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28)

2화

“흡!”

나는 내 입을 틀어막은 채 문으로 뒷걸음질 쳤다. 육중한 문은 내가 실은 체중만큼의 힘으로 나를 반격했다.

“어?”

문을 밀다가 얼어붙은 나는 1, 2초쯤 후에 이 문을 당겨서 열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동안 카이런 공작은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뒤통수를 태울 듯 따가운 시선으로.

나는 재빨리 문을 당겨서 열고 달려 나왔다.

육중한 문은 지독히 무거웠다.

❄❅❄

얼마나 잤을까, 나는 머리까지 뒤집어썼던 이불을 젖히고 빠져나가 내 방의 창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잠옷 차림으로 맞기에는 쌀쌀한 밤바람이 훅 불어 들어왔다.

희게 얼어붙은 것 같은 반달 아래 외성의 성곽이 보였고, 그 너머로 검고 거친 바다 같은 침엽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전형적인 북부의 자연경관이었다.

“으으으.”

나는 밤바람의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창을 닫았다. 그리고 웃었다.

“하하하. 꿈이 참 생생하다…….”

이 한기가 얼마나 생생하던지 이것은 꿈이 분명했다. 어제 새벽까지 <눈 내리는 사막>을 읽고 잤으니 이런 꿈을 꿀 수도 있다…….

하지만 웃음이 그친 내 입꼬리는 부들거렸다. 불길한 감각이 내 멱살을 붙잡고 흔드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추워!”

나는 창을 쾅 닫고 그대로 웅크리며 주저앉았다. 지금까지 어떤 꿈에서도 찬 바람이 뺨을 때리는 오싹함, 나무 문고리를 붙잡는 손끝의 투박한 질감 따위를 이렇게 생생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꿈이 아니야…….”

이제는 추위가 아니라 긴장으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 아리엘사의 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방은 성의 끝 쪽 고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작지만 깔끔했고,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부족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게오르그는 딸을 정말로 아끼는 것 같았다. 체이어스가 그를 두고 ‘바보 아빠’라고 한 말은 ‘딸 바보’를 뜻한 게 분명했다.

조금 울컥한 기분이 들면서, 다시 이것은 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 아빠는 나를 예뻐해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빠한테는 성적 좋은 언니가 최고의 자식이었다. 어렸을 때 놀이공원에 가도 아빠는 꼭 언니 손을 잡고 다니며 언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엄마 몫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보다는 어깨에 멘 간식 가방을 더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이 집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딸 바보 아빠가 생긴 꿈을 꾼 것은 아닐까?

하지만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여기저기 더듬어보았을 때, 그 생생한 현실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것은 꿈일 리가 없었다. 나는 소설 속 아리엘사에 빙의한 것이다.

거울 속에서, 그녀의 밀빛 머리카락은 게오르그와 달리 딱 보기 좋을 만큼만 구불거렸다.

눈코입은 오목조목한 편이었는데, 코가 조금 낮고 둥근 게 조금 아쉬웠지만 귀여운 인상이라서 불만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아빠를 닮아 사각턱에 우락부락한 체격을 가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키는 좀 큰 편이고 말랐는데 몸에는 은근히 볼륨감도 있어서, 이만하면 자체 발광 공작님 뒤에 서 있다고 누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아리엘사 로크만이라고…….”

나는 이제 아리엘사의 몸으로 살아야 했다. <눈 내리는 사막>의, 분량을 영혼까지 끌어모아도 한 페이지가 안 되는 엑스트라로.

아리엘사는 하르펠 공작가 기사단 훈련 대장인 게오르그의 딸로 공작의 시녀다.

어린 카이런 공자가 놀이 친구로 붙여준 남자아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해서, 여자아이라도 붙여주자며 들여보냈던 아이였다.

아리엘사가 남동생을 보살피듯 다정하게 대해서인지, 카이런 공자는 그녀는 사람 취급(?)을 해주었다.

그 인연으로 그녀는 어른이 된 지금도 공작의 시중을 전담해서 들고 있었다.

아리엘사가 카이런 공자를 다정하게 돌본 것은 아버지의 출세를 도우려는 효심 때문은 아니었다.

실은 그녀는 그런 계산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웠다.

그녀는 타고나기를 순하고 다정하며 성실했다. 그 까칠한 카이런 공작이 불평 없이 곁에 둘 만큼.

그러나 아리엘사가 원작에 등장하는 장면은 공작이 회의할 때 차를 내어 온다든가, 공작이 사냥 갔을 때 물을 떠 온다든가, 공작이 스트레스를 받아 예민해지면 간식을 만들어 온다든가…….

아,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비명을 지르며 체이어스를 불러온다든가.

어쨌든 아리엘사는 이 구역의 차 담당 단역이었다.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던져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특색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기왕이면 여자 주인공이면 어때서.’

내가 여자 주인공이었다면, 내 몸도 그런 빛으로 휩싸여 있었을까?

낮에 본 카이런 공작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검도 아니고 책상에 앉아 펜을 쥐고 있을 뿐인데도, 그에게서는 남성적인 매력이 아우라와 함께 발산되고 있었다.

가만히 떠올리면 심장이 콩콩 뛸 것 같은 그런 기운이었다.

그의 아우라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이 세계의 외부인인 나만이 말이다.

이곳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단지 절대적인 존재감, 혹은 은연중에 느껴지는 압박감과 같은 매력으로만 감지될 터였다.

그의 성격은 까칠했지만, 그거야 아직 여자 주인공을 못 만나서 그런 것이니까 봐줄 수 있었다.

<눈 내리는 사막>은 다시 생각해도 멋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제 새벽에 완독한 원작의 내용을 찬찬히 떠올리다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내가 여자 주인공으로 빙의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결론 내렸다.

<눈 내리는 사막>은 남주 피폐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남주를 처음부터 굴리고 또 굴린 작품이었다.

작가가 남주 혐오자냐는 댓글이 인기 댓글로 상단에 올라갈 정도였다.

나는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여주를 향한 한결같은 집념이 너무 좋았지만.

하여튼, 그래서 여자 주인공은 카이런 공작이 갖은 고생을 끝낸 소설의 중후반부에 가서야 그와 마음 놓고 꽁냥거릴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남주를 잘 만나지도 못하고 마음고생만 바가지로 하는 여주보다는, 매일 그의 곁에서 안구에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시녀인 게 낫지 않을까?

그렇다. 나는 내일도 나의 남주 카이런 공작을 볼 거고, 모레도 볼 거고, 글피도 볼 거고…….

세계관 최고의 남자, 북부 공작님을 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상태로 만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빙의자다. 카이런 공작에게 글로우 기능이 있다면 내게는 원작의 지식이라는 무기가 있다.

나는 그것으로 카이런 공작에게 게오르그나 체이어스보다 훨씬 더 특별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었다.

‘여기서는 나도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내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두근거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이 소설 속 세상에서는 나는 나라면 껌뻑 넘어가는 아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서라면 절대 만날 수 없을 멋진 남자에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줄 수도 있었다.

진짜 우리 아빠에게 조금 미안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기울어져 있었다.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몰랐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살길을 찾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해보자…….”

내가 그렇게 결심하며 중얼거릴 때 노크 소리가 났다.

-아빠다.

죄지은 사람처럼, 갑자기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나는 애써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온 게오르그는 이제는 제법 심각한 시선으로 나를 살펴보았다.

“너, 집무실에서 달아났다면서? 공작님도 그걸 방금에야 말씀해주시다니!”

“아…….”

나는 슬금슬금 이불을 끌어당겼다. 소설 속 세상에서도 아빠 잔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너, 아빠 보고 비명 지르더니 혹시 공작님 앞에서도 그랬냐?”

“아니, 아니요.”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의자를 가져와 내 침대 옆에 앉더니, 기둥 같은 팔을 내밀어서 내 이마를 짚었다.

그는 손바닥도 묵직했다. 그리고 몹시 따뜻했다.

“열은 없구먼.”

“괜……찮아요.”

나는 다시 내 이마에 와닿은 그의 체온이 어색해서 조금 더듬고 말았다.

“그런데 왜 그랬어?”

“사, 사과파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생각이 나서…….”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변명인데, 그럴듯했다!

게오르그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양이었지만 눈동자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머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봐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커다란 남자가 진심으로 겁먹은 기색을 드러내니 퍽 안쓰러웠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다음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기도 부끄러워서 그냥 돌아왔어요. 아, 아빠.”

그는 내가 ‘아빠’라고 부르자 안도하듯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의 눈은 걱정과 두려움에 차 있었다.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우려가 분명했다.

아리엘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남자가 얼마나 불행해질지, 말 안 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딸 바보 소리가 듣기 민망해서 입으로만 툴툴대는 츤데레 딸 바보였다.

어쩐지 그와 눈을 맞출 수가 없어서, 나는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머리 위에 척 내려앉았다.

“장점이라고는 튼튼한 것밖에 없는 녀석이. 걱정시키지 마라.”

나는 최대한 소심하게, 이불 속에서 속삭이듯 대답했다.

“조금씩 나아질 거예요, 아빠……. 조금씩…….”

그러자 그는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이제는 다른 이유로 두려워졌다.

내가 진짜 아리엘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마도 그가 가장 먼저 알아챌 터였다.

저 팔뚝으로 나를 붙잡고 흔들면서 내 딸 어디 있느냐고 위협할 걸 떠올리니 숨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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