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짐작
이들은 다시 몇 마디 더 잡담을 나누었는데, 고청운은 한편에서 안색을 가다듬고 관 소경이 정리해 준 자료를 들춰보면서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다.
고청운은 이 3년 동안 홍려사에서는 무슨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고, 안배에 맞춰 잘 진행됐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남은 다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외빈들을 경성으로 모시는 임무를 준비하는 데에는 아직 보름 정도의 기한이 남아 있네. 우리는 접대만 잘하면 되는 것이니, 너무 긴장할 필요 없네. 그저 이번에는 접대해야 할 사람이 좀 더 많고, 필요한 통역 인원이 좀 더 많은 것 정도니 폐하께서 특별히 따로 뜻을 알려 주시는 것만 아니면 상례에 따라 준비하면 될 것이네.”
고청운이 말을 꺼냈다. 자체적인 절차와 상대에 따른 대우의 정도는 규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니, 외빈 접대에 대해 이미 능숙하게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관 소경과 봉 소경의 안색에도 변화가 없었다. 이번에 온 외빈들의 출처가 너무 복잡하고 그들이 사는 지역이 하 왕조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세 사람은 이어서 다른 공무들에 대해 상의해 나가며 한참을 다시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고청운이 피곤한 기색을 보이자, 관 소경과 봉 소경은 분별 있게 바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들이 자신의 집무실을 떠나자, 고청운의 얼굴에 있던 피곤함 역시 금세 풀렸다. 그는 잠시 가만히 앉아있다가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왔다 갔다 해 보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책을 꺼내서 훑어보다가 이따금씩은 또 벽에 걸린 서예와 그림 작품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는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황제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황제는 자신을 호부 우시랑직에 임명하려 할 것이었다. 그 직위는 정3품의 관직이었는데, 고청운은 그것보다도 권력이 대단한 호부의 우시랑직이라는 게 가장 놀라웠다. 이 자리는 서로 빼앗지 못해 다투는 아주 인기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호부에 다년간 근무한 적이 있었으니 자연히 이곳이 호부의 3인자가 앉는 자리이며, 대단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인가?’
그랬다. 호부로 들어간다는 것은 큰 도약과도 같았다. 지방 관리 자리를 역임해본 적도 없는 그가 지금의 종4품직에서 일약 3품 품계를 지닌 관리가 될 수 있다니, 이것은 확실히 이번에 출항에 나섰던 공로 덕분이라 말할 수 있었다. 이 직위는 황제가 그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얼마나 관대한 대우를 내려주는 것인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호부는 업무가 바쁜 관아였다. 접대해야 할 일도 많았고, 운용해야 할 대인 관계도 복잡했기 때문에 해당 부서로 전근을 가게 되어 직면할 환경을 생각하면 고청운은 좀 달갑지 않기도 했다.
그는 이 정치라는 복잡한 영역에 너무 많이 몸을 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서 빨리 이번 출항했던 기록을 정리해 제대로 쓰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 경험을 책으로 엮어내어 정식 출판을 해도 됐고, 혹은 조정에 보고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 기록을 비밀에 부치라고 명령이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기록은 적어도 유익하게 사용될 터였다.
이번에 바다에 나가 겪은 일들은 정말이지 그를 감개무량하게 만들었기에, 그는 이를 바깥에 알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무인도 지역에 대한 기록만 제대로 남기더라도, 후세에 다른 나라와 주권을 쟁론해야 할 때 아주 큰 발언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어렴풋한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 어떤 자료를 보았던 기억이 났는데, 조상들이 남긴 어떤 섬들에 대한 자료들이 있었던 덕에 해당 섬이 자기 나라의 주권 범위라고 인정받는 사례가 있었다. 바로 여기에 착안하여, 그는 항해 중에 만난 섬들에 비석을 세워 자신 족구의 영토임을 알렸고, 거기에 더해 그 지역의 위치와 그곳의 자원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재하여 기록을 남겼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곳은 이미 그에게 발견될 수 있는 차례가 가지 않았지만, 주인 없는 일부 황무지를 점거해서 다른 이들 덕분에 일찍부터 들여온 옥수수, 고구마, 감자들을 수확하여 어쨌든 빈손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 그는 호부로 가고 싶지 않아졌다. 호부보다는 차라리 홍려사라는 비교적 한가한 부서에 남아 있어야 책을 더 잘 집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줄곧 이 일을 고민하고 있다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미 퇴근 시간을 넘겨 버린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 * *
고영진이 문 앞에서 고청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느냐?”
고청운이 웃으며 물었다.
“내가 삼원이에게 집으로 돌아가 한 달 정도 쉬라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감히 집무실까지 올라와 나를 불러주지 못했더구나. 그래서 좀 늦게 나왔단다.”
고영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청운에게 바짝 붙어 앉아서는 마치 어렸을 적처럼 그의 팔을 끌어안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이제 막 도착했어요.”
그는 말하면서 고청운의 팔을 상세히 만져보더니 가슴 아픈 듯 말했다.
“아버지, 정말 많이 마르셨어요.”
고청운은 듣자마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미 이 말을 너무 여러 번 듣고 있었다. 게다가 이 일로 인해, 간미가 건강을 북돋아 주는 비법을 공수하기 위해 사방을 수소문하여 헤매기 시작해서, 그는 구기자, 새박뿌리, 호두, 검은깨, 대추…… 등을 앞으로도 매일 같이 먹어야 했다. 이 약재들은 기혈을 보충하고 근골을 강화하는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는 그녀의 노고에 감동했다. 거기에 부모님까지 한쪽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고청운은 이것들이 자신의 건강과 관계되어 있기도 했기에 주는 것마다 거절하지 않고 매일 제시간에 용량에 맞게 잘 챙겨 마셨다.
이제 와서 또 이 이야기가 나오자, 고청운이 급히 말을 이었다.
“안심하거라, 할머니와 네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지 않으냐, 나는 곧 예전처럼 회복할 게다.”
고영진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참, 아버지, 혹시 이번에 출항하셨던 경험을 기록하실 예정은 없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록으로 남기신다면, 가장 사실적인 여행기가 될 테지요.”
그는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건 바로 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그러더냐?”
고청운은 웃음을 머금고 그를 한 번 노려보며 가볍게 말했다.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니냐?”
“아니, 제가 말씀드린 것은 사실이에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희가 조금 있다가 집에 도착하면 아마도 사 아저씨(*사장정)께서도 와계실 것 같은데요? 그분은 이런 일들에 대해 아주 궁금해하고는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간 고청운은 사흘간 집안에서 머물고 쉬기만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보통 그를 찾아오는 방문객은 거의 없었다. 다만 오늘 아침 성지를 받들고 황제를 알현하고 온 이상, 그는 고영진이 말하지 않았더라고 하더라도 일어날 상황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분명 앞으로 열흘 보름 동안은 집 문턱이 무너지도록 지인들이 드나들 것이었다.
고청운은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출항에 대한 모험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여행기를 미리 글로 옮겨 놓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랬다면 누군가 출항에 대한 경위를 묻거든 바로 책을 꺼내어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 * *
고영진의 말은 꽤 예견능력이 뛰어난 발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청운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집사 방충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나리, 부마 나리께서 화청(*花厅: 화원 등에 설치된 비교적 크고 전망이 좋으며, 밝고 아름답게 장식된 응접실)에서 기다리신 지 반 주향(*약 15분) 정도 되셨습니다.”
고청운은 그 말을 듣자마자 실소를 터뜨렸다.
“이 녀석, 분명 또 노리고 온 게로군.”
‘사장정은 내 퇴근 시간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 않나? 난 분명 모레면 휴무일인데……. 그때까지 곱게 기다려 주지 못할망정 이렇게 바로 집까지 찾아 들어와 있다니, 사장정이 정말 급했나 보군.’
사장정과 만났을 때, 고청운은 그와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그의 연달아 쏟아지는 열정적인 안부에 파묻혔다.
“신지, 3년 만에 처음 참가하는 아침 조례는 느낌이 어땠는가? 갑자기 어색하지는 않았고?”
사장정이 고청운의 손을 힘껏 쥐었다.
“폐하께서 당신을 어서방에 한참을 머물게 하셨다고 하던데, 폐하께서 무슨 상을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시던가? 승진하는 건 아닌가? 이번 출항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내가 보기에 자네는 살이 이렇게나 다 빠져버리고, 더 그을리고 더 말라버린 것 같네. 아이고, 정말 고생을 많이 한 게로군.”
사장정은 얼굴에 가득 탄식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의 시선은 계속 고청운의 위아래를 훑으며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참, 자네, 다녀왔으니 여행기를 써 보지 않을 텐가? 아니면 화본을 쓰는 건? 기억하게, 자네는 원고를 다 작성하고 나면 반드시 우리 송죽서재에 원고를 인계하여 각인해야 하네. 흥, 다른 사람들이 이걸 뺏으려고 한다면 어림없지!”
고청운은 말이 없었다.
“…….”
어이가 없었던 고청운은 생각을 좀 해 보고, 곧바로 그의 손에서 벗어나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몸을 기울여 이화목으로 만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생화를 손으로 매만져 보았는데, 그 표정이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신지, 자네는 어찌 말이 없는가?”
사장정은 대화를 하고 있던 사람이 가버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몸을 틀었는데, 옷 너머로 그의 호리호리하게 유려한 자태가 드러나 보이며 빼어난 몸매와 어우러져서 안 그래도 과할 정도로 준수한 그의 얼굴이 유달리 눈이 부셨다.
고청운은 특별히 한 번 사장정을 바라보고 나지막한 기침을 했다.
자신의 친한 벗도 중년이 되자 용모가 젊은 나날만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은 사장정에게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해 준 것 같았다.
상대와 비교를 해 보자니, 고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는 너무 거칠게 변모하지 않게 자신을 잘 보양하고 가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던 겐가?”
정신을 차린 사장정이 고청운 옆에 앉아 원망하듯 말했다.
“다 자네 탓이네. 이게 다 자네를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래, 그렇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격동하지는 않았을 걸세.”
그는 일찍이 고청운을 만나러 오고 싶었지만, 너무 이르게 찾아가 그의 휴식 등에 영향을 주게 될까 봐 잠시 들떴던 마음을 자제하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 질문들은 모두 서신을 통해 물어보았던 것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내가 어찌 대답을 할지 궁금했던 게야?”
고청운은 다 큰 남성이 아직도 이렇게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차마 계속 그 모습을 주시할 수가 없어져서 연이어 말했다.
“말해보게, 자네는 이미 모레 나와 만나기로 약조를 해놓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겐가?”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해서 서신을 통한 연락까지 안 했다는 건 아니었기에, 이 며칠 동안 고청운의 집으로 배달 온 서신은 유달리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