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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생활 (497)화 (497/504)

외전 12화

잠깐 서로 인사를 나눈 공주는 사장정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고, 원래는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었으나 잠시 같이 걷자고 했다. 

‘같이 좀 걷자니?’ 

사장정은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주변의 어떤 사람들은 놀라며, 또 공주가 어찌 그런 제안을 했는지 궁금해했다. 

사장정은 공주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나중에 그때의 일을 되짚어 보니, 사실 두 사람 모두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고 그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집안 배경과 어릴 적 강소성 절강 지역에서 살았으며, 그곳의 풍토와 인심 그리고 자신이 어렸을 때 나무 타기를 좋아했던 것까지 다 말하고 말았다!

밤에 침상에 누워서 이를 회상할 때, 사장정은 안락공주가 황제가 직접 가르친 똑똑한 공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녀는 사람됨이 총명할 뿐만 아니라 마음 놓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 

공주는 외모가 뛰어나지 못했지만 정말 똑똑했고, 고청운처럼 지식이 깊어서인지 태도가 친절하고 대화가 잘 통했다.

* * *

그 다음 날부터 그는 점차 안락공주를 조금씩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저 이것이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차츰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아버지마저 관련된 일을 묻기 시작했다.

“말해 보아라, 너 안락공주와 무슨 사이인 게냐?”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를 서재로 불러서 욕하지 않았고, 의심스러운 듯이 내막을 묻기 시작했다.

사장정이 아버지의 찌푸린 미간을 보며 답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우연히 마주쳐 말을 걸었을 뿐인데. 제가 무슨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라도 하는 줄 아셨습니까?”

별반 출세가 없는 귀족 자제들에게 공주 등과 혼인하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특히 태자가 즉위하면 안락공주의 아이가 일반인보다 더 잘 출세하고, 더 쉽게 공훈을 세워 가업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사실에는 모두들 이견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 생각을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공주의 남편이라도 되면 황제가 큰형님의 작위를 빼앗아 자신에게 작위를 물려주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는 듯했다.

사장정은 남몰래 눈을 뒤집었다. 폐하의 태도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았기 때문이었다. 큰형님이 계모의 손아귀 속에서도 끝까지 세자의 자리를 지키고 아버지와 할머니의 환심을 사는 것은 아버지만의 관심사일 뿐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그는 외조부모의 영향을 받아 이 작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어차피 그는 큰 포부가 없었고, 지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송죽서재가 날로 번창하고, 고청운의 화본의 영향으로 장사가 잘되어서 이 서재가 기사회생하여 이윤이 다달이 높아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혼수를 일부 돌려주었다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운용할만한 돈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서재의 수입을 계산해 보니 이제 겨우 소득이 있다고 할 만한 정도였다.

아버지의 추궁에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이 안락공주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사실 그는 예민한 성정이라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는데, 공주가 자신을 남달리 대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 * *

이 일이 있은 후 그의 생활은 점점 괴로워지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공주의 남편이 되고자 계획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자신이 눈에 거슬렸는지, 자신에게 은연중 덫을 걸려고 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외모를 팔아넘기고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중양절까지 이런 날들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그는 나들이에서 다시 한번 안락공주를 마주치게 되었다. 먼저 함께 산책을 하자고 요청하는 공주를 마주하고 또 그녀 주변에 빼곡히 둘러싼 소년, 소녀들의 의심 어린 시선을 보자, 그는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여 머리가 뜨거워지고 기분이 매우 나빠졌다. 이에 이번에는 공주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사장정이 그 말을 꺼내자마자, 공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이런 공주의 모습에 그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쾌감이 스쳤다. 그가 당시 느낀 심정은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그는 순간 후회가 되고 불안해져서 안절부절못했다.

* * *

그는 송죽서재에서 며칠을 꼬박 보냈는데, 그간 자신이 그렇게나 좋아했던 화본들조차 자신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안락공주의 실망스럽고 놀란 눈빛이 자꾸 떠올라 생각을 거듭해보다가 결국 절친한 벗인 고청운을 불러들였다.

“신지, 자네가 나라면 어떻게 미래를 계획하겠나?”

그는 개의치 않는 척하며 제멋대로 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언제나 한량처럼 살아왔는데, 그는 그간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느끼는 만족감이 중요하며 자신이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이 연극을 좋아한다고 얕잡아 보아도 그는 그 말에 흔들리지 않았는데, 자신의 선택이 그 누구를 방해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이 뭔데 자신에게 강요를 하는가 말이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고청운에게 매우 탄복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명확한 목표의식이 있어 목표를 세우고 계획대로 실행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면서 강한 자제력으로 다른 사건들에 방해받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향락을 좋아하고 고생하는 것을 싫어했기에, 이런 고청운에 대한 존경심이 컸다.

“내가 자네라면, 큰 갈등 없이 형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할 것이네. 자네의 네 형제 중 한둘은 사이가 좋은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고청운은 진지하게 사장정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정말 잘 생각해야 하네, 결국 영평백부는 언젠가 분가할 걸세. 의심의 여지도 없이 자네는 바로 방계로 갈라져 곁가지가 될 게야.”

고청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장정 역시 최근 이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과거 시험을 보려 한다면, 자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만 성공할 수 있을 걸세.”

고청운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사장정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것은 아니 될 말일세, 난 떨어질 게야!”

“그래, 그럼 문인으로 나갈 수 없다면야 군대를 들어가는 방법이 있네만.”

고청운이 의견을 제시했다.

“자네 집안의 인맥으로 관계를 좀 따지면, 아버님만 허락하신다면 군에서 적당한 자리를 하나 얻을 수 있을 걸세. 처음에는 비록 작은 관직으로 시작하겠지만, 점차 공로를 쌓아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외숙부에게 청해 보는 건 어떠한가?”

“안 되네, 나는 병서는 몇 권 본 적이 없어. 또 병영에는 악한 사내들이 얼마나 즐비한가. 나는 군에 종사하는 쪽으로는 아예 흥미가 없다네.”

사장정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좋네, 자네는 정말 편한 것만 찾고 일하기를 싫어하는군.”

고청운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면 상인이 되는 건 어떠한가? 분가한 뒤 받은 돈으로 텃밭을 사서 시골의 지주가 되는 건?”

사장정은 따로 생각한 바가 있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라…….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자네처럼 살고 싶어 할 걸세. 자네가 잘 생각해 보게, 자네가 관직을 갖지 않는다면 자네의 장래는 지금보다 더 못하게 될 게야. 자네도 그간 사씨 가문의 방계 일가들이 고생하면서 살고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고청운이 그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며 천천히 말했다. 

“그도 아니면, 자네는 자네의 용모를 이용하여 권세 있는 집안의 여식을 찾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네.”

고청운의 말끝에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사장정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이 났는데, 평소 말로 자신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기에 지금은 왠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났다.

“하하, 화낼 필요 없네. 미모는 강력하고도 매우 희소한 자원이니. 그건 자네의 타고난 능력이자 자원인데,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용하는 게 뭐가 나쁘다는 것인가?”

고청운은 다시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사람은 언젠가 늙어가는 날이 오는 법, 우리는 이 점을 중요시해야 하네.”

대화는 여기서부터 다른 방향으로 새기 시작했다. 

사장정은 며칠간 골머리를 앓게 하던 고민을 여기서 잠시 멈추고 고청운과 웃고 떠들고 난 뒤 다시 물었다.

”신지, 자네는 그 시골에서 어떻게 공부할 생각을 했는가? 그리고 내 지금 자네를 보면 자네는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고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있었지. 자네들이 보는 그 회시라는 시험은 내가 듣기만 해도 정말 끔찍하던데.”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빙긋 웃으며 추억에 잠긴 눈으로 중얼거렸다.

“고생? 그런 건 고생도 아닐세. 나도 원래는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네. 공부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가 정말이지 힘들었었는데, 진정한 고생은 1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이 계속하는 것에 있었네. 사람에게는 모두 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도중에 조금이라도 방심할라치면 다른 것을 하고 싶을 때가 찾아오기 마련이었지만, 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네. 나는 농가에서 태어났고 거기에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아 평생 농사일을 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야. 내게는 공부만이 유일한, 그리고 최선의 길이었네.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용기가 생겨났네. 무엇보다도 내 마음속에는 항상 아침에 당장 저녁에 닥칠 일을 보장할 수 없는 긴장감이 있었지. 그 느낌은 내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나를 더 자극시켜 주었네. 이런 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 습관이 되면 견디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자네도 알 걸세. 난 아주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부하는 방법이 아주 서툴지는 않았네. 적절한 방법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면, 반드시 나 자신에게 보답할 날이 올 것이라고 하루하루를 믿으면서 버텨냈네.”

사장정은 그 말을 듣고 나서 약간 감명을 받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성향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게 되었다. 고청운이 행한 그런 방법은 역시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비록 이야기는 이렇게 흐지부지되었지만, 그날의 대화 이후 그는 결국 이날 논한 대화의 영향을 받아 점차 다른 망나니 같은 부잣집 도련님들과의 접촉을 줄이고, 자신을 유혹하는 장소로의 발길을 끊었다. 

예전에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가끔 도박을 하는 곳이나 찻집이니 교방 같은 곳을 드나들었지만, 지금은 꼭 필요한 약속이 생기지 않는 한 먼저 가지 않게 되었다.

* * *

그가 안락공주를 잊으라고 스스로에게 강요할 때, 하필이면 공주가 자신의 주위에 나타나곤 했다. 이쯤 되어서야 그는 마침내 그녀의 횡포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결국 이를 피하지 못하고 그런 그녀의 횡포와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는 공주를 정말 좋아했기에 그녀를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또 그녀를 만나면 기뻤다는 것이었다. 외려 그녀를 만나지 못하면 서운함을 느꼈다. 공주가 폐하를 닮은 용모를 가져서 적잖은 부담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녀의 용모가 그의 진심을 덮을 수는 없었다. 마음이 세심한 그는 자신의 변화와 이질감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게 다 자란 어른이 처음으로 한 여인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예전처럼 흘리고 다니던 입에 발린 농담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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