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502)화 (502/504)

외전 17화

“벌써 마흔다섯이나 먹은 놈이 아직 철도 들지 않아 온종일 밖에서 빈둥빈둥 놀러만 다니고 있어! 아 참, 이번에 나갈 때 또 네가 돈을 쥐어준 게냐?”

고하는 하나뿐인 아들을 생각할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아니요, 아니요. 제가 챙겨드리지 않았습니다…….”

엽 씨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심스레 추측해 말했다.

“아마도 상공이 예전에 남겨 둔 것 같아요.”

시어머니가 상공에게 돈을 쥐어주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는데, 자신이 어찌 겉으로만 복종하는 척 하고 뒤에서 몰래 챙겨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잘했다. 우리 집안은 아직 일어서려면 부족한 것이 많아. 아해(阿海)도 계속해서 더 공부에 매진해야 하지 않느냐. 앞으로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데 들여야 하는 돈이 적지 않을 테니, 이제는 돈을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돼.”

고하가 다시 한번 경계하여 말했다. 

아해는 그녀의 큰손자로 올해 25살이 되었는데, 수재에 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어린 손자는 20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현시에만 겨우 합격했을 뿐, 부시는 아직 몇 번이고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서당에서 계속 공부를 해야 했는데, 보아하니 집안에 문인이 될 자질은 이 아이 하나뿐이라 온 집안의 기대가 큰손자에게 달려 있었다.

“어머님, 알겠습니다.”

큰아들 얘기에 얼굴이 확 밝아진 엽 씨가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어제 아해의 처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신아(信儿)가 당시를 벌써 세 편이나 다 외웠다고 합니다. 보아하니 이 아이도 앞으로 공부를 시키면 잘할 것 같습니다.”

신아는 고하의 맏증손자로 갓 3살이 되었고, 지금은 며칠 동안 부모를 따라 외갓집에 건너가 지내고 있었다. 

고하는 임씨 가문의 풍수적인 문제인지 잘 모르겠으나 이 집안에서는 사내아이를 낳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남편도 독자(獨子)이고, 자신 역시 외아들뿐이었는데, 이 뒤로도 임씨 집안에서 사내라고는 손자 둘에 증손자 하나가 다였다. 큰언니 고연의 경우, 손자가 일곱인 것과 비교하면 그 수가 매우 적었다.

“신아는 정말 좋은 아이다. 너랑 아해의 며느리가 잘 가르쳐 보거라. 절대로 응석받이로 자라게 하면 아니 된다.”

고하는 이 대목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친정집을 좀 보거라, 내 동생은 얼마 전에도 전각이를 데리고 나가 밭에 채소를 가꾸더구나. 내가 가서 보니 전각이가 하루를 일하고도 손에 물집도 잡히지 않고 괭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일을 한 지 제법된 것 같더구나. 내 동생네를 보고 우리 집과 비교해 보니 정말…….”

“외숙부님 댁은 가정교육이 아주 엄격하다고 들었는데, 역시 그래서 그 집안에 인재가 많은 것이었군요.”

고청운이라는 이름이 한 번만 언급되어도 엽 씨는 경외감에 찬 얼굴을 하고는 했고, 고하를 바라보는 눈빛도 몇 배나 더 공손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인이었는데, 당초 그녀가 임씨 집안과 혼담을 나누고 있을 때 임계송은 아직 동생의 신분이었다. 만약 당시 경성에서 벼슬을 하던 고청운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임씨 집안으로 시집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좋지 않았다. 상공이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시험을 보았는데도 아직 동생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고, 지금 당장 수재에 합격한다고 해도 그다지 장래성이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다행히 고청운의 관직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들 집안은 그래도 그 덕을 좀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두 언니에 비하면 그녀는 상공의 장래성이 없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친정보다 낮은 집안으로 시집을 간 셈인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공은 별로 좋지 않지만 자신의 시어머니는 좋은 분이었다. 적어도 시어머니가 있으니 상공이 지금이야 밖에서 분수를 지키지 못하며 지낸다고는 해도 집안은 그런대로 깨끗하고 별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서자, 서녀 문제 하나 없으니, 이런 점은 자신의 언니들보다는 훨씬 덜 번거로웠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참 잘 되었구나. 아이들이란 자고로 어려서부터 교육을 해야 하지. 때려야 할 때는 매를 들고, 칭찬을 해 주어야 할 땐 또 칭찬도 해 주면서 말이다.”

고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녀의 부모님 두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친정은 여전히 그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고 있었고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저력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이미 아들에게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그가 수재나 거인까지 합격하는 것은 이젠 바라지도 않았고, 단지 분수에 맞게 안락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가 밖에서 함부로 하지 않고, 집안에 폐만 끼치지 않아도 다행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잘못은 만회할 수 있었는데, 그녀의 큰손자가 보아하니 인재가 될 재목이었던 것이다. 그는 고지식하게 단정하고 예의가 바르게 자랐고, 그녀의 증손자 역시 어릴 때부터 가르쳤으니 그녀의 아들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엽 씨는 고하가 계란찜을 다 먹자 그녀가 입가심을 할 수 있도록 숭늉 반 그릇을 떠왔다.

* * *

이후 두 고부는 집안일을 시작했다. 임가(林家)의 가업은 적지 않았다. 고하가 임요조에게 시집갔을 때 임가는 200묘의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임요조의 솜씨와 그들이 가꾼 과수원에 의지하여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제철 과일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을 열어 과일을 밀전(*蜜饯: 꿀에 절여 건조시킨 과일)으로 가공하기도 했다. 

임산현이 수로 쪽 교통이 편리했던 덕에 그들의 장사도 꽤 잘 되어서 계속해서 더 많은 가산이 불어나게 되었는데, 집안에서 보유한 논밭 면적만 넓힌 것이 아니라 현성과 부성에 위치한 점포나 저택 등도 구입하여 그중 몇 칸은 세를 받고 있었다. 

집안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하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의 정력이 점점 부족해지는 것을 느끼고 비로소 점차 엽 씨에게로 그 대권을 조금씩 물려주고 있었다. 다만 엽 씨가 너무 온화한 성미 탓에 어떤 일은 잘 돌아가지 않을까 봐 가끔 옆에서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막 집안일로 몇 마디 대화를 하고 있는데, 마침 한 하인이 흥분한 채 다가와 고택에서 사람을 보내왔다고 전했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전해라.”

엽 씨는 고하를 힐끗 보더니 다급하게 재촉했다.

고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음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 전에 마차를 타고 임계촌을 다녀왔기에 남동생이 이렇게 빨리 사람을 보내올 일은 없을 터인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자신도 모르게 옷자락 한쪽을 움켜쥐었다.

엽 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씨 집의 집사와 함께 약 15살의 푸른색의 옷을 걸친 어린 사람 하나가 하인의 안내를 따라 들어왔다. 고청운은 고하의 집으로 자주 사람을 보내 물건을 배달해 주고는 했기 때문에 임씨 집에서는 고씨 집안의 하인에 대한 대접이 좋았고, 기본적으로 주인이 집에 있다면야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둘째 고모할머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이어서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소상히 밝혔다.

“……내 동생이 상경을 하게 되었다고?”

고하는 동생이 임계촌에 남아 노후를 보낼 줄 알았지, 귀경(歸京)할 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이곳에 온 사람은 고씨 가문의 집사 아들로, 엽 씨는 고택에서 온 이를 감히 홀대할 수 없어 고하가 놀라 있는 동안 그의 말꼬리를 붙잡고 몇 마디 더 잡담을 나누고, 또 적지 않은 사례금을 쥐어준 후에야 이 작은 종을 물러가게 했다.

비록 집안의 하인을 시켜 몇 마디 간단한 말을 전했을 뿐이었지만, 고하는 이번에 고청운이 반드시 상경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동생은 시간이 나면 와서 이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자신이 올 수 있도록 미리 말을 전한 것이었다. 

‘이렇게 다시 이별이라니, 우리 나이를 생각해 보면…… 이번 생애에 우리가 다시 만날 수나 있을까?’

“외숙부댁 분들께서 왜 이리 갑자기 상경하게 되었을까요? 이전에 어르신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엽 씨도 이 말을 듣고 놀랐는데, 자고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귀향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이다. 지금 고청운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귀향을 한 것이기에, 모두들 그가 고향에서 노후를 보낼 준비를 하고 완전히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엽 씨는 고청운 일가가 상경하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았다. 고씨 가문이 임산현에 있어야만 그들 가족 역시 당당하게 커다란 큰 나무를 등진 셈이 될 것이고, 아이들도 수시로 문안하러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경성에 가버리게 되면 아무래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 연락하는 것조차 수월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속으로 품은 생각도 좀 있었는데, 자신의 아이들 중 누군가라도 고청운의 눈에 들어 공부할 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한 발짝 더 물러서서 만약 제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자신의 아이와 고씨 가문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정을 돈독하게 나눌 수만 있다면 훌륭할 것이었다. 정 많은 외숙부와 정이 들지 않은 외숙부의 존재감이 같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시어머니는 이미 늙었는데, 이분마저 세상에 없게 되면 고청운과 가장 큰 관계에 놓여있던 사람이 이 집안에 더는 없게 될 터였다. 자신의 상공 성정으로 미루어 보면, 그에게만 기대서는 고씨 가문과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들 일가의 야심찬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곳 중 가장 크게 기댈 곳은 어디일까? 그녀는 이 점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고하는 엽 씨가 멍해져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매우 언짢아 엽 씨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곧장 노성을 내질렀다.

“어서 임계촌으로 갈 채비하지 않고 뭐하는 게냐! 마차를 준비해라, 내가 임계촌으로 가야겠다.”

하인은 고청운이 며칠 후면 상경할 예정이라며 고하에게 시간이 나면 자신의 집으로 와서 한 번 모이자는 말만 전했을 뿐이었다.

고하는 기다리지 못하고 바로 고청운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갑자기 임가 전체가 들썩였다. 하인을 시켜 임요조를 데려오게 한 두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임계촌 쪽으로 말을 달렸다. 

* * *

가는 도중에 고하는 임요조의 위로에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지나는 길만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남들이 보기에 자신이 매우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한평생 누리는 영광은 대부분 자신의 친동생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집과 교류를 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 뒤의 친정집 덕분으로, 그녀는 이 때문에 그들의 호의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점을 단 한 번도 잘못된 것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때때로 그녀의 어린 시절의 일을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의아해지는 점도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동생은 자신에게 줄곧 잘 대해 주었다. 설령 먼 경성에서 지내고 있다고 해도 춘절이니 하는 온갖 명절에 보내오는 선물도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신으로도 계속 연락을 해 오고 있었는데, 동생은 겉으로는 그들 자매를 똑같이 대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녀는 큰누이의 대우에 비해서 자신에게는 그다지 친밀하게 굴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어릴 적 일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는 어찌 된 일인지 아주 어렸을 적 일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서 누가 하는 농담을 들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그녀는 어디서 어른들의 말을 어렴풋이 알아듣고 이를 진짜인 줄 착각하여, 큰동생이 요절한 이유가 고청운의 탓인 줄 알고 옳지 않은 행동을 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총애를 빼앗아간 그 동생이, 존재를 미워하게 만들었던 그 동생이 훗날 이렇게 많은 도움을 자신에게 줄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은 결국 그 흔적을 남기는 법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일을 남들보다 더 잘 기억하고는 했는데, 동생도 그러했다. 지금 자신과 동생의 사이가 좋은 것은 동생이 이 일을 벌써 잊었거나 오래전에 이미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일부러 추운 날 동생이 덮은 이불을 들춰내서 그를 저세상으로 보내버리려고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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