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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생활 (457)화 (457/504)

457화. 효도

옆에서 이삿짐 명단을 보고 있던 간미가 그들의 말을 듣고는 말했다.

“누가 너더러 이 좋은 경성을 두고 나가라고 하더냐. 반드시 지방관으로 나가겠다고 하다니, 우리 가족 모두 경성에 사는 게 뭐가 나쁘다고…….”

그녀는 큰아들이 자신의 곁에서 몇 년간이나 기약 없이 떠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다.

고청운과 고영량은 눈을 마주치고 쓴웃음을 지었다. 간미도 이 도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이러한 이치를 알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곁에서 한바탕 다른 이야기들을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방 아저씨(*방희림)께서 각지에서 지방 관리로 일하며 논밭과 관련한 수리 쪽으로 정통하시다고 하는데, 지난번에 듣자하니 관련 저서 집필을 시작하셨다는군요. 외숙부께서도 계속 지방에 관리로 계시고, 그 지역의 지역민들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좋은 관리가 되어 백성들의 복지를 도모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고영량이 간미의 무릎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말을 이었다.

“저는 아버지와 다릅니다. 경성에서는 제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룩할 수가 없어요.”

“아들 말이 맞소.”

고청운도 말했다.

“사내로서 포부가 있을 텐데, 아직 젊을 때 하고자 하는 뜻을 펼쳐보아야지, 안 그러면 다 늙어서 후회할 것이오. 얘야, 이 아버지는 단지 네가 초심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고영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빙긋이 웃으며 말없이 정중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여동생의 혼례식은……. 그 아이도 네 상황을 이해해 줄 게다.”

고청운이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경성으로부터 멀지만 않았으면 휴가를 냈겠지만, 이번에는 내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고영량보다 먼저 경성을 떠난 것은 방희림이었다. 그는 새해를 맞이하고 경성의 각 관아가 다시 업무를 개시하자마자, 바로 성지를 받고 지방직으로 떠났는데, 뜻밖에도 품계가 올라 남경(南京) 관할 지방의 종5품 지주직에 부임할 수 있게 되었다. 

돌고 돌아, 방희림은 거의 20년 만에야 겨우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자가 대화를 하는 사이, 한 하인이 와서 ‘후부의 도련님들께서 오셨다’고 알려 주었다.

깜짝 놀란 고청운은 무슨 일인가 생각해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분명 자신의 부모님에게 뭔가 물건을 전해 주고자 하는 걸 게다.”

육훤은 전주에서 아직 부임 중이었는데, 그곳은 복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충분히 사람을 보내 물건을 전달할 수 있었다. 

* * *

그리하여 만물이 자라나는 4월의 어느 날, 고영량은 투지를 불태우며 열정으로 가득 찬 출발을 거행했다.

집안 어른들은 이 일로 며칠 동안 시름시름 앓았는데, 때마침 경성에서는 매년 열리는 축국 행사가 시작되어 거리마다 축국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비었고 날씨까지 좋아 기분이 좀 풀렸다. 

고전각은 보기에 철이 들어 보였지만 그래도 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으니 당연히 정신적으로 충격이 있어, 이불 속에 숨어 몇 번이나 울곤 했다. 고청운은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고 특별히 아이와 보름간 잠을 함께 자기로 했다.

* * *

“……오십팔, 오십구, 육십! 할아버지, 다 셌어요!”

이날 밤, 침실 바닥에 깔린 자리 위에서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던 고청운의 귓가에 고전각의 옹알댐이 들려왔다. 

“아 참, 할아버지, 상의할 것이 하나 있는데요……. 음, 이렇게 해요. 내일 밤에는 저랑 같이 자러 와주지 않으셔도 돼요.”

운동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고청운은 이제 그만 일어서서 천천히 한쪽에 있던 수건을 들고 땀을 닦고는, 숨을 크게 고르며 고전각을 바라보았다.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하얀색 부드러운 내의를 입고 있는 꼬맹이는 의자에 걸터앉아 발을 대야에 담그고 있었다. 고영량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아이는 고개를 들고 큰 눈을 반짝이며 고청운을 바라고 있었는데, 마치 촛불 아래 보이는 그의 눈 속에 별이 반짝이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싫어졌느냐?”

마음이 삽시간에 평온해진 고청운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이제 혼자 자는 게 무섭지 않은 게야? 더 이상 코를 훌쩍이면서 울지 않을 테냐?”

고전각이 얼굴을 붉히며 고청운의 큰 손을 잡고 흔들어대며 말했다.

“아이, 할아버지, 저 지금까지 두 번밖에 안 울었어요. 이제 더는 안 울어요.”

아이는 변명을 하며 목소리가 높아졌고, 말하는 속도도 매우 빨라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를 놀리실 거예요. 견 형아는 저를 놀렸단 말이에요.”

고청운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쩐지 갑자기 혼자 자겠다고 하더니, 어린 친구한테 비웃음을 당했었나 보구나.’

그동안 고전각과 육견의 친밀함은 하늘을 찌를 듯 발전해 나갔는데, 두 녀석 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지내게 되면서 더욱 공감대가 형성되어 말이 통했던 것이었다. 이에 서원을 다닐 때만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교를 해서도 육견은 고택으로 따라 들어오기 일쑤였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는 후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도 두 아이 모두 서원의 수업 진도 같은 것에는 지장을 받지 않았기에, 고청운은 두 아이들이 맘껏 노는 모습을 보고도 눈감아 주었다.

“좋다. 네가 그렇게까지 요구하니, 이 할아버지는 네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겠구나.”

고청운은 짐짓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전각은 고청운의 손을 꼭 잡고 한 번 더 말했다.

“할아버지, 정말 결정하신 거예요? 이제 저랑 같이 안 주무시는 거죠?”

고청운은 웃음을 참으며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기왕 우리 손주가 이리도 씩씩한 모습을 보이는데, 할아버지가 네 발목을 잡을 수는 없지 않으냐. 안심하렴, 내일 저녁부터 할아버지는 네 할머니를 보러 가겠다.”

고전각은 이 말을 듣고 눈을 끔벅거리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좋아요. 어차피 저는 이제 겁도 안 나요, 벌써 6살이나 됐으니까요. 전 이제 큰 어린이예요.”

아이는 통통한 작은 손을 내밀며 손짓까지 했다.

“좋다, 좋아. 넌 다 큰 어린이구나.”

고청운은 자신의 호흡이 진정되자 몸을 풀어주는 동작을 한차례 더 한 뒤 씻으러 갈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 고청운은 고전각이 아직도 걸상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이는 무슨 나랏일을 생각하기라도 하는 듯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고청운은 세면을 마치고 침상에 반쯤 걸터앉아 고전각에게 자신이 쓴 이야기를 읽어 주었고, 이어 이 이야기에 나오는 두 아이 중 어느 아이의 공부의 효율이 더 높은지에 대해 잠시 고전각과 토론했다.

“공부는 일과 휴식을 겸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적합한 공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최종 결론을 지은 고청운은 그제야 이불을 들추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경성의 4월 밤은 아직 쌀쌀했지만, 이불 속은 푸근했다. 고청운은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는데, 금세 조그마한 뜨끈뜨끈한 녀석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이불 안은 따뜻해요?”

고전각의 간절한 소리가 고청운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따뜻하구나.”

“그러면 제가 밤마다 할아버지랑 할머니 방에 가서 이불 좀 따뜻하게 해 드릴까요? 이불이 다 따뜻해지면 저는 다시 제 방에 돌아가서 잘게요.”

고전각이 오동통한 종아리를 고청운의 배 위에 걸친 채 그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황향(*黄香: 동한시대의 사람으로, 역사에서 제일 유명한 24인의 효자 중 하나) 같이 말이에요.”

고청운은 손자를 곁눈질해 보았는데, 촛불 아래 아이 얼굴의 솜털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고전각이 까맣고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고청운은 마음이 약해지며 더 이상 아이를 놀리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 우리 손자가 이리도 효자로구나. 그럼 우리 손자 덕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호강을 좀 해 볼까?”

고전각은 대답을 듣자마자 얼굴이 발그레해지더니 입을 오므리고 웃음을 참았다. 그 모습이 참 눈이 부셨다.

고청운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자자꾸나, 내일도 일찍 일어나 서원에 가야지.”

고대하와 소진씨는 어린 아이들이 너무 먼 거리를 왕복하는데 힘들지 않도록 옛날에 고영량이 공부했을 때처럼 서원 근처 택지로 옮겨가 살고자 했으나, 고청운은 두 사람의 연세를 고려하여 이를 말렸다. 

어차피 마차가 편하게 실어 나르니, 아이들은 가는 동안 마차에서 잠을 자며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또한, 그 반 아이들 중 일부 역시 비슷한 거리를 통학하고 있었는데, 다른 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자기애들만 못하진 않을 터였다.

자신의 계략이 먹힌 것을 보고 흐뭇해하던 고전각은 하품을 하고 고청운에게 걸친 자신의 종아리를 들어 올린 후, 손발을 침상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고 눈을 감은 채 이윽고 잠이 들었다.

고청운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손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아들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의 그들도 자신에게 달라붙어 잠자기 직전까지 떠나기 아쉬워했었다.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가는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혼인했고, 큰아들의 경우엔 마치 어린 매처럼 둥지를 떠나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먼 곳으로 달려 나갔다.

작은아들은 곧 아버지가 될 것이었다. 그는 장가를 들면서 앳된 모습이 점점 사라져 이제는 제법 성숙해졌고, 예전처럼 애교가 넘쳐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고청운은 이에 좀 슬프기도 했지만, 동시에 매우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지금의 자신이 이제 팔굽혀펴기를 60개밖에 할 수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20대에는 한 자리에서 100개 이상을 할 수 있었는데. 세월은 정말이지 사람을 봐주지 않았다. 허나 아이들이 이렇게 장성을 했으니, 자신만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날 밤, 고청운은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고 나서야 겨우 곤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시간은 5월에 접어들었고, 단오절이 지나면서 온 가족의 관심사는 노묘운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는 지난 9월에 회임을 했으니, 시기상으로는 곧 다가오는 6월에 출산할 예정이었다. 노씨 집안의 친정 부모님은 아직 산동(山東)지역에 있었고, 노묘운의 큰언니는 시부모님을 따라 역시 다른 지방에 가 있었다. 지금 그녀와 경성에서 혈연관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노개운 부부였기에, 공부의 노 시랑 댁에서는 자주 유모를 보내 그녀의 건강을 살펴 주었다. 

노묘운은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컸는데, 정성껏 태교한 덕분에 회임한 상황이나 조건이 나쁘지 않아 배 속 아이가 크게 동요하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 * *

출산을 기다리던 그녀는 6월 들어 갑자기 양수가 터져 오후와 하룻밤을 통틀어 진행된 산고 끝에 여섯 근(*약 3.6kg)에 달하는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산모와 아이, 두 모녀 모두 건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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