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작님 차 드세요.
눈을 떴을 때, 나는 잔뜩 찌푸리고 있는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짚은 거구의 아저씨와.
“꺄아악!”
내가 비명을 질러대는 동안, 그는 못마땅한 듯 팔짱을 꼈다.
그리고 일부러 기른 것인지 자란 것인지 모를 짧은 턱수염을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멀쩡하군.”
“앗! 으으으…….”
그는 굵은 팔뚝을 들어 내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너무 아파서 비명이 뚝 그쳤다.
“아빠 얼굴 보고 비명 지르는 건 젖먹이 때 그만큼 했으면 됐지!”
‘아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색할 정도로 곱슬곱슬한,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턱도 어깨도 너무 발달해서 네모나게 보일 정도인 근육질의 남자가 내 아빠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소리에 온몸의 솜털이 다 튀어나와서 서는 것 같았다.
나 분명히 학원에 가다가…….
하지만 아장거리는 아기도 아니고, 성인 여자를 납치해서 딸 삼으려는 변태가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긴 다음 덜덜 떨었다.
그는 내 꼴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괜찮아?”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듯 소리쳤다.
“아저씨, 살려주세요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키 큰 젊은 남자가 들어왔지만, 내 ‘아빠’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지, 지금 아빠를 못 알아보는 거냐, 아리엘사?”
그러자 젊은 남자가 끼어들어 말했다.
“아리엘사가 평소에 숨긴 속마음이 튀어나온 거죠. 아리엘사도 그렇지만, 기사들도 게오르그 경이 하르펠가의 훈련 대장이 아니었으면 할 겁니다.”
그가 농담을 하는 것 같긴 한데, 말투가 워낙 냉랭해서 조롱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닥쳐, 체이어스.”
그는 계속 나를 향해 말했다.
“아리엘사. 너 온실에서 사과 따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잠깐 기절한 것뿐이야. 그런 걸로 아빠를 잊어버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너 일곱 살 때까지 만날 나무에서 떨어졌어!”
내 머릿속에서는 낯선 이름들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아리엘사, 게오르그, 체이어스, 하르펠 가문…….
“사과요?”
“그래. 카이런 공작님이 드실 사과파이 만들 사과!”
카이런 공작?
헉…….
그때 젊은 남자, 체이어스가 내 침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리엘사, 공작님께서 찾으신다. 이 기회에 바보 아빠와 연을 끊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네가 가봤으면 좋겠는데. 공작님께서 좀 예민하시다.”
“흠…….”
게오르그는 너무 굵어서 잘 얽히지도 않는 팔로 다시 팔짱을 끼며 나를 의뭉스럽게 쳐다보았다.
체이어스의 태도는 냉랭했고 그는 빨리 나를 데리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망치려면 이 둘을 먼저 방에서 내보내야 했다. 그러려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은지 떠올리려 했지만, 내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저, 전…….”
“안 되겠군. 의사 선생을 다시 불러와야겠어!”
의사가 나한테 이상한 약이라도 주면 큰일이었다.
게오르그가 공중으로 손을 휘저으며 흥분하기에 나는 재빨리 말했다.
“아, 아, 아빠. 괘, 괜, 찮아요!”
처음 보는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는 건 끔찍하게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격렬히 더듬으며 말하자, 게오르그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안도했다.
“이놈이. 사람을 얼마나 놀라게 하려고 그래!”
나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 변태적인 납치범들의 설정에 동조하고 말다니.
“진짜냐? 의사 선생이 긁힌 데 하나 없다고 하긴 했다만.”
“네. 놀라서, 떨어져서 놀라서 그랬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얼마나 놀라면 아빠를 못 알아봐?”
그는 다시 딱밤을 먹이려는 듯 커다란 주먹을 내 쪽으로 쳐들었다.
저 주먹에 맞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거북이가 목을 집어넣듯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내 머리 위에 커다란 손바닥을 얹더니 아플 정도로 문질렀다. 머리카락이 다 헝클어질 정도였다.
나는 그의 애정 어린 동작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우리 아빠도 나를 이런 식으로 예뻐해 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게오르그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견딜 만하면 가서 공작님 시중을 들어드려. 오늘은 특히 심기가 좋지 않으시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면…….”
“어서 가자, 아리엘사.”
체이어스가 다시 재촉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게오르그의 눈치를 보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문밖으로 나가서 낯선 복도를 보며 멍하니 서 있자, 체이어스가 나를 내버려 두고 앞서갔다.
그를 따라 끌려가는 죄수처럼 성의 복도를 걸으니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이곳은 성이었다. 평생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중세의 성.
이 사람들은 나를 포함한 서로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고, 나는 이 모든 이름이 한 번에 나오는 곳을 알고 있었다. 상황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었다.
나는 머리를 마구 저었다.
“어딜 가?”
어느 문 앞에 멈춰 선 체이어스가 혼자 걸어가는 내게 신경질을 냈다.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검은 문을 보며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는 문을 열고 내 등을 방 안으로 떠밀어 넣었다.
쿵.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가벼운 쿵 소리와 함께 내 심장도 뚝 떨어졌다.
헉.
내 숨은 그렇게 멈추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를 가진 건장한 남자가, 책상에 살짝 인상을 쓴 채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남자는 빛나고 있었다. 핀조명을 받은 것처럼 밝은 것이 아니라, 밤에 켜둔 무드등처럼 은은한 빛이 그의 전신으로부터 스며 나오고 있었다.
마치 심해에 사는 발광 해파리처럼.
그의 몸을 휩싼 공기는 특별했다. 매혹적이었으며 신비로웠다. 보는 사람의 넋을 저절로 놓게 하는 그 아우라는,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내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자, 그가 내 시선이 거슬린 듯 고개를 들었다.
“흡.”
그가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은 맑은 호박색의 눈을 들어 나를 스쳐보았을 때, 나는 작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를 감싼 아우라는 그의 섹시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나, 쭉 빠진 콧등의 선, 굳게 다물린 입술, 남자다우면서 정갈한 턱선 따위, 그리고 딱 벌어진 어깨와 펜을 쥔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팔뚝 같은 것들을 그저 돋보이게 도울 뿐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내 눈을 마구 비볐다. ‘이건 꿈이야!’라고 마음속으로 절규하며.
그러나 그는 내게 흥미를 잃고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리엘사, 할 말 있나?”
약간 예민한, 저음의 냉정한 목소리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연이은 상황에 너무 놀라서, 그가 상당한 신경질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나는 당황한 채로 방 안을 둘러보다, 벽에 장식된 낡은 방패에 시선을 고정했다. 북부를 다스리는 하르펠가의 수사슴 문장이 새겨진 방패에.
‘모, 모든 게 완벽해.’
나는 겁에 질려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내 이름 아리엘사.
북부의 성. 그리고 카이런 공작.
그 외 등장인물까지.
내 ‘아빠’ 게오르그는 하르펠가의 가신으로, 그 강력한 무력과 지구력으로 ‘하르펠의 방패’라 불렸다.
그리고 나를 이 방에 밀어 넣은 인정머리 없는 기사 체이어스는 공작의 오른팔이자 ‘하르펠의 여우’라 불리는 책사였다.
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눈 내리는 사막> 속에 들어와 있었다.
“…….”
나는 입술을 달달 떨면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쥐어짜듯 불러보았다.
“고, 공작님?”
내 부름에, 카이런 공작은 얼굴에 짜증을 드러내며 펜을 놓고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 정말로 북부의 주인 카이런 하르펠 공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