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하선
이날 고청운을 비롯한 사람들은 여전히 해상에서 항행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돌연 육지가 보였다.
배에서는 삽시간에 환호성이 몰아쳤다.
지금 고청운은 자신의 선실에서 진지하게 항해일기를 쓰고 있던 중이었다. 항해 중에는 대부분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별다른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틈틈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매우 중요했다. 당연히 그는 이런 남는 시간에 능숙하게 붓을 들어 도중에 보고 듣고 겪을 일들을 상세히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선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고청운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는데, 이미 귀에 익숙해진 발자국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육훤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가 얼굴에 웃음만 띄운 채 말했다.
“스승님, 육지가 보입니다.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마 두 시진 정도만 더 가면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요. 아, 드디어 도착입니다. 아무리 제가 선상 생활을 오래 했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중간에 쉬지 않고 오래 배에만 올라타 지내본 적은 없으니, 이런 생활이 바로 익숙해지지는 않는군요.”
육훤이 말했다.
“신기루를 본 것이 아닌 게 확실하더냐?”
고청운 역시 선실 안에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진작부터 듣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마디 질문했다.
“이번엔 분명 신기루가 아닐 겁니다.”
육훤의 말투는 당당했지만, 고청운의 의심 어린 눈초리에 점점 자신감이 부족해지는 듯했다.
“아마도요. 저희가 그렇게까지 운이 없겠습니까?”
고청운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 요 몇 개월간의 항해 생활에서 그들은 해일, 호우, 등…… 많은 일들을 조우하게 되었는데, 한 번은 신기루를 마주하기도 했다. 일전에 누군가 신기루를 실제로 여겨서 모두에게 육지가 나타났다고 알렸다가 허탕을 쳤던 것이다.
뒤이어 그는 고청운의 맞은편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손에 잡히는 대로 책상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는데, 그 종이에는 한가득 글씨와 공식들이 적혀 있었다. 육훤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중 하나를 한참을 쳐다보다 물었다.
“스승님, 이것은 무엇을 계산하신 겁니까?”
고청운이 붓을 내려놓고 손목을 풀어내면서 답했다.
“신기루란 일종의 빛 굴절과 반사 현상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지. 요 며칠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그냥 해보는 김에 굴절 각도에 대한 계산을 해보고 있었단다.”
그는 전생에 배웠던 물리 지식을 대부분 잊어버린 게 생각나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육훤은 그 말을 들었음에도 자신의 눈앞의 종이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대단해 보이기는 했다.
“스승님, 이번에 저희가 도착하는 곳이 여송(吕宋)섬인가요?”
“노선상으로는 그렇구나.”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송섬은 한인들이 출몰할 정도였으니, 항로가 확실한 곳이었다.
그들은 바다 위에서 꽤 많은 시간을 머무르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수사들이 해적을 퇴치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었다.
이번 출항의 목적 중 하나가 해적을 퇴치하고 그들이 이용하는 항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이 연안을 이용하던 해적들만 재수가 없어진 것이었다. 이들이 이 연안을 장악하고 나자 해적들은 먼지처럼 사라지거나 혹은 투항하거나 귀순하게 되었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는 그들을 뒤따르던 상인들이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들은 1년 내내 바다로 나가 지내던 이들이라 이쪽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장병들은 해적을 퇴치하고, 고청운은 기술자 인원들을 데리고 각 섬을 돌아다니며 자원을 탐색했는데, 간단한 기록을 남기는 일에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여송섬이라…….”
육훤이 중얼거렸는데,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그곳은 서양 세력의 주둔지가 아닙니까.”
게다가 이전에 그들과 격돌했었던 세력이었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보았다. 바다로 나선 후, 그는 자신이 전생에 그리 손쉽게 얻었던 지식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조상들이 애써 얻어냈던 정보들로, 그는 지금 와서 이런 정보들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매번 이를 떠올릴 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뭍에 오를 때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 선박에 담수도 보충해야 해. 요즘 비가 너무 적게 내리는구나.”
고청운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자신의 옷 냄새를 맡아보았는데, 음, 아무리 신경 쓴다고 해도 땀 냄새를 어찌 할 수는 없었다. 날수를 헤아려보니, 벌써 예닐곱 날 동안이나 목욕을 하지 못했다. 담수가 부족해져서, 그가 앞장서서 물 절약을 실천해 보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선한 채소와 관련해서는 그는 관원의 신분이라 채소를 공급받아서 섭취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이번 출항에서는 특별히 콩과 마늘 모종 같은 것을 많이 가져갔기에 그보다 아랫사람들도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뭐가 두렵습니까? 우리 쪽에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이렇게 큰 화포도 있는 걸요. 그들이 농간을 부리고 있는지 이번에 반드시 제대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육훤은 남들 앞에선 말없이 듬직해 보이는 자였지만, 고청운의 앞에선 거침없는 ‘말솜씨’를 뽐내고는 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
고청운이 말했다. 사실 그는 육훤이 속으로는 매우 용의주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육훤은 밖에서 해적을 낙화유수처럼 때려 부숴댔지만, 후방에서는 책략을 세워 전술 전략을 짜는 장수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분주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육훤이 ‘네’ 하며 화답했다. 이어서 두 사람은 뭍에 올라서 어찌 대응할지, 또 상황은 어떠할지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그들 둘은 사전에 일에 대한 의견을 맞추어 본 후에 비로소 다른 관원들을 한데 불러 모아 상의하고는 했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일의 효율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 * *
이날 해가 막 지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마침내 육지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항구의 부두에 마치 강적과 대치하고 있는 듯 삼엄하게 경비한 채 완전 무장을 하고 다가가는 건, 고청운 등 일행에게는 진작에 익숙해진 일이었다. 이렇게 큰 배가 다가오는데, 눈이 멀지 않는 한 아주 멀리서부터 볼 수 있으리라.
곧이어 작은 배 한 척이 항구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배에 탄 사람은 외국어를 구사했다. 양측은 서로 교류를 시작했는데, 상대방은 고청운 측의 선단이 금색 용을 그린 깃발을 나부끼고 있고, 황제가 내려준 문서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비록 글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표정이 많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고청운이 이끄는 선단은 여기저기 싸우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또한, 상대방도 워낙 실력이 출중할 테니, 그들은 당연히 잘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은 뒷짐을 진 채 갑판 위에 서서 태연자약하게 좌우를 둘러보았는데, 모두들 흥미진진하다는 듯 육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구경하고 있는 모습들이 매우 흥분한 듯 보였다. 또한, 그들은 등 뒤에서 버티고 있는 강대한 수사 병력에 대해 매우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항구에 배를 입항시킬 수는 있었지만, 고청운 등 일행은 안전을 위해 뭍에 올라가지 않고, 우선 일부 후방 인원을 보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오도록 했다.
그날 저녁, 고청운은 마침내 온수로 편안하게 목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고청운은 익숙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일찍 일어났다. 그는 먼저 갑판에서 정권을 반 시진 정도 연마한 후, 땀을 닦고 다시 책을 좀 읽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아침 식사를 들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자, 현지 항구 도시의 총독이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청운 일행은 마침내 단정하게 차려입고 해안으로 올라갔다.
고청운 일행은 배 위에서 출렁대던 느낌에만 익숙해져 있던 탓에, 막 단단한 대지를 밟은 후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야 계속 걸어갈 수 있었다. 부두에는 일찌감치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는데, 이들의 시선을 통해 그들이 가진 호기심과 경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백인과 토착민 외에도 일부 피부가 황색인 한인들도 눈에 띄었는데, 그들의 눈빛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서로 귓속말로 소곤소곤 속삭였다.
“전해 듣던 것보다는 한인이 적은데요.”
고청운과 육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이곳에서 지내는 한인들이 꽤 많았다는 기록이 있었거늘. 지금 얼핏 둘러보니, 그 수가 적어졌구나. 그들이 현지에 융화된 것 같군.”
“제가 듣기로는 본토로 다시 돌아간 이들도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섬으로 옮겨갔다고도 합니다.”
육훤도 나지막이 대답했다.
“스승님, 전 왕조에서 출항했었던 흔적을 여기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다 묻어버리기에는 200여 년의 세월로는 부족했을 것이니,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게야.”
고청운은 속으로는 감탄하고 있었는데, 전 왕조에서 행한 출항이 분명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그들이 출항하여 거친 곳들 중 일부 지역의 토착민들은 그들에게 매우 친절했고, 뜻밖에도 전 왕조에서 서양으로 출항했었을 적의 자료 역시 남아 있었다. 이는 그를 매우 기쁘게도 또 유감스럽게도 만들었는데, 조정 대신들이 근시안적으로 접근해 항해 자료를 모두 훼손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훨씬 많았을 것이고, 후세의 전 왕조에 대한 평가도 훨씬 더 높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육훤은 그저 관련 질문만 했을 뿐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럴 시간에 해적 소굴을 몇 군데 더 찾아가 싸움을 벌이면 안 되는 걸까?’
그는 이번 해적 소탕을 시작할 때 처음엔 임무라서 수행을 했으나, 나중에는 이익을 위해서 해적을 소탕하게 되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건지게 되는 해적들의 전리품이 매우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전장에 나선 장병들을 싱글벙글 웃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고청운은 눈앞에 펼쳐진 땅을 바라보았는데, 이곳의 환경은 비교적 열악했다. 부두에는 오염수가 넘쳐났고 쓰레기가 사방으로 버려져도 사람들은 여전히 본체만체하고 있었다. 이곳의 건물들을 살펴보면, 목조 구조물도 있고 혹은 목조와 석재를 흙으로 올려 지은 건물도 있었는데, 표시된 표식을 보면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창고, 상점, 교역 시장…… 등이 있었는데, 이곳은 여러 언어가 교차하며 사용되고 있었고, 선착장에 바닷바람이 불어오면 고약한 냄새가 함께 풍겨왔다.
몇 달 전만 해도 코를 틀어막았던 고청운 등 일행은 이젠 이러한 냄새에 익숙해져 있었다.
“존귀한 동양에서 온 손님들,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배불뚝이 중년 백인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보기에는 매우 친절해 보였다.
그의 옆에 한인의 모습을 한 중년 남자가 통역으로 따라왔다. 그가 구사하는 한어는 그래도 정통한 표준어였다.
고청운은 더 이상 사방을 살피지 않고, 특별히 상대방 쪽을 주의하여 살펴보았는데, 그곳에 자신이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예상치 못하게 예전에 인질로 잡았던 외국인 총독을 여기서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은근히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총독 각하, 실례합니다.”
고청운이 입을 열고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자, 상대방은 이에 놀라워했다. 비록 양국이 예전에 전쟁을 벌인 적이 있지만, 그러나 이익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번에 해안으로 나선 것은, 담수 등의 필요 물자를 보충하는 것 외에도 더 중요시한 것은 바로 무역의 성사였다.
이번에 그들은 국내에서 가져온 상품 외에도 해적들이 노획한 전리품도 여기서 팔아야 했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눈앞에 펼쳐진 항구에서는 대부분의 화물이 수용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고청운은 일찍부터 각지의 서로 다른 시세 차익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는 걸 묵인하고 있었다. 적어도 조정의 대신들이 늘 600만 냥의 은자를 노상 거론하지 않게 하려면, 무역을 통해 이번 출항에 들인 비용을 어느 정도 회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 역시 그들이 온 목적을 듣고 나서야 얼굴에 웃음이 더 크게 번졌다.
싸우니 마니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여서, 당연히 무역을 하느냐 마냐 하는 문제를 함께 연계시킬 필요는 없었다.
고청운과 현지 총독과의 교류가 끝났을 때, 그다음 이어지는 것은 민간 상단의 자발적 무역 행위였다. 특히 그들 선단의 뒤를 따르던 상인들은 일찌감치 흥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무역을 하는 것을 관장하는 또 다른 부문의 관리들이 있었기에, 고청운은 사람들을 데리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이곳 개신교 교회를 둘러보고, 그 지역의 한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까지도 고향말을 구사할 줄 알았고, 또 어떤 일부는 익숙한 고향 말투에 매우 설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