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육훤은 무엇인가를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도 전에 모친을 여의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전장에서 나가 있었고 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서 잘 뵐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증조할머니에게 떠맡겨져서 자라게 되었다.
말이 맡겨졌다는 것이지, 그는 그 어린 마음으로도 증조할머니가 결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둘째 할아버지 댁의 사촌 형이었다. 거기다 증조할머니는 늘 부친과 할아버지의 험담을 하고 다녔고, 그들이 불효자라며 떠들어 댔다.
너무 어렸던 육훤은 연약했고 더군다나 알게 모르게 홀대를 받고 자라게 되면서, 5살 무렵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졌고 남들과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게 변하게 되었다. 그는 늘 이 큰 저택의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들이 자신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가장 친근한 유모는 자신을 노상 끌어안고 다녔고, 자신에게 자꾸 사촌 형이랑 잘 지내라고, 또 증조할머니와 둘째 할아버지에게 효도하라고 하고는 했다.
사촌 형이란 사람은 늘 자신을 업신여기고 괴롭혔는데, 육훤은 그가 자신의 장난감을 빼앗거나 망가뜨려서 조금도 좋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유모는 늘 사촌 형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며 사촌 형을 잘 따라야 비로소 증조할머니가 자신을 좋아해 줄 것이고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좋아해 줄 것이라며 그래야만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후일,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육훤은 망연자실해서 그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몰라 힘들어했고, 또 사람들을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어했다. 그때, 마침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키가 매우 크고 또 체격도 건장했기에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고, 아버지가 눈살이라도 찌푸리면 긴장하고는 했다. 아버지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안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증조할머니마저 자신에게 자애롭게 대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 빙그레 웃게 되었다.
그때의 그는 비록 어렸으나 아주 예민한 정서를 지니고 있었기에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도 아버지가 자신을 매우 좋아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나, 아버지가 그렇게 오랜시간 자신을 떠나 있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아버지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그를 스승님 앞으로 데리고 갔다.
스승님이라는 분도 키가 커서 자신이 머리를 들어야만 겨우 그의 얼굴이 보이고는 했는데, 증조할머니 쪽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매우 화기애애해 보여서 육훤은 덜 긴장할 수 있었다.
그 후의 날들은 그의 기억 속에서 아리땁게 기록되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비로소 점점 더 활발해지고, 강해졌으며, 아버지도 그런 자신을 나날이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뭐든 다 알고 있는 스승님을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자신을 단 한 번도 꾸중한 적 없이 오히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는 처음에는 스승님을 두려워했으나 이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길게 갈 수 없다고, 2년 후, 스승님은 회시에 참가해야 했고, 그 또한 아버지의 부임지로 따라가느라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결코 스승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스승님도 스승님의 인생을 살아야 하고, 자신의 일을 건사해야 하기에 늘 같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 한 가지 변화가 더 있었는데, 바로 아버지가 처를 새로 얻어 자신에게 계모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매우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계모가 생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가 들은 소식은 모두 좋지 않은 것 일색이었다. 특히 증조할머니는 자신이 계모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라며 늘 자신을 껴안고 울고는 했다.
이에 그의 마음은 온통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차버렸고, 아버지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졌다.
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분이라, 그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소보야, 걱정마라. 네 미래의 어머니는 현명하신 분이다. 그녀가 너를 돌봐주면 아버지도 안심할 수 있게 될 게야.”
육훤은 하고 싶은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은 자신은 이미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을 필요가 없이 자기 스스로를 보살필 줄 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옷 입고, 밥 먹고, 씻는 것들을 혼자서 다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다 스승님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가 아직 이렇게나 젊으니 새로운 처를 맞이하는 것이 당연히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후부에는 새로운 여주인이 필요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새로 얻으셨으니, 어머니께서도 아버지를 잘 돌보아 주시겠군요.”
결국 그는 이렇게 한마디 답한 뒤, 아버지의 허벅지를 꽉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소보는 겁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생겨서 저를 잊으실까 봐 겁이 나요. 아버지께서 이젠 저를 더 필요로 하지 않으실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그는 이 마지막 한마디를 하고 나서 계속해서 말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자신이 정말 총명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당시 아버지의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던 표정을 기억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아버지는 담 씨가 후부의 문으로 입성하기 전에 먼저 그를 후부의 세자로 봉하는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 * *
계모가 집안에 들어오고 난 후, 육훤의 생활에도 약간의 변화가 찾아왔는데, 이전에 그와 아버지 두 사람뿐이던 집에 갑자기 한 사람이 더 생겼고, 그녀가 함께 데려온 하인과 물건이 더해졌던 것이다. 여기에 그녀는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만들었으니, 이 모든 요소는 그를 불안에 떨게 만들 만한 요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비록 스승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아버지를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고는 하나, 때때로 그는 여전히 불쾌감을 느꼈다. 특히나 경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남쪽 지역에 위치한 월성(越省)에 와서 지내게 되자, 이러한 느낌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스승님 댁의 작고 희고 통통했던 소석이를 떠올려 보았다.
‘스승님 댁에서의 소석이는 분명 자기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자 눈치 보며 애쓸 필요가 없겠지?’
그들 부자 두 사람의 사이가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스승님은 심지어 소석에게 목말까지 태워주고는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은 아버지와 대화를 할 때조차 여러 번 심사숙고해야 했던 것이다. 특히 계모 쪽에 대해서까지 고려를 해야 했다. 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는데, 안채에서 계모의 위치는 너무나도 유리했고 또 세력도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좀 나았던 건 자신은 아버지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스승님도 일찍이 아버지가 마음속에 다 계획한 바가 뚜렷한 분으로, 이성적인 면을 잘 유지하고 있으니 자신이 무슨 엉뚱한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아버지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감싸줄 거라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말을 믿었지만 좋은 나날은 얼마 지속되지 못했는데, 바로 계모가 회임하게 된 것이었다.
계모와 그녀가 데려온 하인들이 기뻐하던 그 표정, 그리고 아버지마저 이 소식에 반색하시는 것을 보고, 육훤은 모두가 이 아이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다만 육훤의 주변 측근들만이 불안해하며 계모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여자아이이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당시 육훤은 스승님과 서신 왕래를 줄곧 유지하고 있었는데, 비록 스승님과는 2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지냈지만, 인연 때문인지 그의 짧은 생애에 있어서 스승님이 남긴 영향은 매우 강렬했다. 그는 스승님의 흔적을 어찌해도 잊을 수가 없어서 스승님에게 크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계모는 총명한 사람이라 그에게 줄곧 잘 대해 주었는데, 아버지는 너무 가깝지도 또 멀지도 않게 정당히 그를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매우 만족했고, 그녀에 대한 태도 역시 점점 달라져 갔다.
육훤은 자신이 조금 경박해지면 또 불안해져서 다시 스승님에게 서신을 썼다. 사실 그가 스승님 말고 누구에게 이런 서신을 쓸 수 있겠는가. 예전에 알고 지내던 벗들? 그들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다. 그러면 그의 사촌 형이나 숙부님네 사람들? 그 사람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이나 하지 않으면 감사한 사람들로 전혀 믿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오직 스승님만이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런 확신은 그의 모든 직감이 그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었는데, 혹은 스승님과 만난 시기가 그의 인생에 있어 너무 절묘하여 그로 하여금 이런 의존성을 갖게 한 것일지도 몰랐다…….
* * *
안절부절못하게 지내던 어느 날, 육훤은 갑자기 자신이 당면한 상황에 대해 납득이 가기 시작했고, 이대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동생을 출생을 아무리 두려워해봤자 소용이 없었는데, 경성을 떠나기 전 스승님이 자신에게 언질을 주었듯이 그 동생은 어차피 자신보다 몇 살 아래 태어났을 뿐이지 않은가. 그는 스스로 계속 뛰어넘을 증명을 해야 했다. 심지어 그에게는 타고나면서 얻게 된 적장자라는 우수한 혜택이 이미 주어진 형국이니, 자신이 실력을 겸비했음을 계속해서 증명해 낸다면 아버지가 어찌 자신을 버리고 동생에게 가겠는가?
지금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발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는데, 나중에 장성했을 때 자신만 잘하면 그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상황에 맞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안채의 일에 몰입하고 있을 때가 아니고, 계모와 맞서 백방으로 아버지의 관심을 쟁탈해야 했다.
계모를 둔다는 것은 계부가 생기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정말이지 좋은 사람으로, 그들 부자간의 관계 역시 지금껏 줄곧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 * *
그는 그렇게 서서히 성장해 나갔고, 드디어 월성에서 스승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다만 그는 옷을 입고 다니기 싫어하는 벌거숭이 소석이 때문에 좀 불편했을 뿐이었다.
흥, 그는 꼬맹이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자신 역시도 소석을 고깝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고 됐다 싶어 스승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스승님 앞에서는 소석에게 잘 대해 주었다.
이렇게 지내면서 그는 꼬맹이가 정말 귀엽다고 여기게 되었고, 나중에 다시 이별을 해야 할 때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랐다.
그 후로도 육훤은 아버지와 지내면서 계속해서 기마궁술을 익혀나갔고, 황립 서원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이복동생과도 겉으로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비록 자신에게도 동생이 생기긴 했지만, 자신과 자신의 동생과의 관계가 소석이들과의 관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도 같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어서 그런 듯했다. 혹은 후부에 존재하는 세습이 가능한 불변의 작위에 대한 유혹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는 너무나도 안정적으로 세자라는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 * *
그는 그렇게 성혼을 하고 아들과 처를 갖게 되었는데, 그의 처는 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규수로, 아주 여유작작하게 자신의 계모를 상대할 줄 알았다. 이렇게 안채의 일은 더 이상 그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에 이때부터 관직 생활에 있어 온 전력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후부의 세자이며 아버지에게 직접 가르침을 얻어 성장한 그는 집안의 일부 세력을 자신의 관직 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는 출발점이 소석이 등에 비하면 훨씬 좋았던 반면, 소석은 자신과 달리 과거 시험에 고군분투하며 매우 고생이 큰 준비 기간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