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493)화 (493/504)

외전 8화

“괜찮소. 이 정도 업무 강도는 내가 아직 감당할 수 있소. 내가 바쁠수록 더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보지 못했소?”

고청운은 지금도 정말 만족스러웠다. 그는 황립 서원에서 원장 직무를 맡기 쉽지 않았는데, 그곳을 다니고 있는 아이들부터가 모두 집안 내력이 있는 가문의 자제들이었고, 나중에는 황자들까지 입학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들은 정말 대단했는데, 솔직하지 못하고 꿍꿍이를 심어 행하는 행동 등이 웬만한 어른들 못지않았다. 

이런 여러 가지 관계를 고려하고 이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없다면 황립 서원 원장으로서의 직함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쪽 방면은 대부분 고청운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부원장을 두어 해결하게 했다. 그는 황제의 심복이었고, 고청운은 그저 명의만 원장이었다. 

고청운은 황제가 자신의 이름만 내세웠을 뿐 실제 권력을 또 다른 사람에게 줘서 황립 서원을 장악하려는 심산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도 황립 서원 원장이라는 직함은 그에게 큰 혜택이었는데, 그 덕에 고청운이 보급한 아라비아 숫자와 산술 교과서가 전국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실에 매우 만족해했다.

고청운은 퇴직 의사를 밝혔을 때 너무 눈치 빠른 두 황제 모두 뜻을 바꾸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물러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성남의 연구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다. 

간미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안심했다. 

‘부군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분명 방법이 있는 것이리라.’

* * *

두 사람이 걸은 지 일각(*약 15분) 만에, 고청운은 오늘 아침 운동량이 충분하다고 느껴 간미와 헤어져 혼자 서재로 책을 보러 갔다.

그는 어린 시절 사서오경을 과거 시험 합격을 위한 전신으로 삼다가 20대 초반에 이르러 점차 진정으로 독서를 좋아하게 됐고, 이후 진사에 급제하고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독서를 포기하지 않아 책에 대한 이해가 더욱 통달하여 같은 책을 복기하더라도 늘 새로운 감상이 나오고는 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나이가 되니 그는 더욱 독서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미 많은 양의 도서를 광범위하게 섭렵하고 있었다. 과거 시험과 관련된 책부터 여행기, 국내 서적과 해외 서적까지, 책에 실린 내용이 좋고 자신이 흥미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 책을 사들였다. 그는 퇴직 후에도 여전히 녹봉을 수령하고 있었고, 서원 원장으로의 녹봉까지 받고 있었기에 책을 사는 정도의 자금은 충분했다. 

그동안 그는 대부분의 정력을 시멘트 제조, 증기기관 연구에 몰두해 왔고, 남은 시간 동안은 황립 서원 업무 외에도 손자와 증손자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그간 기록해 온 일기를 정리하고 출판할 준비를 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 일을 끝마치고자 했다. 이것은 그가 줄곧 가져왔던 생각으로, 그는 일기 안의 일부 기록 자료들이 미래에 반드시 참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만수절이 지나자 고청운은 황제에게 사직 의사를 밝혔다. 

황제는 아래 자리에 앉아있는 고청운을 보며 착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사실 황제는 고청운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젊은 시절 그를 볼 때마다 그가 자신한테 경의에 대해 질문을 하는 등 함께 공부했던 나날이 떠올랐던 것이다. 황제가 보기에 고청운은 성정이 고지식하고 일 처리에 빈틈이 없으며 신중했다. 당초 자신과 형제들에게 고청운이 공부를 가르친다고 했을 때, 부황이 고청운에게 자신들을 엄히 단속하고 잘 관리하라고 주문을 한 것만 같을 정도였다. 

몇 명의 태부들 중에서도 오직 고청운만이 황제의 명이라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고, 황자들의 태도가 약간만 단정하지 못해도 바로 지적하고는 했다. 또한, 고청운을 글공부 사부로 모시는 것은 정말이지 곤욕이었는데, 자신은 매를 맞을 일이 없었으나 아이들의 본보기로 혼이 난 황자의 손바닥은 항상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일전에 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살지 않았던가? 당시 그에게는 또 다른 친형이 있어 자기 스스로도 황위가 자신에게 차례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좀 느슨하게 하고 있었다. 필시 하늘 아래 많고 많은 재미있는 일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청운이라는 태부를 만나, 그의 매서운 본보기를 보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를 해야만 했다.

황제는 황위를 계승하고 병권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 권위 역시 높아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을 가르친 태부인 고청운을 마주칠 일이 생길 때마다 슬그머니 돌아서서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조심했다. 이것만 봐도 태부의 그늘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필이면 자신을 만날 때마다 고청운 자신은 한결같이 자상했고, 애당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도가 여전했다.

“태부, 3년만 더 계셔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짐은 아직 마땅한 적임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마음은 좀 언짢았다. 고씨 사내들은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고청운의 생일잔치가 끝나기 무섭게 하나둘씩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호부상서와 태부 두 사람이 그랬다.

“노신이 이제는 너무 늙고 기운이 없어 도저히 원장 자리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고청운은 늙어 쇠약해진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할 때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부원장이 그간 세 번이나 바뀌어서 지금이 딱 괜찮은 적기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얼른 고청운을 부축하며 온화하게 말했다.

“태부, 서두를 것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짐에게 천천히 말씀하세요.”

황제는 속으로 답답했는데, 눈앞의 이 노인이 끼니마다 쌀밥을 두 그릇씩 먹고, 아침저녁으로 정권을 몇 초식이나 연마하며 현손들을 안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정용후가 검법인지 무엇인지를 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황제가 보기에 그는 웬만한 40대보다 정신력이 더 좋은 것 같았다.

곁에서 시중을 들던 수행 내시 하나가 연신 고청운에게 새 구기자차를 따라 주었는데, 이는 고청운이 즐겨 마시는 차였다.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에 생긴 눈밑의 검은 부근을 매만졌다. 그는 어젯밤에 후궁 하나가 또 난리를 친 탓에 밤새 잠을 설쳤고, 오늘 아침 일찍보약탕을 먹고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었다……. 황제는 이걸 떠올리고 또 한 번 씁쓸해졌다.

‘태부 저분은 진짜로 무슨 신선이 되는 비급이라도 알고 계신 게 아닐까?’

황제는 어린 시절 태부가 쓴 신선과 관련된 화본을 몰래 본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강렬하게 요동쳤다.

부원장은 능력이야 있지만, 명망 면에서는 태부보다 떨어졌는데, 한 등급 정도가 차이나면 몰라도 덕망이나 명망이 태부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떨어졌다.

고청운은 황제의 생각이 신선 비급에 쏠려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만두고 싶다는 요구를 다시 한번 되풀이하며, 자신은 이미 90세 고령이라 정말 일을 할 수 있는 정력이 모자라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는 일생을 황가에 잡혀 살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그는 간미의 머리에 꽃을 장식해 주다가 그녀의 머리가 예전보다 더 많이 하얗게 세어 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몇십 년 동안 함께 곁을 지켜준 반려자를 돌아보니 좀 불안해지면서 더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하고 싶어졌다. 

그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전생의 일은 거의 생각나지도 않았고, 성별의 문제에도 더 이상 얽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간미를 사랑해 주지 못했음에도 젊었을 때부터 그녀와 70여 년 동안 함께 지냈기에, 그에게 간미는 이미 자신의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분이 되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가족인 것이었다. 

간미도 그랬을 것이다.

결국 황제는 고청운의 퇴직을 받아들였다.

고청운에게 밖으로 나가도 좋다고 윤허한 뒤, 황제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넋을 놓았다.

그는 부황이 별세하기 1년 전 신하들에 대한 부황의 평가를 떠올렸는데, 이 해 부황은 62세로 장수한 편이었다. 

“황아, 고신지라는 자는 사심이 적고 아주 성실하게 일하며, 분수를 지키고 늘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니 가히 믿어도 될 것이다. 그에게 네 자식과 손자들을 가르치게 해도 좋을 게야.”

부황 영평제는 뒤이어 조정의 신하들에 대해 일일이 평가를 한 뒤 다시 말했다.

“네 황조부께서 임종하시기 전에도 짐과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황조부의 말씀이 과연 영험하시구나. 고신지는 확실히 네가 시름을 덜 수 있게 해주는 신하이니라. 세상 모든 군신들이 다 그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꼬.”

황제가 그곳에 여전히 선 채로 지난 일을 회상하고 있자니 감개무량해 있을 때, 내시가 다가와 태자가 예견을 청한다고 전했다. 

“들어오라고 하여라.”

황제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아들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황급히 말했다.

태자는 부자의 예를 갖춰 인사를 하고 몇 마디 잡담을 나누고 난 후, 지체없이 물었다.

“부황, 오는 길에 막 고 태부님을 뵈었습니다.”

그는 눈에 호기심을 담아 계속 말했다. 

“고 태부님께서는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입궐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보통 황자들은 황궁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12살이 되어야 황립 서원으로 보내졌다. 태자는 황립 서원을 다녔었기에, 고청운이 황립 서원의 원장뿐만 아니라 산술 학문도 직접 가르치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는 빙긋 웃고는 아들이 쳐다보았다. 그는 속에 무슨 생각이나 계획을 품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아들이 자기 앞에서 기탄없이 말하는 것이 좋았다. 물론 외부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지금 기분이 다시 좋아지자, 그가 웃으며 답했다.

“고 태부는 원장 직함을 내려놓고자 입궐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기에 짐이 이미 윤허했느니라.”

그러자 잘생긴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해진 태자가 대뜸 말을 내뱉었다.

“정말입니까? 하지만 태부님께서는 아직도 건장해 보이시는데요!”

그는 고 태부가 어디 아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황제는 검지로 의자를 두드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 봐라, 모두가 다 태부께서 얼마나 건강한지 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도 태부께서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찾아와 ‘몸이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다니.’ 

하지만 황제는 그의 현재 나이와 이십여 년 동안의 그가 끼친 영향력과 관계를 생각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의견에 동의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 부황은 태부가 아주 성실한 사람이고 잔꾀를 절대 부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했었으니, 그가 방금 그러한 연극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었다.

“나이가 많으시니 작은 병치레나 잔병 같은 게 있으실 게다.”

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세월은 사람을 늙게 했다. 선황제의 노신이 몇 명 남지 않았는데, 특히 고청운 같은 삼대 황제를 모신 원로 같은 분은 더더욱 귀했다.

태자는 눈꺼풀을 아래로 떨구고 잠시 읊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 태부님께서 서원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신(兒臣)은 조금 못마땅합니다.”

그는 올해로 마침 약관(*20세)이었는데, 4살부터 글공부를 시작하고 18살에 황립 서원을 수료할 때까지 십여 년 동안 궁중에서든 서원에서든 줄곧 고청운을 스승으로 모시며 늘 그의 엄숙한 얼굴을 봐 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이렇게 갑자기 자신을 더 이상 가르치지 않게 되었다니 정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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