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488)화 (488/504)

외전 3화

“넷째 숙부, 이 책을 내지 못하게 제재를 하는 건 어때요?”

고영열은 고승조가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문화적인 부분을 관장하고 있으니 숙부만 허락하면 자신이 가서 건의해 볼 만했다.

“함부로 나서지 마렴.”

고승종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의도적으로 조상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거나 관련 규정을 특별히 어기지 않는 한, 함부로 나서지 말으렴.”

“……알겠어요.” 

고영열은 눈꺼풀을 아래로 떨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떤 소설은 보기만 해도 화가 나요. 여성 독자들 사이에서도 요즘 회귀니 타임슬립이 유행인데, 그중 몇 편은 하 왕조로 넘어가 저희 조상님과 연애를 하기까지 한다고요. 우울해요, 그렇게 되면 우리도 이 세상에 없었을 텐데, 이게 먹칠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세 사람이 이 문제를 논의하던 와중 갑자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순간 뒤를 뒤돌아본 고영열은 표정이 일순 환해지더니, 소파에서 뛰어내려 갓 들어온 젊은 남자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

“셋째 숙부, 오셨어요? 이번에 남우주연상 타신 것 축하드려요! 참, 선조님이신 드라마 <고청운>을 찍으신다고 들었는데, 진짜예요?”

지금 막 실내로 들어온 사람은 올해 27살의 나이로 현재 가명인 안요(安耀)로 활동하고 있는 고승요(顾承耀)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연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유독 대중의 주목을 좋아했기에 집안 어른들의 지지를 받으며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허락을 얻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천부적인 자질과 집안의 지지도 받고 있기에, 10년이라는 연기자 생활을 매우 순탄하게 해오면서 수없이 많은 상을 받았다. 국내외 유명한 남우주연상은 거의 다 받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출연 결정으로 드라마 제작에 대한 압박도 줄어들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의 숨겨두었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다. 

“진짜야.” 

고승요가 상냥하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툭툭치고는 말했다.

“나는 내가 우리 조상님의 어렸을 적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잘 연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어. 이 역할에 내가 아니면 누가 더 잘 어울릴 수 있겠니?”

게다가 해당 작품의 감독은 자신의 죽마고우였다. 여기에 고씨 가문 및 사((謝)씨 집안의 투자까지 더해졌으니, 그는 문중의 어르신들이 불평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내 볼 요량이었다. 

고승요는 말을 마친 뒤 다른 형제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모두 사촌형제지간이었지만, 서로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이때 고승종과 고승조는 그의 배역 확정 소식을 알고 기뻐해 주었고, 이렇게 모두의 이야기 주제가 고청운으로 넘어갔다.

고씨 가문의 개척자이자 고씨 가문을 통틀어 가장 명망 높고 업적이 뛰어난 인물은 바로 자신의 직계조상들이었다. 여기 모인 후손들은 모두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대부분 교과서에서 보이는 조상님의 흔적들을 본다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인상적이었다.

“정말이지 우리 조상님께서는 너무 영명하다고 생각해요. 고씨 가문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바로 가규를 세우시고 책임자를 두어 문중의 사람들을 관리하게 하신 덕분에 이 제도가 계속 자리를 잡아 내려와 곧 400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우리 가문이 쇠락하지 않고 발전해 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 덕분에 우리가 지금껏 내부적인 문제로 큰일을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거죠.”

고영열은 고청운의 열렬한 광팬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 조상님은 그저 완벽하고 똑똑하며 무엇이든 잘 해내는 데다 한결같은 사랑꾼인 분이었다……. 그분의 좋은 점을 꼽으려면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다. 

고승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고씨 가문이 지금껏 지탱해 올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고청운이라는 선조가 그 기반을 잘 닦아서 토대를 세웠기에 가능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아직 살아 있을 적에는 집안 자손들이 모두 매우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한림관이 되거나, 공부, 홍려사 등 비교적 깨끗하고 청렴한 축에 속하는 관아에 근무하면서 한 번도 모함이나 투쟁에 말려든 적이 없었다. 집안의 제일 윗물이 맑으니, 3대만에 바로 하 왕조의 명문가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가(顾家)라는 가문은 계속해서 독서와 과거 시험의 길을 걸었다. 이후 몇 세대에 걸쳐 별다른 인재가 나오지 않아 인재가 끊기거나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벼슬을 잃고 유배되는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중에게는 다른 생계수단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다들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샌님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힘든 시절이 도래했음에도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면서 그 시기를 버텨내어 또 다른 기회를 기다렸다가 재기했다.

현대에 와서, 고씨 가문은 건국 전에 발발했던 내전, 공화제로 바뀐 국가 체제 등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을 때마다 매번 기회를 잡아 일어섰는데, 이는 조상 대대로 전해진 은음 제도와 고씨 문중 어르신들이 고군분투한 결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승요는 자신이 상승세를 탄 고씨 가문이 아닌 방씨 가문이나 사씨 가문 등의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처럼 쉽게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바를 다 성취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이듬해 청명절, 임산현에서는 천인제례대전(千人祭祖大典)이 엄숙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다. 고씨 가문은 이미 19대가 번성하여 400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 * *

6월의 어느 날, 경성의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다. 간미는 잠에서 눈을 뜨고 무의식중에 바로 베갯머리 쪽을 바라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평소대로 손을 베개에 가져다 대보니 이미 온기가 식어 있었다.

“오늘도 또 그렇게 일찍 일어나셨군.”

간미는 한마디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종과 연결된 끈을 당겨 사람을 불렀다. 

곧 방 안으로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 등 세면도구를 손에 들고 있는 여종 몇 명이 들어왔다.

그녀들의 시중을 받아 세면을 한 간미는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었는데, 거울 속의 자신을 살펴보니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하고 머리는 희끗희끗 해져 있었다. 그녀가 그런 자신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이미 젊지 않은 나이로, 어제 막 90세 생일을 보냈다.

“부군께서는 오늘 언제 기침하셨느냐?”

간미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빗겨주던 여종이 대답했다. 

“나리께서는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셨고, 지금 후원에서 정권을 연마하고 계십니다. 어제 노부인께서 피곤하셨을까 봐 저희더러 너무 빨리 깨우지는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영감이…….” 

그녀가 오늘 분명히 함께 일찍 일어나 산책도 하고 정권도 연습하자고 했건만 결국 그는 자신을 깨우지 않고 가버린 것이었다. 

옆에 있는 몇 명의 여종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노부인이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였지만, 사실은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화가 나 있지 않았던 간미는 속으로 흐뭇해하고 있다가, 여종이 그녀에게 금박으로 장식된 옥비녀로 머리를 치장해 주는 것을 보고 급히 말렸다.

“오늘은 이것을 쓰지 않겠다. 상자 안에 있는 비녀를 좀 꺼내 보겠느냐?”

줄곧 장신구를 관리해 주던 여종이 입을 오므리고 급히 이화목 상자에 들어있던 비녀를 꺼내 보이며 물었다.

“노부인, 이것 말씀이십니까? 비녀의 색상이 밝아 노부인의 기품과 잘 어울리네요. 나리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같이 일하는 언니들 말로는, 노부인께서 쓰시는 장신구가 대부분 나리께서 선물해 주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도 경성의 많은 부인들이 노부인과 나리의 깊은 애정을 부러워한다고 전해 들었지요.”

간미는 그 말을 듣고는 즐거워 보이는 여종을 흘겨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색상이 너무 밝은 건 아닌가 싶구나. 나는 이미 땅에 묻힐 나이가 다 되었는데, 이런 것까지 하면 누가 늙은 요괴라 할 것만 같구나.”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는 오히려 은근히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여종은 겉모습은 좀 평범한 편이나 아주 듣기 좋은 소리를 곧잘 했는데, 집안을 관장하고 있는 맏며느리가 살림살이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시중을 드는 하인이 많지 않았고, 씻고 옷 갈아입는 대부분의 활동을 그녀 손으로 직접 했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아이들이 불안해하여 20년 전부터는 그들 부부를 시중들러 보내준 하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다만 부군은 여전히 예전과 같이 하인들이 너무 많이 시중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특히 씻고 옷 입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색상은 노부인께 아주 잘 어울립니다. 어제 나리께서도 노부인께서 젊어 보인다고 하셨는걸요.”

방금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들어온 유모가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운을 떼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미 마흔이 넘었는데, 간미를 반평생 동안 모시고 있었기에 옆에 있던 여종들보다는 더 기탄없이 간미와 대화할 수 있었다.

간미는 그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더 좋아졌고, 붉고 파란 색상이 아리땁게 어우러져 있는 그 비녀를 보면서 자신이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군의 말처럼 그들 나이쯤 되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젠 맘에 드는 게 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면 될 일이었다.

미지근한 물을 다 마시고 나가서 한 바퀴 둘러보려던 간미는 고청운이 목검 한 자루를 든 채 방 안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걸 보았다. 

“부군!” 

간미는 이마에 땀이 맺힌 채 속에 받쳐 입는 헐렁한 흰옷마저 다 젖어 있는 부군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제가 어젯밤에 분명히 일찍 일어나 같이 산책도 하고, 정권도 가르쳐 달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약속을 또 지키지 않으셨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가 들고 있던 목검을 받아오더니, 고청운이 대답도 하기 전에 다시 물었다.

“오늘은 정권 연습을 안 하시고, 검무를 연습하셨나요?”

그러고는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 땀을 닦게 했다.

“음, 검을 가지고 좀 움직이는 것도 참 좋은 것 같소. 지금 연마하고 있는 것은 소보가 창안해 낸 것인데, 내가 직접 시연을 해 보아도 분명 그 효과가 꽤 괜찮다오. 온몸의 근육을 다 움직여 볼 수가 있소.”

고청운은 즉시 대답했고, 간미가 아까 중얼거리며 내뱉었던 원망의 말이 기억나 바삐 변명을 더 덧붙였다. 

“다 내 탓이오. 내가 아침에 당신을 깨우기는 했소만, 당신이 응, 하고 대답만 하고 도로 돌아누워 자는 것이 아니겠소? 나는 당신이 어제 일로 너무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더 깨우지를 못했소.”

육훤은 벼슬에서 내려온 후 달리 할 일이 없어지자 한 무리의 의원들과 함께 권법과 검법을 각각 고안해 냈는데, 이 무술을 고안해 낸 목적은 신체를 단련하기 위함이었다. 육훤은 올해 겨우 75살이었지만, 몸은 고청운의 건장함을 따라오지 못했다. 그 주된 원인으로는 젊었을 때 전장을 누비며 몸이 고생한 탓도 있었지만, 고청운과의 출항 이후로도 세 번이나 더 바다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알게 모르게 몸이 다소 상하게 되었는데, 젊어서는 그런대로 아무 문제도 못 느꼈었으나 나이가 들면서 곧 잔병치레가 시작되고 말았다. 이런 작은 병치레들은 몸을 매우 귀찮게 하고 또 완치도 어려워서 아주 견디기 힘들었다. 

간미는 그를 힐끗 한 번 보고, 머릿속으로 한참 동안이나 부군이 자신을 언제 불러 깨웠다는 것인지 생각해내려 애썼지만,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미아, 이 비취 머리장식을 하고 있으니 정말 아리땁소. 정말이지 온화하고 점잖아 보이는 와중에 귀태까지 나 보이는구려. 몇 살은 더 젊어 보이오.”

고청운은 눈을 돌리다가 간미의 머리에 꽂힌 장식을 보자마자 바로 칭찬의 말을 쏟아냈다.

“이러니 아가들이 다 당신이랑 있는 걸 좋아하지.”

간미는 지난 60~70년 동안 전혀 발전의 기미가 안 보이는 그의 입바른 말솜씨를 들으며, 머리에 장식을 다시 꽂고 웃어 보였다. 물론 이런 칭찬이라도 막상 들으니,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본래 화가 나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고청운과 말장난할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또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간미는 그가 추위에 떨까 봐 서둘러 고청운을 씻으러 가게 재촉한 뒤 시간을 살펴보았는데, 곧 아이들의 문안을 받을 시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