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기대
양측이 서로 마주하게 되자, 분위기가 대단히 화기애애해지면서 모두들 옛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러다 두 사람이 따로 남게 되자, 방자명은 재빨리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혹에 대해 질문했다.
“별다른 큰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관직에 더 머무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고청운이 빙긋이 웃으며 차분히 차를 우리고는 약간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요, 알았어요. 그만 노려보세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첫 번째로는 전 이미 조정의 대신들 사이의 싸움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제가 태자태부가 되어 황궁에 입궁하여 황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니 영광이 따르기는 했지만, 그들간의 알력싸움과 함께 포섭도 시작되어 오더군요. 저는 비록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나, 아무리 완벽하게 신중히 임한다고 하더라도 빈틈이 생겨버리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들이 너무 많은 정력을 소진한다고 생각했고, 득보다 실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방자명이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것을 본 고청운은 자신의 시선이 자꾸 그의 복부 쪽으로 쏠리는 것을 경계하면서 마저 질문에 답했다.
“무엇보다 스승님과 할머님, 그리고 우리 부모님 모두 다 늙지 않으셨습니까. 임산현이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는 이제 난 곳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지요. 계속 귀향하고 싶다는 듯을 밝혀 오신 스승님의 말씀에 따라 폐하께 기회를 보아 퇴직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폐하께서 이에 동의를 하셨다는 말이야?”
방자명은 백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자네의 말솜씨를 믿지 않네.”
고청운은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찌푸리다가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보고는 얼른 다시 솔직하게 답했다.
“그래요, 알았다니까요. 다시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제가 아주 간절하게 간청을 했고, 스승님과 부모님까지 모두 끌어들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 왕조는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국가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스승님의 연세가 누가 봐도 이미 너무 많으시니, 폐하께서는 끝내 제 간청을 윤허하여 주실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스승님이 100세가 되시면 그때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덧붙이시더군요.”
“백부님…….”
방자명은 일순 표정이 급변하더니 눈꺼풀을 내리깔며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보기에는 우리 백부님께서는 아직 얼굴에 혈색도 잘 비치시고 말씀하시는 목소리도 우렁차시잖나.”
고청운의 귓가에도 지금 밖의 작은 정원에서 방인소가 이제 막 돌을 넘긴 방서의 딸아이와 놀아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실 때 소리가 큰 것은 청력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말씀하실 적에는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지 않으셨어요.”
“어쩐지 모두 목청껏 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네.”
방자명은 이제 깨닫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은 크고, 우리는 늙어가는구나. 어르신들께서는 더 늙으셨어.”
그의 말투가 좀 의기소침해졌다.
고청운은 이해심을 가지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의 아버지 방인례는 2년 전 중풍에 걸려서 줄곧 침상에 누워 지내고 있었는데,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나이를 따져 보면 아직도 방인소보다 15살이나 적은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살아야지요. 더 오래 살아야 합니다.”
고청운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맞다, 그래서 방 형은 내년에 귀경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가 말한 귀경이라는 것은 단순 방문이 아닌 경성으로의 전근을 말하는 것이었다. 원래 방자명에게는 2년 전에도 큰 기회가 왔었는데, 그가 치적이 뛰어난 데다 청렴했고 고청운의 배려와 사돈 집안과의 관계까지 겹친 덕분에, 호부 우시랑직이 공석으로 있을 때 이부에서조차 감히 반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늘에 바람 잘 날 없다더니, 그때 마침 방인례에게 중풍이 닥치는 바람에 병자를 경성으로 옮기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당시 방자명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왕 씨 또한 병으로 쓰러져버린 데다가, 방서도 경성까지 가서 치른 회시에 낙방을 해 버렸다……. 일련의 번거로운 일들이 잇따르자, 방자명은 결국 원래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지.”
방자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넌 그래서 나중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갈 것이냐?”
“당연히 안 돌아가죠.”
고청운이 입을 삐죽였다.
“저희 아버지께서 올해 77세가 되셨습니다. 몇 년만 기다리면 80세가 되시는데, 저는 우리 집안의 독자(獨子)가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상경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면, 저도 고향에서 계속 아버지를 모셔야지요. 만약 모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 왕조의 율법에 명명백백하게 쓰여있지 않습니까.”
방자명은 그 설명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도 참, 처음부터 넌 그런 생각을 했던 거구나. 미적분이 발표되고 나서 자네가 일약에 살아 있는 간판이 되었는데, 어쩐지 폐하께서 이리 쉽게 풀어주셨다 생각했다.”
고청운은 하하 웃다가 이내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
“제가 무슨 없어서는 안 될 사람도 아닌데, 폐하께서 그냥 아쉬운 마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걸 겁니다. 1년 반 정도만 지나보세요, 조정에 인재가 얼마나 많은데요. 폐하께서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의 자조를 들은 방자명은 젊었을 때 많이 하던 몸짓을 가미해 웃으며 한 대 쥐어박았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자신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떠나고를 반복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남다른 관심사를 함께하는 벗을 둘이나 더 사귀었지만 그를 이렇게까지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앞에 있는 이 한 명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벗은 항상 그 하나뿐이었을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한 방자명은 또다시 고청운을 쥐어박았다.
“다시 또 솔직히 말해보시지. 계속 내 배를 훔쳐보고 있는데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게야?”
고청운이 순간 멍해졌다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제가 무슨 명분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방 형의 배가 궁금해 졌을 뿐입니다. 하하, 소싯적에 길거리를 나서면 뭇 소녀들의 시선을 독차지 하던 늠름한 미소년이 나이가 들어 배가 불룩해질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어요! 하하, 제 기억으로는 5년 전까지만 해도 배가 꽤 편평했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말에 방자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고청운보다 두 살 위지만,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만 보면 8살 이상은 차이가 나 보였다.
고청운이 계속 웃고 있는 걸 본 방자명은 부끄러움이 분노로 변모하며 그에게 반격했다.
“이는 부티라고 하지 않나? 대부분 나이가 들면 이렇지. 지방은 행사도 많고 말이야. 넌 남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는가? 몸매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것이야? 우리가 무슨 여인네들도 아니고. 그리고 한 마디 더 해야겠네. 나이가 벌써 이렇게나 많아졌는데 넌 여전히 수염도 안 기르고 있지 않으냐! 다 늙어서 체면을 생각해야지 젊은이 행세는 무슨!”
그는 의식적으로 다듬어 놓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득의양양한 기색을 드러냈다.
고청운은 말이 없었다.
“…….”
좋다, 두 사람이 비긴 것으로 하자.
방자명은 또다시 고청운에게 귀향 이후의 생활에 대해 질문했다.
“어르신들을 잘 모시고, 또 미아도 좀 잘 돌봐줘야죠. 그리고 다시 한번 문중에 있는 인재 중 양성할 만한 이들이 있나 좀 살펴볼 겁니다. 서예 연습도 다시 계속하고 그림도 배울 거예요. 왠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와서야 그림 그리는 것이 유달리 좋아져버렸는데, 그림을 통해 가장 제 기억에 남은 순간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청운은 퇴직 후의 여가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자 일순 이에 대한 기대가 충만해졌다. 그는 자신이 아직 젊으니 더 늙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그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겪을지도 모를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 오래 장수하고 싶었으니 당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자네 그림 실력으로 말인가?”
방자명은 그를 질시하듯 노려보더니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의 넌 서예에만 몰두해서 그림 그리는 솜씨는 그다지……. 흥, 내가 다 말하기 민망하네.”
방자명은 그를 한 번 흘겨보았고, 아까 고청운이 자신의 배를 비웃었던 일을 앙갚음했다.
“선비는 3일을 헤어졌다가 만나도 괄목상대하게 된다고 하지요. 지켜보세요, 지금 제 나이엔 다시 공부를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10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하, 그럼 45년을 배울 수 있게 될 겁니다. 거기에 제 경력까지 더하면, 흥흥, 제가 대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고청운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반박하기 바빴다.
고청운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즈음, 눈썹을 치켜세우고 고민에 잠겨 있는 방자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더 이상 비웃지 않고 있었다.
방자명은 찻잔을 들고 차 한 모금을 마셨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감히 장담할 수 없겠지만, 난 이 애의 사람됨을 알고 있지 않은가. 저 녀석이 그간 보여준 성향과 행동력, 거기에 더해 녀석이 정말 몇십 년 동안 다시 뭔가를 열심히 배운다면 그 결과는…… 됐다, 이제 그를 더 자극하지는 말자.’
두 사람은 또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기 시작했다. 둘의 주제가 공번충(孔繁忠)으로 귀결되었을 때, 방자명이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공씨 가문의 사람들은 이 수년간 이리 뛰어난 인재를 참 많이도 배출해냈는데, 우리 세대에서 가장 걸출한 것은 공번충이지. 확실히 재능도 진짜 실력도 보유하고 있으니. 자네도 보게. 자네가 방금 막 산술학계에서 미적분을 발표했으니, 그 사람들 역시 자기들끼리……. 내 내기까지 걸었는데, 얼마 안 있어 분명 저서를 발표할 것일세."
공씨 가문은 전 왕조에서 너무 큰 타격을 입어 손해가 막중했다. 이에 본 왕조의 황제 역시 그들 가문 사람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공씨 가문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산동 지역의 공씨 가문은 결코 유학을 대표하는 가문이 될 수는 없었다.
고청운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에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방 형이 절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그가 무슨 싸움을 벌이든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일들이나 행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요.”
방자명은 고개를 가로젓고 웃으며 생각했는데, 그것이 정말 자신이 아는 고청운의 성정에 부합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