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485)화 (485/504)

485화. 종결장

고청운은 시골로 내려가 지역 풍속에 젖어 몇 년간 지냈는데, 이때 참여했던 수많은 모임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런 고청운이 지금 방자명이 하는 말을 듣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저는 지금도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 꿈은 제게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이지요. 그런 건 언급할 필요도 없어요.”

그는 시호를 받든 아니든 간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받을 수 있다면 기쁜 일이 될 것이고, 받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이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맙시다. 참, 듣자 하니, 방 형은 최근 황립 서원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지요? 특별히 할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가서 교편을 잡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고청운이 제안해 보았다. 그는 지금 장수원을 포함한 오랜 벗들의 정신 건강과 관련된 것에 관심이 많았다.

고청운이 이번에 서둘러 상경한 것은 자신의 동기인 조옥당(赵玉堂)이 세상을 떠난 연유도 있었는데, 임계촌에 남아 있으면 보이는 정경마다 그가 떠올라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았던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금 나날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으니 나중에 친한 벗들 역시 점점 줄어들게 될 거라 이 기회를 빌어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지금을 더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 

“그래, 결국 난 교편을 잡으러 갈 것 같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네.” 

방자명이 대답했다.

* * *

고청운은 결국 73세에 다시 정식으로 관직에 내려오게 되었고, 고전각은 그해 33살의 나이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서길사가 되어 한림원에 들어갔다. 두 아들과 큰손자가 모두 관직에 있게 되자, 고청운은 즉시 결단을 내려 황제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

고청운은 집에서 쉬게 된 지 두 달도 채 안 되어, 황립 서원 원장의 권유로 다시 황립 서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 * *

고청운이 83세가 되자, 그의 집안은 5대가 한집에 살며, 온 집안이 평화롭고 흥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이 해에 치러진 전시 시험 후에 열린 은영연(*恩荣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축하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는 연회)에 60년 만에 특별 초대객의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증손자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니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이는 실로 대단한 일로, 하 왕조 3백여 년에 달하는 역사상으로도 이런 특별 영광을 누린 사람은 30명도 채 안 되었다. 

고청운은 퇴직 뒤에도 여전히 수학과 자연계열 등의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나갔고, 평생에 걸쳐 그의 문하생이 온 천하에 가득 퍼지게 되었다. 그가 이끌던 성남 사합원도 하 왕조 최초의 연구원(硏究院)으로 거듭났다. 이 연구원의 일원들은 ‘학이실용(*学以致用: 배운 것을 실제로 활용하다), 지행합일(*知行合一: 지식과 행동이 서로 맞음)’의 이념을 실천하여 이론을 실제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게 발전시켰는데, 항상 다른 강대국들과 연계하고 학문적 발전을 공유하여 선진 이론을 배워나갔다.

고청운의 부재 뒤에도 이 연구원은 고청운의 제자인 장진지(张振之)가 맡았고, 그 뒤로는 고청운의 제일 어린 제자이자 마지막 제자인 방침(方琛)이 발전시켜 나갔다. 이곳은 상인들의 통 큰 후원에 힘입어 국익과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각종 기구를 연구 및 고안해 냈고, 연구가 난관에 부닥치면 조정의 공부, 한림원과 연대해 난관을 공략하기도 했다.

또한, 고청운은 그간 꾸준히 체력 단련을 계속해 왔는데, 규칙적인 생활, 담백한 음식을 섭취하는 식습관 등 건강 관리에 힘써 온 덕에 122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웃음을 머금고 세상을 떠났다. 이는 그를 장수한 노인으로서 전국적으로 다시 한번 명성이 자자해지게 만들었다. 

역사적으로도 그의 장수 기록은 대대로 보존되었다. 

* * *

고청운이 119세가 되던 해, 그는 여전히 경성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때 고택에는 이미 7대가 한집에 살고 있었고, 그의 자손의 수만 해도 이미 200여 명에 달했다. 고청운이 아직 또렷한 기억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이지 누가 누구인지 다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 해는 증기기관이 상용 도입을 시작한 해였다. 이 해 하 왕조에서는 국력이 강해져 나라가 매우 융창하게 발전해 있었다.

* * *

고청운이 120세가 되는 날, 고택에는 그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워 보통 북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날 고청운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이른 아침부터 깨어 있었는데, 우선 후원에서 정권을 한 번 연마하고 나서 자신이 심은 과일나무와 꽃과 나무를 돌보느라 후원을 몇 바퀴를 돌았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깊게 심호흡을 하자 고청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버지, 왜 또 이렇게 일찍 일어나 계셨습니까.”

고영진이 뒤에서 느릿느릿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본 고청운은 그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를 보고는 비웃듯 말했다.

“우리를 누가 부자 관계로 보겠느냐? 내가 그간 진작부터 말하지 않았느냐, 체력 단련에 신경 써야지 하루 종일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이다. 그간 그렇게 말을 해도 한사코 믿질 않더니, 너희들 좀 봐봐라. 내가 걷는 게 너희들보다 더 빠를 게다. 우리가 함께 서 있으면, 누가 누구를 부축해 줘야 할지 모르겠구나.”

고영진은 어수룩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투덜댔다.

‘누구나 아버지처럼 무서울 정도의 자제력을 가지고 살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자기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오래 장수하는 것에 대해, 그는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그도 따라서 단련을 하게 되는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어머니는 19년 전에 돌아가셨고, 큰형은 10년 전에 별세 했으며, 여동생도 3년 전에 갔으니, 자신은 형과 동생을 대신해 아버지를 잘 돌보면서 그를 즐겁게 해 드려야 했다.

“아버지, 오늘은 폐하께서 직접 오셔서 생신을 축하해 주실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겠습니다.”

고영진은 고청운의 옆에 서서 아버지가 꽃에 물을 열심히 주고 있는 것을 보고 편하게 이야기했다. 

오늘날 아버지의 명성은 마치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기에, 황제가 직접 그의 집을 찾아오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오신다면 오시라 하지. 설마 장생불사를 위한 비법이 적힌 비서를 찾으러 오시겠느냐? 내가 이렇게나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만약 실례를 범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신경 안 쓰실 게다. 그저 희한한 구경 한 번 하시게 되는 게지.”

고청운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미 4명의 황제를 겪었는데, 지금의 황제는 그의 일생에 있어 다섯 번째 황제로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치 동물원의 판다라도 보러 온 듯하겠지.’

장생불사를 위한 비서란, 고청운이 일전에 건강법에 대한 서적을 집필하여 정식으로 출판한 것으로, 뜻밖에도 국내외에서 너무나 잘 팔리고 있었다.

잘된 일이었다. 고청운 그 자신도 이렇게까지 오래 장수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정말이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정도였다. 생각을 해 보라, 미숙아로 태어난 그가 뜻밖에도 120세까지 산 것도 모자라 계속 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미도 있잖은가. 그는 아직도 머릿속이 맑았는데, 귀가 조금 안 들릴 뿐, 눈도 침침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도 웬만한 90세 노인보다 더 건강해 보일 정도였다.

제일 대단한 것은 고청운이 이 연령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정확한 기억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치러온 수재, 거인, 진사 시험에 나왔던 답안들마저 명명백백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기에 이를 조작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으니, 가히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장수 노인이라 불릴 만했다. 

심지어 황제조차 그를 아주 공손하게 대했고, 그가 곁에 두고 오래 사용했던 물건이 집 밖으로 나오기라도 하면 모두들 그 물건을 갖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특히 그의 글씨나 서화 작품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었는데, 사람들의 대단한 선망을 받았음에도 전해지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과연 고청운의 생일날, 황제는 정말 친히 그의 집을 방문했다.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의 친절한 위문을 받게 되자, 고청운은 겉으로는 격앙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증손자가 그의 옆에서 물었다.

“증조할아버지, 제가 방금 밖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증조할아버지께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인지에 다들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고청운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증손자를 쳐다보았다.

“엉뚱한 녀석, 그건 네 아버지께 물어보면 될 게다. 11년 전에 내가 대답 해 준 적이 있었거든. 정답을 말하자면, 아마도 내가 장수한 덕분일 지도 모르겠구나, 허허.”

세상일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청운은 한평생 동안 많은 일들을 겪고 또 여러 재능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자신과 동시대를 산 사람들을 포함해 그 뛰어난 인재들은 제각각 자신만의 분야에서 매우 눈부신 성적을 냈는데, 결국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장수였다! 

‘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점으로 그들을 이겨버린 건 아닐까?’

임종 전에 고청운은 침상에 누운 채, 자신이 살아온 한평생을 돌이켜보았고,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다 해냈으니 허송세월하였다거나 하는 생각이나 후회는 들지 않았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모인 효성스러운 아들과 어진 손자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에 흐뭇하게 눈을 감았다.

* * *

[후세의 기록] 

이름 : 고청운(*顾青云: 1623년 3월 21일~1745년 5월 5일)

성별 : 남(男). 한족(漢族). 

자(字) : 신지(愼之). 

별호 : 일침황량(一枕黄粱), 몽선각(梦先觉) 등. 

시호 : 문정(文正). 

월성 임산현 출신, 하 왕조의 저명한 수학자, 문학가, 화가, 서예가, 교육학자, 소설가이자 번역가. 

영안(永安) 7년(1646),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한림원에서 서길사 검토(检讨), 편수직을 거쳐, 호부에서 주사, 원외랑직을 역임했고, 이후 공부에서 원외랑, 낭중직을 역임했다. 여기서 다시 홍려사경과 예부좌시랑을 거쳐 태자태부 및 태부(太傅)직까지 역임했다.

고청운은 평생을 수학, 수리, 항해 등 방면의 연구에 힘썼고, 이와 관련된 뛰어난 공헌을 이룩했는데, 그가 남긴 저서로는 <산학초해>, <산학재해>, <기하상해>, <미적분 이론>, <측량학>, <고청운유기>. <해권론>, <매화 반지> 등이 있다. 

그는 50여 년간 관직 생활을 하면서 청렴결백했고,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럽게 대했으며, 임산현 고씨 문중의 급성장을 끌어낸 핵심인물이 되었다. 또한, 그는 관리로서만 이름을 떨친 것이 아니라, 서화 등으로도 그 이름을 국내외에 떨쳤는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그의 작품도 다수로, 인물화, 해서(楷书) 작품 등이 있다. 

임산현의 고씨 일가는 집안 대대로 시서로 유명하고 또 영재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하 왕조에서만 진사를 30명 배출해서 문풍이 전성기를 이루었고, 뛰어난 인재들이 한데 모여 있는 대단한 집안으로 불렸다. 

그중에서 고청운, 고영량, 고영진, 고전각, 고창택(顾昌泽)이 제일 주목을 받았던 인물들이며, 이들 5인은 일명 ‘부자손세진사(*父子孫世進士: 부자에서 세손들까지 대대로 다 진사가 됨)’로 불렸다. 고청운의 자손들 역시 ‘본질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나 가정에서의 가르침으로 사람을 가르치고 뛰어난 것을 계승 시킨다.’는 사상에 동참하여 자식들을 교육했고, 그 대다수가 한림원, 공부, 호부 등에서 관직을 역임했다. 

이 밖에 고씨 일가의 가족들은 건강 관리법에 대해 매우 정통하여, 80세 이상을 누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씨 일가가 번성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뛰어난 업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들을 적잖이 배출해냈기 때문인데, 고청운 외에도 호부상서(戶部尙書) 고영량, 전함 선박 설계에 뛰어난 공헌을 기여한 고영진, 승상(丞相)까지 올랐던 고창택(顾昌泽) 등이 여기에 속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고씨 성을 가진 많은 자제들이 대부분 과학 연구와 문학 방면에서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농가자적 고대생활』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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