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494)화 (494/504)

외전 9화

황제가 갑자기 잠시 웃더니 말했다.

“승은후(承恩侯) 집안의 아들은?”

그는 태자의 공부 친구이자 사촌 동생이었다. 

태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허탈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근(阿靳)이 녀석은 원래 저와 함께 어마마마께 인사를 드리러 같이 갔었는데, 오는 길에 저 멀리서 고 태부님께서 오고 계시는 것을 보고는 두말하지 않고 옆에 있던 벽 뒤로 숨어 도망갔습니다! 변변치 못하다니까요! 제가 이미 몇 번을 말했지만 저런 태도를 고칠 순 없었습니다.”

태자는 황제가 그들 내부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사촌 동생의 태도에 노발대발하곤 했는데, 고 태부가 무슨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어찌하여 쥐가 고양이를 보듯이 몰래 도망가는 것일까? 이러다가 무안후(武安侯)처럼 사람들의 우스갯소리를 듣게 될지도 몰랐다. 

그도 일전에 고 태부님에게 매를 맞았었는데……. 어, 몇십 번씩 맞기는 했다. 하긴 하늘 아래서 태부님에게 매를 얻어맞지 않은 학생은 극히 드물 것이었다. 그들 같은 황자를 때릴 순 없으니 함께 온 벗들이 대신 맞기도 했다. 

그러자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동시에 자신의 옛 벗이었던 무안후가 생각났다.

“부황께 웃음을 안겨 주는 것 또한 아근이의 복입니다.”

태자는 자조하며 조심스럽게 황제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고 태부께서는 원래 좋은 취지로 그리하시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좀 엄격한 것도 좋지 않으냐? 너희 같은 놈들의 혈기를 가라앉혀 줄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황립 서원이 애물단지로 전락했을 게야.”

황제는 웃음을 거두며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사람을 안배할 때 군신들의 능력과 성정을 판단하여 적정한 직위에 배치를 하는데, 그래야 그들의 재능을 더 좋은 곳에 쓸 수 있고 마음먹은 대로 일을 성사시킬 수 있지.”

이 기회를 틈타 황제는 아직까지는 만족스러운 태자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했다.

“고 태부께서는 입바른 말에 능숙하지 못하시고, 성정이 너무 정직하시며, 대인 관계도 능숙하지 못하시지. 그러나 누군가와 결탁하여 사리를 도모하지 않으시고 일 처리가 매우 조리 있으며, 수고와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내하여 일을 잘 해내는 군신이시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속에 저울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는데, 고 태부께서는 문인의 기골까지 가지고 계시지.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단다. 네가 황위에 올랐을 때 그가 다시 입각할 순 없겠으나, 그런 사람들은 홍려사와 예부, 심지어 호부와 공부에 가서도 혹은 스승으로서도 매우 제격이란다.”

그는 고청운의 자손들을 생각해 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과거 시험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일을 골라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했다. 그들이 어느 쪽으로 발전을 거듭하든지, 황제는 아직 고씨 가문에 불초한 자손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부황, 그럼 고 태부님께서 그간 가장 신경 쓰시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태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기심에 입을 열었다.

“아마 후대에 전해질 이름과 자손과 관련된 일이 아니겠느냐?”

황제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문인들은 대부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고는 하지. 이것 좀 보거라.”

그가 어안에 비치된 상주문 한 부를 꺼내 태자에게 건네주었다.

태자가 두 손을 맞잡아 받고는 바로 펼쳐 보았는데, 그 내용은 알고 보니 전 우정승이 돌아가셨으니 시호를 내려달라는 청이었다. 

황제는 고 태부가 세상을 뜨면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릴 예정이었는데, 가장 좋은 시호인 ‘문정(文正)’과 ‘문정(文貞)’의 뒤를 잇는 세 번째로 뛰어난 시호에 속하는 이름이었다. 이는 고 태부가 자신의 스승이었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좀 불편한 마음이 있었는데, 애초 적자와 장자들이 황권을 놓고 다투고 있을 때 고 태부는 중립을 지켰을 뿐 결코 자기의 포섭을 수용하고 자신의 손을 먼저 잡아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아들들의 은밀한 포섭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 황제의 마음은 매우 흡족하기는 했다.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는 가볍게 내려서는 아니 된다. 어느 정도 극치에 이르렀을 때만 이런 시호를 수여하는 것이 가능한데, 물건이란 무릇 많아지면 그 희소성이 적어져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우리 하 왕조는 현재 개국 승상만이 그 시호를 받고 있는데, 지금 하늘 아래 문인들은 누가 두 번째로 그 시호를 받을 수 있는 있을지 경쟁하며 저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니라…….”

* * *

어서방에서 황제가 태자에게 그간 감춰둔 제왕학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고 있을 때, 고청운은 이미 황궁문을 나서고 있었다. 

고청운은 포섭 당하는 처우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사제지간, 동향 등으로 결당(*結黨: 도당이나 정당을 결성함)하지 않고, 황립 서원의 원장이 된 뒤로는 제자도 받지 않았다. 이 몇 년 동안 고청운이 정식으로 받은 제자는 임양부의 장진지와 방인소의 후계자인 방침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거절했다.

자고로 눈에 많이 띄고 그의 행보가 많이 알려질수록 황제에게는 생각이 많아지는 일이 되는 법이었다. 이번 황제는 좀 소심한 데가 있어서 사소한 일이라도 모두 작은 책자에 적어 두었다가 기회를 잡으면 보복을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고청운은 황제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묵묵히 이런 결심한 지 오래였기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결코 황제 앞에 나서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 몇 년간은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서 걷는 동안, 그는 자신의 집에서 타고 온 마차를 발견했다. 그러나 마차 옆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삼원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자손들은 임양부에 정착했고, 그의 집안에서는 두 명의 수재가 나왔다. 그들은 밭과 가게를 소유하고 있어 생활이 풍족했으며, 아직도 자신과 자주 서신으로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 * *

고청운의 원장직 사퇴 소식은 경성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자리는 비록 품계는 없지만 황제와 독대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엄청난 인맥을 만들 수 있는 자리이거늘…….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청운이 이런 자리를 자진해서 사퇴하다니!

이는 고영량의 사퇴 소식을 능가하는 사건이었다. 

* * *

고청운은 고영량과 사장정과 어울려 교외의 운하 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7월의 뜨거운 태양이 하늘에 걸려 있어 주변의 화초와 나무들이 모두 시들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오직 매미만이 악을 쓰며 울어 대고 있었는데, 고청운 등 세 사람은 작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낚싯대를 들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에 있는 큰 나무 밑에서는 하인들이 간이 천막을 치고 불을 피워 차를 끓였고, 상을 차려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도 주인들의 낚시 흥을 깨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고청운은 낚시하기 위해 잡은 이 자리가 만족스러웠다. 정말이지 경성은 너무나도 무더웠다. 이런 날씨에는 차라리 교외 강변으로 나와 낚시하는 것이 나았는데, 교외가 비교적 시원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낚시찌가 가라앉자 고청운은 익숙하게 낚싯대를 휘둘렀고, 과연 한 근이 넘는 물고기가 낚시대에 걸려 있었다. 

“뭐? 자네, 또 고기를 잡은 겐가?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사장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난 자그마한 새우 한 마리밖에 못 잡은 거지?’ 

그는 새우를 그냥 버리려다 자신의 나무통이 너무 초라해 보여 그냥 물통에 던져두었다.

“그래, 이게 네 번째로군. 그래도 이건 너무 작은데, 아까 잡은 것보다 세 근은 부족하겠네.”

고청운은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문질렀고, 직접 허리를 숙여 미끼를 바꾸며 그를 위로했다.

”급할 것 없네, 자네는 그간 스승님을 따라 낚시를 자주 다닌 나와는 달리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렇다네. 자네가 이상한 것이 아닐세.” 

“그건 모르겠고, 아마 자네가 앉은 자리에 물고기가 모여드나 본데, 자리 좀 바꾸지. 원래 거기는 내가 먼저 골랐던 자리가 아닌가.”

사장정은 그의 위로에 기분이 더 언짢아져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청운과 자리를 바꾸려고 했다.

“장정이, 자네는 어찌 늙을수록 더 파렴치해지는가. 우리 집 단단이만도 못하네. 됐네, 자네의 뻔뻔함에 내가 졌어. 그래, 내가 지금 자리를 바꾸어 줌세. 이런, 인내심도 없이 자리 탓이나 하고. 우리가 이렇게 자주 오는데 어디에 물고기가 있는지도 모르는가?”

“뭐가 나보다 단단이가 더 낫다는 게야?”

사장정은 이에 불복했지만, 단단이가 자신의 어린 손녀와 고청운의 손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사장정의 말에 고청운 또한 자신의 체면을 의식해 마지못해 동의했다.

‘답답해라, 만약 나에게 많던 벗들 중 이렇게 딱 한 명만 남지 않았더라도 난 절대로 그에게 길들여지지 않았을 텐데!’ 

고청운은 십수 년 전 세상을 떠난 방자명, 몇 년 전에 보낸 하겸죽 등을 떠올렸다. 그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이 그리웠다.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사장정은 마침내 조용해지기 시작했지만, 그 모습이 오래 유지되진 않았다. 계속 물고기가 낚이지 않자, 그는 참지 못하고 그들과 조금 떨어져 앉은 고영량을 슬쩍 흘겨보더니 작은 소리로 물었다. 

“소석아, 너는 오늘 왜 그러냐? 내 오늘 보니 하루 종일 시무룩하구나. 너무 조용한데,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니냐? 그리고 자넨, 오늘 어찌 아들을 데려왔는가?”

평소에 두 노인은 호위들을 데리고 다니고는 했지만, 이렇게 자식들을 데리고 오는 건 흔치 않았다.

고청운은 조형물처럼 앉아 있는 고영량을 보더니 그가 아까 같은 큰 소란에도 별 반응이 없는 듯해 큰소리로 대신 답했다.

“일은 또 무슨 일? 그저 갑자기 상서 어르신에서 일반 백성이 되어 버렸으니 뒤에서 조아리고 있는 사람들도 없겠다, 마음이 편치 않은 게지! 허전하고 적적해져 버린 게야! 사람이 떠나면 차도 식는다고 주변에 들러붙던 사람들이 일시에 다 빠져나가 버렸으니, 그 애는 지금 마음이 많이 착잡할 걸세. 그러니 자네도 그에게 더 말 걸지 마시게. 괜히 마음 다친 녀석 건드리지 말고!”

“이…….”

사장정은 아연실색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자기 아들을 망신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는 고청운의 까칠한 말에 깜짝 놀랐는데, 그간 고청운과 벗으로 지내온 지 몇십 년이 되어가며 그들 사이에 형성된 부자애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설마 관계가 무너진 것인가?

‘그럴 리가 없지!’

이렇게 큰 소리를 듣고서야 마침내 정신을 차린 고영량은 쓴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버지, 뭐가 상처받은 마음이라는 겁니까? 제가 어디 그리 약한 사람인가요.”

그는 단지 방금 벼슬길에서 내려와 조금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하루하루가 매우 바쁘게 지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갑자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려니 온몸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아버지가 퇴직하고도 줄곧 바빴던 것을 보았는데, 아버지가 평소에 왜 이렇게 많은 일을 찾아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고영량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버지가 너무 힘들게 일한다며 좀 여유 있게 호강하며 살라고 권유를 드렸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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