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사장정은 부모님 두 분이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칼만 휘두르는 무관과 시서를 읽고 자란 처녀에게 어떤 접점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아쉬운 점은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별로 없었다는 것인데, 물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도 그리 깊지는 않을 것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에게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팔자가 있다는 ‘극처(*克妻: 사주팔자에서 처를 극하여 못 버티게 하는 성질의 기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가 석 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멍하니 있던 차에 셋째 동생이 생겼는데, 셋째 동생의 어머니 역시 또 죽고 말았다. 이 일이 발생하자, 부친의 극처에 대한 이름이 여러 관리들 집안에 퍼지며 그 악명이 대단한 유명세를 치러버렸다.
아버지는 어렵게 다시 장가들었는데,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이 부인은 사장정을 극부, 극모, 극형제한 팔자를 지닌 재앙의 씨앗으로 만들어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는 어린 시절을 보내게 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다른 집으로 가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던 점은 이 집안의 큰형은 할머니가 아끼고, 셋째 동생의 친모는 계모의 친언니였으니 이래저래 따져 보아도 그 누명이 그에게 돌아오게 되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그는 4살도 되지 않아 영평백 집안에서 쫓겨난 셈이었다.
어린 시절은 원망스러웠고 아버지의 무정함을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父情)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는 다른 집에서 자라면서도 앞마당의 큰 나무에 기어 올라가 대문 앞을 바라보는 걸 가장 좋아했는데, 언젠가 본가의 사람들이 자신을 데리러 오기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날이 성장해 감에 따라 이런 희망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이제는 다른 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그가 무사히 자라났으니 다행이지만, 친모가 없는 아이였으니 그 큰 백부 집안에서 자랐으면 너무 쉽게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를 데려가 키운 외조부모는 그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었기에 그를 매우 총애하며 비록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나 먹는 것 정도는 모두 다 제공해주었다. 그가 유일한 그들의 육친인 점도 여기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의 외숙부가 일찍부터 유학하러 나가 일 년 내내 집에 없었으니, 두 노인들은 온 마음을 다해 그에게 잘해 주었다.
그를 슬프게 한 것은 자신이 14살 되던 해에 두 노인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때 외숙부는 고향으로 돌아와 상을 치른 후, 그에게 유산을 조금 남기고는 또다시 곧바로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외숙부는 뭔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중에 돌아와서 그를 찾겠다고 한 뒤, 다른 종들을 다 내보내고 유모 하나만을 남겨두고 사장정과 같이 살게 했다.
외조부모는 일찌감치 그에게 글을 가르쳤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그런 독서 쪽으로의 흥미가 없었다. 그는 결코 공부를 잘하는 편은 못되었는데, 책을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 처녀와 소자들 앞에서 잘 지낼 수 있었고, 서원을 다니면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잘살 수 있었는데, 두 노인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서원 생활도 끝이 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용모를 소중히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어릴 때부터의 경험이 그에게 용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어서 점차 용모를 소중히 여기게 된 것 같았다.
그 후로 그는 몇 년 동안 그저 그런 세월을 지내다가 어느 날 영평백부로부터 귀경하라는 서신을 받게 되었다. 그가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외숙부의 서신까지 받게 되었고, 이번에는 정말 상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상경하는 도중에 그는 일생의 단짝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 밤, 차가운 물에 빠졌을 때 바로 숨이 막히며 공포감이 몰려왔지만, 그는 전혀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무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고 있었지만, 하느님이 자신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속으로 욕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고싶지 않았고, 여전히 살고 싶었다!
‘나는 잘 살아남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며 물에 가라앉고 있던 그는 누군가가 갑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전력을 다해 구조를 요청했지만, 아무도 자신을 위해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기력을 잃고 절망하고 있을 때, 그는 마침내 고청운의 도움으로 물 밖으로,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청운은 그때의 난리로 행보가 매우 바빠져 버린 탓에, 사장정이 표하고자 하는 고마움도 개의치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생명의 은인의 신원을 수소문했고, 고청운이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거인이며 이미 공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까지 알아낸 이상 그는 고청운을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과연 일은 잘 진행되어 갔다. 도중에 사장정의 예상을 벗어난 유일한 것은 고청운의 명성이 낮은 편이 아니라 쉽게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고청운은 방인소의 제자로, 스승의 외손녀를 아내로 맞이했고 또 산술학계에서도 꽤 유명했다.
옛날의 엉망진창이었던 자신의 산술 실력을 돌아보면, 사장정은 매우 탄복했다. 그는 이전에 그 책벌레들을 보면서 그들이 인생에서 가장 아리따운 세월을 모두 낭비하고 있다고 느꼈고, 사서오경도 너무 진부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그들 중 하나라는 생각에, 최소한 문인들은 양심이 있고 사서오경을 헛되이 읽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고청운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일원이었다.
사장정은 본가로 돌아와서도 꽤 어렵게 지냈는데, 안채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혀 대는 통에 견디기 힘든 나날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그를 기쁘게 한 것은 고청운과 절친한 사이로 우정이 발전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을 살려준 은혜로 고청운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중에는 진심으로 상대방과 만나고 싶어지고 벗으로 더 가까워지고 싶어졌다.
고청운은 사람을 진실하게 대해 주었는데,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남의 어려움을 잘 알아차려 주었기에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이 매우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뜻밖에도 여전히 수많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어서 나눌 수 있는 대화도 무궁무진했다!
자신의 용모에 대한 애정에도 고청운은 비웃지 않고, 오히려 외모의 정갈함과 몸매 관리 모두 자신을 통제하는 좋은 수단이자 능력이라고 자신을 칭찬해 주기까지 했다.
사장정은 고청운의 진지한 생활방식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해 그는 안락공주를 만났다.
* * *
사장정은 교외에서 한 차례 나들이하다가 안락공주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우연이었다.
그때 그는 이미 영평백부 집안의 둘째 도련님으로서 귀족 자제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 둘째 도련님이 집안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제들은 그를 가산을 다투어야 하는 적수로 여기고 있었으며, 계모도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외숙부가 암암리에 도와주었지만, 그의 생활은 아마 더욱 어려워질 것이 자명했다. 반면, 안락공주는 폐하의 적녀이고, 태자의 친누이로서 지위가 존귀했다. 이렇듯 두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 다른 귀족 자제들과는 친숙하지 않았고, 그는 일반적으로 연회에서나 안락공주를 멀리서밖에 볼 수 있는 정도였기에 그 둘은 마주칠 기회가 적었다.
사장정은 자신이 공주와 혼인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그토록 수많은 귀족 집안의 도련님들을 선택할 수 있는 공주가 이렇게나 볼품없는 자신을 택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은 교외 나들이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날은 봄빛이 찬란했고, 상사절(*上巳节: 음력 3월 3일로, 고대 중국 명절 중 하나)이 막 지나 봄바람이 대지를 스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렇게 아리따운 날씨가 시작되자 한겨울 동안 내내 집안에만 웅크리고 있던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때 즈음 교외에서는 이미 봄옷을 입은 처녀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더욱 긴장해서 처음에 고청운을 함께 봄나들이에 동행시키고자 했다. 친한 벗과 함께 있는 것이 매우 편안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겸사겸사 고청운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바람을 좀 쐬게 하여 화본을 쓰게 독려하려고도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고청운은 처자를 데리고 봄나들이를 가겠다고 약조를 해 놓은 상태라고 했다. 사장정은 희고 보드랍고 통통한 소석이가 매우 사랑스러워 또 보고 싶었지만, 고청운 일가가 누려야 할 즐거움에 자신이 끼어드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방인소가 늘 고청운의 곁을 따라다녔다. 비록 방인소는 자신에 대한 태도가 매우 상냥했지만, 늘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고는 했다. 조심하라고, 너무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고 다그치며, 또 자꾸만 자신을 끌고 가서 같이 바둑을 두자고 했다. 방인소와의 대화는 늘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해서 그를 울적하게 만들고는 했다.
‘하늘 아래 문인들의 기질은 다들 좀 비슷한 걸까?’
가끔 그는 이렇게 생각해 보고는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는 자신의 불량배 친구들이라도 데리고 함께 집을 나섰는데, 풍족해 보이는 치장을 하고 말을 이끄니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강가를 거닐던 사장정은 아직 처녀들을 구경할 겨를도 없이 사내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와 말을 거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어휴, 어찌 매번 시커먼 사내들은 날 여인으로 착각하는 거지? 정말이지 기분 상하는 일이구나.’
이럴거면 오늘 외출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손해가 막심했다!
그는 혼자서 한숨을 쉬면서 함께 놀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자신이 데리고 온 건장한 하인 둘을 데리고 따로 산길을 따라 산 중턱으로 올라가 좀 조용히 바람을 쐬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안락공주를 만날 줄이야. 그녀는 시위들을 대동하고 남장을 한 채 활을 메고 무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안락공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는 절대로 아둔하지 않아 상경하자마자 외숙부에게 가르침을 얻어 권세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따라 배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을 사귀어야 하고, 어떤 사람을 피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사서는 안 되는지, 또 어떤 사람에게 져서는 안 되는지…… 등에 대한 내용들을 일일이 챙겨 배웠는데, 누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할까 혹은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될 사람을 못 알아볼까 잘 배워 두었었다.
이런 가르침을 주면서 외숙부는 그가 날 때부터 어여쁜 게 아니었다면 머리를 쓰는 법을 배웠어야 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은 사장정을 화나게 하고 또 기쁘게 하기도 했다.
‘흥, 역시 난 공부를 잘못하는 것뿐이지, 그것이 내가 아둔하다는 뜻은 아니야!’
그는 참 영리한 편이었다.
그때 사장정은 멋들어진 모습의 안락공주를 보고 사실 마음속으로 부러워했다. 상대방은 자신보다 더 사내다워 보이고 위풍당당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용모가 마음에 들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좀 더 멋졌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방자명처럼 잘생긴 사람은 누구나 그를 여인으로 착각하지 않았다. 맞다, 방자명은 고청운의 벗으로 자신과의 관계는 그저 그랬는데, 실은 서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다행히 고청운은 이 둘에게 서로 꼭 친하게 지내라고 강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