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진급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길에 잠시 보러 들렀다네.”
사장정은 말끝마다 손을 뻗어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나지막하게 물었다.
“짱짱이는 집에 없나 보군? 자네가 이렇게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데도 아이를 집에 머물게 하지 않고 서원에 보냈나?”
그는 고청운이 집에 도착하여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할 때 고전각도 서원에서 돌아왔는데, 단 이틀만 머무르다가 고청운에 의해 황립 서원의 기숙사에 다시 돌려보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나고 싶으면 모레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을 이리 급히 서두르다니. 그리고 아이는 지금 공부의 기초를 다질 때라 수업이 빠듯할 때인데, 내가 아이를 너무 느슨하게 만들어서는 아니 되지. 이틀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네.”
고청운은 고전각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을 좋아하는 큰손자는 일을 행함에 있어 계획적이고, 인내심이 있었으며,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가지고 잘 자라고 있었다. 또한, 다른 친구들과도 제법 잘 어울렸으며, 성정도 유약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차분해 보이고는 했으나 그래도 어린아이 특유의 발랄함이 남아 있었다. 고청운은 그의 학업 성취 수준이 반에서 중간 정도밖에 못 미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그는 아이의 성향 완성이 학업 성적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사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렇듯 극히 짧은 시간인 이틀 밖에 함께 지내지 못하고 서원으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게 된 것은 둘이 함께 의논한 결과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분명 아이는 그간 서원에서 고생을 많이 겪고 있다고 여기는 집안의 어른들 의견때문에 집에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었다.
이후 고청운과 사장정은 또다시 출항과 관련된 그간의 여정에 대해 다시 한번 이야기했고, 고청운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친한 벗이 한껏 흥분한 채 자신을 계속해서 추궁해대자, 그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도록 계속해서 그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신지, 여행기를 어서 빨리 써서 내보시게. 분명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보일 걸세.”
사장정은 그의 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해 일을 진행해야 하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지 않나. 나는 반드시 자네의 책을 전 중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할 걸세!”
“나도 최대한 빨리 써보겠네.”
고청운은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그를 배웅했다.
갱년기에 접어든 탓인지 사장정은 전보다 말이 많아지고 또 엉뚱해져 있었는데, 아마도 고청운이 다른 서점의 꼬임에 넘어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했다.
* * *
고청운은 갑자기 사장정이 왜 이렇게 안달복달했는지 그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방에 들어와 있던 간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장정이 이렇게 급하게 찾아온 이유를 알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와 그가 어떤 관계이오? 내 보기에 그는 너무 한가해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소.”
고청운이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아마도 그는 계속 연극을 하고 싶어 하다가 안락공주께 또다시 제지를 당했을 것이오. 그래서 두 사람 사이가 잠시 틀어져 내게 달려온 듯하오.”
그는 막 돌아오자마자 경화소보를 보았는데, 실려 있는 기사 중엔 안락공주와 사장정과 관한 소문도 함께 있었다. 비록 가명으로 기사가 보도되었으나, 경성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 기사에 언급된 이 부부의 본명이 무엇인지 알 것이었다.
기사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장정이 연극부터 골동품과 기석 수집, 화훼, 새 키우기라는 모든 취미 생활을 다 섭렵하고 나서도 또다시 연극에 빠져버린 탓에 안락공주와 갈등을 빚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간미도 모임에 참석해 들은 이야기였기에, 이 일로 뭐라 더 말하기도 어려워 그저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제가 배첩 명단을 살펴보니 확실히 송죽서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점 몇 군데서 부군의 책을 간행하고 싶다며 찾아뵈러 오고 싶다고 미리 알렸더군요. 집사가 그들을 응대했는데, 듣자 하니 굉장한 조건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그 어떤 비용도 들이지 않고, 서점 측에서 간행과 관련된 모든 비용을 전부 부담하며, 당신에게도 엄청난 윤필료을 주겠다고 했다고 해요.”
경성에 자리를 잡았거나 혹은 이 도시에서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서점들은 보통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는데, 간미가 말한 이 몇 군데의 서점이라는 곳의 배후에는 분명 대단한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이 말을 듣자마자 문득 왜 사장정이 그런 말들을 꺼내고 갔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 다 거절해 주시오. 나는 아무래도 송죽서재와 작업을 하는 게 더 익숙하오.”
‘이들은 설마 나와 사장정과의 관계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찾아왔단 말인가?’
사장정의 일이 일단락되자, 고청운은 자신의 주위를 빙빙 돌며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던 간미가 동작을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후원에 꽃구경을 하러 갑시다. 나는 집에 있는 옥게빙판이 요 며칠 아주 예쁘게 피어나 있는 것을 보았소.”
가을은 마침 국화꽃 구경하기 딱 좋은 계절이라, 그는 이 아리따운 가을의 정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 그를 보고 너무 말랐다고 하지만, 사실 간미는 그보다 더욱 말라 있었다. 경성으로 돌아온 첫날, 고청운은 밤에 집으로 와서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매우 아팠고, 또한 매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이 가족들 모두를 심히 마음 쓰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이번 일은 그로 하여금 다시는 바다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간미가 기쁘게 ‘네’하고 대답하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후원으로 꽃을 보러 갔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집안에 있다고 해도 이렇게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은 쑥스러웠을 법한데, 지금은 예전과는 달랐다. 부군과 손을 잡고 집에서 함께 다닐 수 있는 것이 마치 신혼 시절로 돌아간 듯 매일 두근거리고 기대감에 설레기까지 하는 것이, 그녀의 마음속에 마치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달달했다.
오랜 이별로 인해 그들은 신혼때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 *
이후 고청운은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의 집으로 만남을 희망하는 배첩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매일같이 사람을 만나고 접대해야 했던 것이다. 해외로 나간 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니, 분명 교제를 좀 더 돈독히 하는 건 필요한 부분이었기에, 고청운도 맘먹고 달려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쪽으로는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외빈들이 경성에 도착했다. 이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하면서 경성의 거리 곳곳에서 일파만파로 관련 소식이 번졌고,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면 으레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제일 흥미진진한 화두로 떠올랐다. 지금의 이 열기는 일전에 이미 한 번 지나갔던 금광에 대한 화제가 훑고 지나갔을 때보다 더욱 열렬했다.
고청운은 홍려사 사람들을 데리고 예부와 호부와 서로 의견을 맞추어 가까스로 외빈이 가지고 온 선물에 대한 답례 관련 사항을 정할 수 있었는데, 결론이 정해지기까지 몇 차례의 논쟁을 거쳐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내용에 승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외모가 하 왕조의 사람들과는 크게 다른 외빈들의 얼굴에서 매우 신이 난 모습을 확인하고는 분분히 그 입을 다물었다.
되었다, 답례품들이 예전에 비하면 좀 박하게 제공이 되었지만 그래도 상대방들은 겉으로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호들갑을 떨면서 하 왕조가 호방하다며 만족을 표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겉보기에 매우 잘 돌려보낸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 하나는 자신들의 곳간에서 너무 후한 답례를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것인데, 혹시라도 상대방이 자신들에게 쉽게 재물을 뜯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고청운이 일찍이 했던 말을 생각하며, 좌중의 사람들은 약간 흥분한 모습이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승전 후 굉장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사건 이후 홍려사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사고방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이번에도 고청운이 제시한 방안에 그리 선뜻 동의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한쪽에서 고청운은 성대한 접대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보고, 또 태상황과 황제가 만족감을 표시하는 모습에 내심 매우 기뻐했다. 결국 이것을 위해 보름을 그리 바쁘게 지낸 보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봤을 때 의외였던 것은, 이번에 방문한 사절단이 경성의 번화한 모습에 매료되어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자 하 왕조에서 자신들을 대함에 있어 처우가 예전만 못한 모습과 자신들의 쪼그라든 보따리를 보고는 몹시 아쉬워하면서 끝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즈음, 조정에서 내리는 포상 역시 분분한 의견을 거쳐 두 달 만에 그 결실을 맺었다.
이번 출항에 대한 성과는 확실히 인정할 만한 공로였기에 승진을 해야 할 사람에게는 관직을 올려주고, 상을 챙겨주어야 하는 이들에게는 상이 하사되었다. 비록 작위를 내려주는 일은 없었지만, 이번 일로 인해 관련된 개개인의 장래는 매우 밝았는데, 3개의 품계를 잇달아 오른 사람도 적지 않았고, 거기에 더해 황제의 마음에 인상까지 남겼던 것이다. 다들 이번 출항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육훤이 7개의 품계를 단번에 올라 종3품의 회원장군(怀远将军)에 등극한 것과 비교하면, 사전에 계속해서 주목받고 있던 고청운에 대한 포상은 저조한 편이기는 했다. 일전에 그와 관련하여 고청운이 호부에 간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었으나 지금은 이와 관련해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고청운의 표정을 훔쳐보며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매일 태연자약하게 계속 출근을 계속하면서 예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을 보고는 내심 탄복했다.
이 사람은 정말…… 자신의 감정을 잘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지 아직은 그다지 급해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막 애태우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마침내 고청운에 대한 포상이 내려졌다!
그의 근무처는 여전히 홍려사였는데, 다만 그의 직급이 정4품직에서 종3품으로 오르게 되었다. 또한 그 혼자만 승진한 것이 아니라 홍려사 전체 인원이 함께 승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홍려사는 결국 광록사, 태복사와 대등한 관청으로 변모하게 된 셈이었다. 이 결정으로 인해 홍려사의 관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광분했다. 이번 승진은 모든 사람의 노력이 반영된 것으로, 관 소경이나 봉 소경 역시 품계가 반 단계씩 오르게 되어 정5품이 되었다. 모두에게 몫이 돌아간 만큼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황제와 내각에게 있어 홍려사라는 관청이 예전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일부 사람들은 앞으로도 대규모 출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이후 고청운은 부쩍 홍려사의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길을 걸으며 자신에게 예를 올리는 사람들의 태도가 예전보다 갑절은 더 열정적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부탁한 임무를 모두가 순식간에 수행해 주는 것을 보면서 삽시간에 일이 이렇게 잘 풀리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고청운은 마침내 이름뿐만이 아닌 명실상부한 황자가 스승으로서 예를 표해야 하는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어, 매일 궁에 들어가 황자에게 수업을 해야 했다. 출항 준비로 바쁘다며 핑계를 대면서 입궁해서 상징적으로 한 과목만 가르쳤던 3년 전과는 달랐다.
고청운은 갑자기 매일같이 계획을 세워 황위를 계승하고자 하는 쉽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녹록지 않았고, 여전히 부담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