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사절(使節)
고청운은 출근한 관청에서 봉 소경의 얼굴에 수심이 어렴풋이 감도는 것을 발견했다. 보아하니 그 역시 황제의 의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는데, 다만 안색만 평소와 같이 유지한 채, 개인 도서관이나 황실 장서루를 드나들며 자신들이 이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항해에 관한 책들을 찾으러 다녔다. 그러다 해외와 관련된 서적을 발견하면, 서슴없이 구매해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집안 분위기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 * *
10월 말, 황제가 성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인즉슨 고청운에게 태자태부(*太子太傅: 태자의 덕의(德義)를 기르는 일을 맡는 종1품 벼슬)라는 종1품에 해당하는 허직을 내려준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요 직책은 황자들에게 산술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고청운은 이번 성지가 그렇게 놀랍지 않았는데, 이 일이 사전에 조짐이 보였었기 때문이었다. 내각에서 이 일이 논의되면서 소문이 새어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성남의 산술학 본거지 쪽에서는, 최근 2년간 두 가지 슬퍼할 만한 일이 연달아 생겨났다.
덕망이 높았던 장 대사(蒋大师)와 우 대사(于大师)가 연이어 돌아가셨기 때문인데, 두 분이 각각 79세, 73세의 나이로 생로병사의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다른 사람들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상응하여 산술 학계의 발전 추세는 단번에 주춤하게 되었고, 다른 학파가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 와서 과거 시험의 시험 항목에서 산술을 퇴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산술 학문의 중요성을 고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었다.
산술이라는 학문은 앞선 몇천 년의 역사 속에서 대다수의 시간 동안 그다지 대접받지 못해 오고 있었다가 가까스로 전 왕조와 이번 왕조에서 큰 발전을 이룩한 것이었다. 특히 본 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조예가 깊어지고 중요성이 대두되며 과거 시험에까지 등장하는 학문이 되었는데, 이것은 이미 절대적인 학문적 진보를 이룬 것으로, 많은 지식인, 혹은 산술 학계의 인물들이 여러 해 동안 노력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2년 동안 장 대사와 우 대사가 뜻밖에 이렇게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 남은 인재들을 모두 긁어서 모아보니, 이 산술 학계 내외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라고는 뜻밖에도 양불언과 고청운만 남게 되었다. 고청운은 40살에 모두로부터 ‘대사’라고 불리기 시작했지만, 그 이후에 떠오른 후발주자들은 아직 대중들을 납득시킬 만한 업적을 내지 못한 채 그저 후발주자로만 손꼽히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각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인 고청운이 학술계에서 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근래에 30세가 된 황제는 황자 6명, 공주 8명을 두고 있었는데, 가장 큰 황자의 나이는 12세였고 제일 어린 황자는 이제 갓 세상에 태어났다. 그중 황후 소생의 적자 황자는 오직 한 명뿐으로, 이제 막 4살이 되었는데 아직 공부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아직까지 태자로 봉해지지도 않았다.
고청운이 얻게 된 이 태자태부라는 허직은 그의 명성을 끌어올려 주고, 그가 받던 녹봉이 대폭 증가한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무슨 특권 같은 것은 없는 직위였다. 그의 실제 직위는 아직 홍려사경이었는데, 남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역시 바로 이 직함이었다.
* * *
집안사람들은 고청운이 얻게 된 이 직함에 대해 반응이 엇갈렸지만, 전체적으로는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소진씨는 이런 허직이니 하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그저 아들이 승진한 줄만 알고 주방에 음식을 준비시켜 축하를 하려고 했다. 고대하는 그래도 조정의 관직 제도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아직 약간의 의혹이 있어 질문했다.
“어쩌다 이렇게 한 번에 종4품에서 종1품으로 오를 수가 있다는 말이냐. 세상천지에 그렇게 빨리 오를 수 없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구나.”
고대하가 기뻐하던 중에 대뜸 물었다.
고청운은 살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다행히도 이번 성지가 집안에 팽팽하게 대치 중이었던 분위기를 깨뜨려 주었던 것이다. 모두들 기꺼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분위기로 전환이 되었는데, 그 직전까지는 이 분위기가 그를 매우 괴롭게 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손자 고전각이 있어서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중간에 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해주었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건 이름밖에 없는 허직일 뿐입니다. 듣기에만 좋은 직위죠. 제가 여야 안팎에서 이런 허직을 부여받은 사람을 따져 보니, 한 열 명 안 되게 있는 것 같습니다.”
고청운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다. 그 누구든지 황자에게 공부를 가르쳤던 사람이라면, 크게 잘 가르치지 못한 경우만 아니라면 일부는 영광스런 명예를 누릴 수 있었는데, 일부는 정5품의 대학사(大学士)라는 직함이 붙기도 했다.
고청운은 마침 정4품 관직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산술 학계에서 명성이 드높은 2인자라는 명성도 함께 누리고 있는 데다가, 자신의 짐작으로는 자신이 황명으로 바다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도 한몫하여 자신에 대한 대우가 순식간에 이렇게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청운은 뒤에 덧붙인 자신의 추측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역시 실세라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로구나.”
고대하는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당연하지요, 실세가 있어야지만 그 혜택이 가족들에게까지 미치는 법입니다.”
다만, 이번에 간미나 소진씨는 그의 승진과 더불어 고명이 함께 오르지는 않았기에, 고청운은 그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고대하와 소진씨에 비해, 방인소와 간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폐하께서는 이미 너를 바다로 내보내기로 정하신 모양이다.”
방인소는 요 몇 년 동안 아무런 근심거리도 없이 지내 오고 있었다. 퇴직 후의 생활은 정말 더없이 한가로웠고, 게다가 경성이란 곳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데다가 총체적으로 번화하고 풍요로운 지역인 덕분에 매일같이 주고받는 정보가 아주 많아, 그는 정신적으로도 매우 잘 지내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듣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려졌다.
고청운은 이번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던 일을 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그 일로 하여금 가족들을 걱정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이는 불효가 아닐 수 없었다.
“오냐, 황제 폐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지. 이 노부가 네 부모를 잘 이끌어 줄 테니, 미아한테 다시 잘 얘기해 보거라. 이 일로 괜히 사이가 틀어져서는 아니 된다.”
결국 방인소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고청운에게 제안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미아가 지금 저한테 화가 나 있지만, 그래도 제가 그녀와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청운은 크게 기뻐했는데, 방인소가 고대하를 비롯한 가족들을 설득해 준다고 하니 이보다 더 마음 놓이는 해결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
* * *
이날 저녁, 세면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고청운은 간미가 작은 응접실의 책상 앞에 앉아 손에 책을 한 권 들고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고청운이 간미에게 말을 걸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소, 침실의 촛불만으로는 밝지 않다고.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책을 보는 건 눈에 좋지 않소.”
비록 책에 쓰인 글씨 크기는 큰 편이긴 했지만, 그는 여건이 되는 한, 늦은 밤 책을 읽을 때마다 촛불을 몇 개씩 더 켜 두고는 했다.
간미는 그를 한 번 쳐다보았을 뿐,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풀어헤쳤고 평소처럼 빗을 들고 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간미는 그를 한 번 보고는 종이 달린 줄을 당겨서 사람을 불러다 뜨거운 물을 가져와 그의 발을 담그게 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고청운의 손에서 빗을 뺏은 뒤 두피를 열심히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고청운은 그녀의 동작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무가 이미 배가 되었으니 이제 이 일은 돌이킬 수 없소. 성지가 나왔다는 건 폐하께서 이미 결정을 내리셨다는 뜻이오. 하지만 안심하시오. 내 반드시 안전하게 돌아오리다.”
이 보름 동안 간미는 생활 방면으로는 여전히 그를 극진히 보살펴 주고 있었지만, 그와 대화하는 건 내키지 않아 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이런 분위기가 사뭇 적응되지 않았다.
“저는 당신이 하는 보장을 믿을 수 없어요.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남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번 출항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는데, 구태여 당신만 이렇게 제일 먼저 머리를 들이밀 듯 참여하시다니요.”
간미는 결국 자비를 베풀어 입을 열었지만, 어투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황제 폐하께서 언제 바다로 나가라고 하시던가요?”
“올해는 이미 늦었소. 적당한 계절풍이 불어오는 것을 다시 기다리면, 아마도 11월에서 12월 사이가 될 것이오. 아직 1년 정도 시간이 남아 있는데, 선박은 이미 준비 작업에 들어갔지만 아직 그 수가 부족하다오.”
고청운은 너무나 기뻐하며 간미의 손을 꼭 잡고 열띤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에서 이번에 준비한 선박은 일전에 존재하던 그 어느 선박보다 그 규모가 크다오. 풍랑에 견딜 수 있는 능력을 크게 끌어올렸소. 우리가 잘 준비하면 분명히 평안하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아직 1년이 남았다는 말은 했지만, 이 일정은 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간미는 어쨌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을 끝낸 직후에 두 사람은 마치 처음처럼 좋은 사이로 돌아가 있었다.
고청운은 전신이 홀가분해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일로 한참 동안 온 가족에게 등한시 당하는 나날을 지내보았는데,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 * *
사흘 후, 과연 황제는 고청운을 사절(*使節: 나라를 대표하여 일정한 사명을 띠고 외국에 파견되는 사람)로 삼아, 이번 출항 임무를 전담하여 전면적인 책임을 총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왕 외교 사명을 받고 바다를 건너 외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무력적인 비호 세력도 빠뜨리고 갈 수는 없었다. 황제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임무는 기어코 육훤이 맡아 군대를 이끌고 동행하게 되었다.
육훤은 천주에 있다가 이번 결정을 접하고는 곧바로 서신을 써서 그에게 이 기쁜 소식을 다시 알려 주었는데, 고청운은 그가 바다 밖으로 나가보는 걸 얼마나 오래전부터 꿈꿔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서신을 이리저리 뒤적여가며 몇 번이고 살펴본 고청운은 육훤이 이번 임무에 선발된 것은 아마 그가 자원한 결과인 것 같았다.
고청운의 가족들은 다른 이도 아니고 육훤이 수많은 병사를 이끌고 이번 임무를 같이 수행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삽시간에 마음이 많이 놓였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일을 하기 쉬운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번에 출항하게 되는 선단은 약 100여 척의 선박으로 구성이 되어있었고, 동원되는 인원수는 20,000명 정도이며, 이 인원들 중 관리만 200여 명이 있었다. 그 외에도 고청운이 모색한 상인, 통역, 선장(*船匠: 배를 만드는 목수) 등 각종 기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머지 인원은 선원 아니면 병사들이었다.
남은 기간 동안 고청운은 바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개시했는데, 자료 수집, 항로 안배, 인원 조정, 물자 준비 등으로 인해 춘절 연휴에도 짬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