 보면서 다소곳하게 인사하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절에 가서 부처님 뵌다 생각하고…….
카이런 공작은 그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어제 나무에서 떨어졌다지? 돌아가. 체이어스가 무신경했군.”
나는 그가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건 아닌데, 예, 조금 그렇긴 한데…….”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하니까, 꼭 어릴 때 감나무에서 떨어진 동네 바보 같이 들렸다. 정확하게는 사다리에서 떨어진 건데.
나무에서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체이어스가 무신경하다는 부분은 맞았다.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바로 일하러 가라는 건 너무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했다가 아니라고 하며 중언부언하는 바람에, 나는 결국 진짜 나무에서 떨어진 동네 바보처럼 보이고 말았다.
나는 부드러운 광채에 휩싸인 주인공님을 바라보며 멍청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의 책상에는 가죽 장정의 두꺼운 책들이 쌓여 있었다. 조금 찌푸린 그의 표정으로 보아 무언가가 잘 풀리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남자 주인공으로서의 은은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고뇌하느라 약간 일그러진 미간은 그의 미모에 우수를 더해 주었다.
[카이런 공작은 주변으로부터 무관심하다는 평가를 듣곤 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철저히 무관심했으나, 일단 의미 부여한 대상에는 집요할 정도로 집중하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묘사한 카이런 공작의 모습이 저것이었구나.
활자를 통해 상상했을 때와 실제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바라볼 때의 감동은 비교할 수 없었다.
휴대폰으로 저화질 스트리밍 영상을 보는데 누가 그걸 뺏어가더니 80인치 초고화질 모니터를 들이밀어 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내 마음은 들떠서 그의 싸늘한 태도에도 불쾌감은커녕 심장이 콩콩 뛰었다.
저 사람이 바로 북부의 주인 카이런 공작이다. 미모와 무력으로 이 세계에서 따를 자가 없는 단 한 사람.
닫혀 있고 거칠어 보이지만, 한 여자를 위해 세상 끝까지 달려갈 수 있는 남자.
그를 눈앞에서 보다니!
나는 북받쳐 오르는 덕심을 억누르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그의 아우라의 영향력에 감겨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이미 그에게 반해 있었다. 내일 학원 아침반에 가야 하는데도 새벽까지 <눈 내리는 사막>을 다 읽고 잘 정도로.
그날 푹 자서 컨디션이 좋았다면 차선을 넘어 달려오는 차를 피할 수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저어 울적한 생각을 털어내며 카이런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어제 달아나버린 무례한 행동을 꾸중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공작의 성격상 그것은 그가 내 상태를 양해해 주어서가 아니라 내가 안중에 없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섭섭하긴 했지만, 눈호강에 들뜬 나는 비관적으로 되기가 힘든 상태였다.
그는 책장을 넘기며 약간 날카롭게 말했다.
“차.”
나는 아차 했다. 아리엘사는 <눈 내리는 사막>의 독보적인 차 및 다과 담당이 아닌가!
“네! 공작님.”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름다운 눈썹을 약간 삐뚤게 찌푸리며 ‘차.’ 하는 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이렇게 설렐 줄이야.
나, 나도 모르는 약간 삐뚤어진 성향이 있었던 걸까?
나는 혼자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차와 술이 놓인 콘솔 테이블로 갔다.
나란히 놓인 술병들은 내가 지금까지 보던 규격화된 병이 아니었다. 유리는 두껍고 탁했으며 모양과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안에 담긴 술이 비쳐 보이는 빛깔은 퍽 보기 좋고 멋스러웠다.
과연 여긴 다른 세상이구나.
나는 그 사실을 되새기며 차 상자로 손을 뻗었다.
나는 조밀한 양각 문양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상자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다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이곳이 정말로 <눈 내리는 사막> 속이라면…….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 밖으로 나갔다. 카이런 공작의 어이없는 시선이 다시 내 뒤통수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조금 후 내가 돌아왔을 땐 카이런 공작은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살짝 화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화가 나면 먼저 입을 다무는 사람이었다.
출근 첫날에 친 사고로 작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기는 도박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나는 최대한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찻잔을 들고 카이런 공작에게 다가갔다. 아름다운 짜증의 광채를 발산하는 그의 아우라에 정신을 팔지 않도록 최대한 집중하면서.
그의 책상에 김이 따뜻하게 올라오는 찻잔을 올려놓자 카이런 공작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무슨 짓이지?”
시녀가 어제는 주인 얼굴만 보고 달아나더니, 오늘은 차를 가져오라고 하자 달아나 버렸다. 그도 마냥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공작님 차 드세요. 시나몬 차입니다.”
카이런 공작은 의자에서 허리를 쫙 펴더니 짧은 한숨을 뱉었다. 그는 내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상당한 자제력을 쏟아붓는 중인 것 같았다. 큰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시나몬?”
나는 약하게 헛기침을 해 목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어제 제가 ‘사다리’에서 떨어진 건 사과파이를 만들어 드리려고 그런 건데요, ……공작님.”
내가 공작님이라는 말을 소리 내서 말해보게 될 줄이야! 나는 내적으로 몹시 흥분한 상태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내가 떨어진 데가 나무가 아니라 ‘사다리’라고 강조하고 싶었지만, 말하고 보니 그를 원망하는 것으로 들릴 것 같아 후회가 되었다.
역시 카이런 공작은 아예 의자에서 몸을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카이런 공작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 부주의를 내 탓으로 돌릴 셈인가?’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는 사과파이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에요.”
“내가, 사과파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확인하듯 단어를 딱딱 잘라서 말했다.
나는 카이런 공작이 화내는 중인 걸 알면서도 설레야 했다.
이 세계 최고의 남자가 지금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심장이 콩닥거리고 가슴 안쪽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내 최애 남돌이 나한테 화를 내도 기분이 상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기분?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이제는 화를 억누르지 않아서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는 모르고 너는 안다고, 아리엘사?”
“아닙니다, 공작님. 단지 공작님께서 사과파이보다는 거기 들어 있는 시나몬 향을 좋아하신 것 같아서요. 사과파이 말고는 단 걸 좋아하지 않으시잖아요. 한번 드셔보세요…….”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 웃음이 커졌다. 설레기도 하고, 좀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남의 비밀을 안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장차 카이런 공작은 황제의 음모에 휘말려 하르펠 성을 잃고 남부의 귀족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곧 여주의 아버지다.
그는 거기서 새 풍습과 음식에 적응하려 애를 쓰는 동안, 자신이 시나몬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과파이를 즐겼던 것도 거기에 살짝 뿌려지는 시나몬 가루의 향이 좋아서였다는 것도.
나는 그가 그것을 깨닫는 시점을 좀 앞당긴 것뿐이었다.
만 하루 동안 이 몸으로 살며 깨달은 바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집중하면 아리엘사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늘 선명하지는 않은데, 주로 그 상황과 연관된 것이었다. 지금은 그 덕에 주방에서 시나몬 가루를 찾아올 수 있었다.
나를 빤히 보던 카이런 공작은 한쪽 눈을 살짝 더 가늘게 찡그리더니 찻잔을 들었다. 그는 신중하게 향을 맡은 다음 한 모금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