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영요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간미가 웃으며 말했다.
“담씨 가문이 정말 안타깝지. 담 노인께서 일생 쌓아 오신 그 청렴한 이름이 아깝게 되었구나. 부군께서는 그간 담 노인께서 얼마나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고 청렴하게 관직 생활을 해 오셨는지 말씀해 주셨었는데 말이다. 다만 그 자손들이 현명하지를 못하여 이런 분가 문제 같은 것으로 온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구나.
가난이 두려운 게 아니라 평등하지 못한 게 두려운 것이라더니, 열 손가락이 긴 것도, 짧은 것도 있다지만 부모 된 자로서 너무 편파적이어서는 아니 된다. 모두가 다 자신의 혈육이 아니더냐. 그리고 아내가 현명하면 남편이 화를 적게 입는다는 말 또한 매우 일리가 있는 말이다. 우리 고씨 집안의 며느리들은 저마다 다 현명한 사람들이니 그 덕에 온 집안이 화목하고, 만사가 흥할 수 있었던 게야.”
이 발언은 간미의 진심을 담은 것이었다. 평소에 자신을 곁에서 직접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장손들이라 내심 편애를 할 수밖에 없다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아이들에 대해 공평하게 대우하고 있었다.
가장 간단한 예로, 황제가 여지(*荔枝: 과일 리치(lizhi))를 보내주었을 때를 들 수 있었는데, 아무리 여러 번 여지의 개수를 세어 봐도 모든 아이들에게 돌아갈 양으로는 모자랐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집안의 여자아이들에게만 이 과일을 먹이거나, 혹은 약간의 행사를 기획하여 경품으로 이 과일을 나누어 줄지언정, 최대한 아이들 사이에 감정적인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대가족이 사는 저택이라 그들 사이에는 서로 감추는 것이 없었다. 또한 하인들에 대한 관리를 아주 엄격하게 해서 집안 분위기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여종이나 사내종들은 나이가 들면 늘 내보내고는 했는데, 아들을 낳은 집이라고 남기고, 못 낳은 집 사람들이라고 내보내고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전에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서,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분가해야 했을 때 원래 살고 있던 고택을 나누어 주지 않고, 때마침 노령으로 인해 관직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옆집 관원의 저택을 사들여 작은아들을 바로 그 집으로 이사 가게 해주었다.
두 아들도 각자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니, 갈등이 덜했고 모두의 감정은 오히려 더 돈독해졌다.
간미가 이런 발언까지 하자, 아래에 앉아있던 안채 식구들의 마음은 매우 흐뭇해졌다. 그녀들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고씨 집안의 사내들과 성혼에 성공한 것은 무릇 고씨 집안의 사내들이 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주어서가 아니었던가? 비록 이 중에 몇몇은 남녀 간의 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오직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학식에만 몰두한다거나 매일같이 기술자나 장인들을 상대했는데, 이런 것들은 자신들의 남편이 여자나 찾아다니며 거추장스러운 서자, 서녀를 양성해대는 것보다 나았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가풍에 대한 모범을 몸소 보이고, 또 이러한 가규를 정한 고청운과 간미라는 어르신들에게 경의를 갖고 기꺼이 두 노인을 더 잘 모시려 애썼다.
특히 고청운은 고씨 가문에서 아주 상징적인 인물로, 그가 살아 생존해 있는 것만으로도 이 고씨 가문은 제일 큰 비호를 받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실을 함께 사용하는 부부간 사이가 나쁜 것이야말로 큰 금물이란다. 어쩔 때는 사내들이 여인네들을 경시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이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보는 날이 오고야 마는 법이지.”
간미는 강남에 한 집안이 자기들끼리 재산을 다투고 있다가 결국에는 별 세력도 없던 과부의 집안에서 이익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들과 함께 한탄했다.
안채의 식구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약속이나 한 듯 고씨 가정 내에서 사적으로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마련한 내실에 관한 서책을 떠올렸는데, 이 책은 눈앞에 있는 노부인이 직접 집필한 책이었다. 음, 자신들의 아들들은 과연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이 악동 같은 아들들은 매번 물어볼 때마다 번번이 웃음을 머금고 있거나 화제를 돌리며 대답을 피했다.
어제 자신의 생일잔치로 인해 아직 며느리들에게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간미는 안채 식구들이 잡담을 마무리하는 대로 큰며느리를 시켜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가게 했다.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그녀는 반쯤 누운 채 눈을 감고 마음을 정리하며, 방금 며느리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입바른 소리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제 잔치 때 모습을 보인 그녀와 연배가 비슷한 할머니들 역시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와 비슷한 부러움을 띤 말을 하기는 했는데, 심지어 그중 몇몇의 말투에는 질투까지 서려 있었다.
간미는 그녀들의 말투가 바로 부러움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내 스스로 되돌아보아도 내 일생에 아쉬움은 없다고 생각하니…….’
간미는 어릴 적부터 경성에서 자랐는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자신이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냉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끔찍이 아껴주었는데, 공무가 바쁘지 않을 때를 틈틈이 활용하여 자신을 직접 가르칠 정도로 예뻐해 주셨다.
부군도 예전에는 외할아버지 내외가 소석이와 소어를 너무 지나치게 어여뻐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도 어렸을 때 그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에 대해서는, 그들 사이의 갈등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린 나이에도 일찍이 눈치가 빨랐던 그녀는 사실 아주 예리하게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느끼고 있는 실망감에 대해 알아챌 수 있었다. 비록 그녀는 총명하고 영리해 공부도 잘했지만, 성별의 구분이라는 것 때문에 선천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이 상해 가며 어렵게 얻은 딸을 끔찍이 아꼈지만, 그 사랑이란 마냥 순수한 것만도 아니었다.
간미는 줄곧 이러한 속사정을 알고 있었음에도 여태껏 밖으로 그 말을 꺼내 표출한 적 없이 그저 외할아버지 내외에게 더 들러붙을 뿐이었다.
그 이후 그녀의 서출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산파가 ‘나리, 귀한 아드님을 득남하신 것을 경축드립니다.’ 하는 말을 전하자 아버지에게 순간적으로 스친 광분 어린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아들이 생기고 나자 보인 그 만족감을 봐버린 것이었다…….
일찍이 아버지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거나 아예 데릴사위가 되어 두 분의 제사 때 향불을 피워드리겠다고 약조를 했었는데, 그 서출 남동생의 출생으로 인해 당시 7살의 그녀는 단번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어머니의 호적에 두겠다며 어머니가 낳은 것으로 치부하면서 서출 남동생의 생모에게는 그 어떠한 애정도 보이지 않겠다고 했다.
‘엉터리 이야기지! 서출 남동생이 어찌 내 친동생이 될 수 있단 말이야?’
그녀는 어머니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여겼지만, 아버지의 계속된 성화에 어머니가 결국 그 말을 따르게 될 줄은 몰랐다.
유모의 입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두말없이 외할머니에게 소식을 알렸고, 역시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야단맞았다.
지금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 것도 아니고, 그저 아직 몸을 다 못 추스른 것뿐이었다. 하지만, 집안에는 또다시 여종이 침상 위에 회임한 채 누워있었는데, 아버지의 묵인이 없었다면 당시 회임 중이었던 그녀는 앞서 몇 달간 회임했단 소식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없었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또다시 아버지의 감언이설에 넘어갔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 주었지만 자신보다는 아버지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어떨 때 간미는 이 점을 상기시키며 스스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무수히 많은 책 속으로 빠져들며 외할머니를 따라 많은 것을 배우며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데 스스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점점 커가면서 혼사가 늘 순조롭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녀의 출산과 관련된 체질이 외할머니나 어머니와 같을까 봐 다들 걱정을 했던 것이다. 좋은 집안의 아들과 관련된 혼담은 그녀의 차례까지 오지 않았고, 혼담이 온다고 해도 그녀와 성혼을 하여 가진 아이를 그녀의 외가에 후계자로 보내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까지도 시집에 대해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상대방의 가문에 대한 요구치를 조금만 낮추면 몇 명 혼담을 나눌만한 상대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외가의 후계와 관련된 일을 꺼내면 상대는 늘 망설였기에, 그녀는 억지 강요를 하면서까지 성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한미한 집안의 자제를 성혼 상대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서출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외할아버지 내외는 아버지에게 내심 실망했는데,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나쁜 마음을 품은 상대를 만나 억울한 일을 당하느니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혼인 상대로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그녀는 임산현에 있는 외종숙과 서신을 주고받던 와중에 ‘고청운’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농가의 자제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듬직하고 성실해 보이는 등 그 인품이 좋아 보여 가히 신뢰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 외종숙은 그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는데, 물론 가끔은 고청운의 시 짓기 능력에 대해 통속적이고 쉬운 해학시를 짓는 것조차 엄청나게 심사숙고를 한다며 비웃고는 했지만, 그의 산술 실력만큼은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
그와 자신이 동갑내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고청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앞으로 그와 어떤 교류를 가지게 될지 모르고 있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는 부모상으로 인해 잠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에 내려가서 3년간 복상 기간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직 교유직을 맡고 있어서 당장 손을 떼고 고향으로 내려가기 어려웠기에, 하는 수 없이 그들 일가는 고향으로 따라 내려가지 못했다.
차츰 외할아버지의 서신에까지 고청운의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외할아버지는 끈기 있고 성실하며 바람기가 별로 없는 그가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나지는 못했으나, 그런대로 봐줄 수는 있는 정도라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외할아버지는 그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며 착실한 젊은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의 과거 시험과 관련해서는 진사 합격까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미 공명이 있기에 그의 뒤를 따라 사는데 별문제 없을 거라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이미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간미는 외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편, 외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곧장 행동에 박차를 가했고, 고씨 집안을 샅샅이 탐문하며 고청운이라는 인물됨까지 샅샅이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다 고씨 집안의 가풍과 고청운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점, 그와 어울리는 지인들, 고청운 본인의 처세술…… 까지 알게 되시고는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곧장 귀향하여 고청운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고청운을 처음 만났을 때, 속으로 좀 실망스러웠다. 외종숙과 외할아버지는 그를 칭찬하고 또 칭찬했었지만, 그녀는 막상 외종숙처럼 준수한 소년들의 생김새에만 익숙해져 있었고, 또 그간 봐온 소년들도 모두 외형을 잘 꾸미고 다니던 자제들이었기에 고청운이 당시 보이던 겉모습만으로는 그가 실로 얼마나 뛰어난지 표출되지 않아서 그냥 그저 나쁘지만 않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당시 그는 밭에서 막 돌아왔기 때문에, 조잡하고 거친 옷감으로 지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검게 그을린 피부 위로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으며 발에는 진흙이 묻은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얼굴이 갑자기 확 가라앉았고 노발대발하며 자신을 끌고 나갔다.
간미는 걸어 나가면서 의식적으로 뒤를 돌아 고청운을 한 번 돌아보았는데, 당시 그는 눈부신 햇볕 아래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집사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세히 관찰해보니, 그는 하얗게 빛나는 치아와 빼어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비록 추레한 옷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엿보이는 기질이 여느 사람들과 달라 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 사람은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 얼굴에 약간의 열기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