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성지
혼례식은 내내 시끌벅적했고 아주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도 축하하는 덕에 고청운은 계속 웃느라 얼굴이 다 굳어질 지경이었지만, 마음만은 얼굴이 굳는 것조차 달갑게 여겨졌다.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 제일 기쁜 사람은 당사자인 고영진이리라.
모든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랐을 때 동방화촉까지 올리게 되었으니 진정한 겹경사를 맞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런 겹경사를 맞이한 그가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혼례식의 제일 큰 볼거리인 고영진과 노묘운 부부가 서로 절을 올리려 기다리던 그때, 고청운과 간미는 상석에서 이 신혼부부의 절을 받으려고 덩달아 차례를 기다리다 말고 “성지(*圣旨: 황제가 내린 분부, 혹은 이를 문서화 한것)가 도착하였소.” 라는 한마디에 어리둥절해하며 서로를 쳐다볼 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 대인, 어서 성지를 받들지 않고 무얼 하고 계십니까?”
성지를 전달하러 온 내시가 정색을 하고 소맷부리를 뿌리치더니, 곧 얼굴에 웃음기를 띠었다.
고청운은 고영량이 의아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더는 별생각 하지 않고, 서둘러 사람을 시켜 향안(*香案: 향로, 촛대, 제물 등을 올려놓는 긴 탁자)을 준비하게 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즉각 성지를 향해 절을 올리니, 그 너울거리는 기세가 가히 장관이었다.
고청운은 성지의 내용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런 크나큰 경사가 있는 자리에 갑자기 성지가 출현하니 정말 불안했던 그는 내용을 듣기 전인 방금 전까지 도대체 성지의 내용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헤아려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내용을 들어보니 다행히 좋은 일이었다. 이는 황제가 자신들의 집안에 상을 하사하는 것으로, 고청운이 아들들을 잘 가르치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일을 치하하고 있었다.
이리도 칭찬해 주시는 말을 듣고 있자니 아무리 낯가죽이 두꺼운 고청운이라지만, 조금은 민망했다.
내시와 어림군은 성지를 낭독하고 나서 황제가 내려준 하사품을 자리에 놓은 뒤, 고택에서 물과 술 석 잔을 마시고 급히 다시 황제의 명을 받들러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하며, 분위기가 아까보다 더욱더 뜨거워졌다.
누군가는 고청운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고청운은 겉으로는 요지부동이었지만 속으로는 새 황제의 뜻을 헤아려보고 있었는데, 고영진과 노묘운이 그의 앞에서 절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방금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생각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은 작은아들의 경사 일이니, 그는 이 순간을 즐기는데 여념이 없고자 했다.
* * *
혼례식이 끝난 후, 고청운을 비롯한 가족들은 하루를 더 쉬고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새로 고씨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온 노묘운은 영요보다 성정이 더 활발했고, 간간히 재치 있는 언변을 보여 주었는데, 성혼이 자꾸 미뤄져 너무 미안해하고 있던 간미를 비롯한 식구들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둘째 며느리가 더욱 만족스러웠다.
전통 혼례 풍속에 따라 시집간 여식이 친정 부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날, 간미와 영요는 건의를 하여 고영진 부부가 노씨 집에서 함께 머물다가 돌아오도록 했다.
* * *
혼례식 날, 새 황제가 성지와 하사품을 내려준 사건에 대해서 고청운 등 몇 사람들은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도무지 새 황제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무슨 공이라도 세워서 받는 것이었다면 모두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비록 황제가 내려준 하사품은 지나치게 후하진 않았으나, 성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관직 생활에 있어서 모두가 제일 중시하는 것은, 대부분 체면과 관계된 문제였으니 말이다.
“전 요즘 별다른 큰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줄곧 하던 업무만 계속하고 있었는데…….”
고청운은 심사숙고해 보았지만, 확실히 무슨 공을 세우거나 한 것은 없었다.
“됐습니다, 더 생각하지 않으렵니다.”
고영량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좋은 일이 아닙니까, 폐하께서 태상황께 보이고자 행하신 것일 수도 있지요.”
그는 동생의 혼례식을 준비하느라 휴가를 내서 며칠 동안 한림원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이 진행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량가아 말이 옳다. 폐하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 지 조만간 드러날 게야. 노부 생각에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일 같구나. 병사가 공격해 오면 장군이 막고, 물이 밀려오면 흙으로 막을 수 있지 않더냐. 무슨 일이든 백방으로 방법을 강구하면 막아낼 수 있을 테니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꾸나. 폐하께서 그냥 한 번 불현듯 행하신 일일 수도 있을 테니.”
방인소는 뒷짐을 지고 고청운의 앞을 서성거리며 마저 말했다.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시고 난 뒤, 상을 내려주신 사람이 너 하나뿐이 아닐지도 모르지. 상을 잘 주시는 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저와는 다른 경우지요. 그저 상황이 닥치는 대로 돌파해 나가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고청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그는 이전의 황제가 물러나는 것이 아쉬웠는데, 새로 등극한 천자의 성향을 처음부터 다시 헤아리고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아침 조정에 올라가 새 황제를 대면하고 있었던 고청운은 때때로 생각해 보면, 역사상 3대 황제를 모시고도 순조롭게 임기를 다 마치고 퇴직한 관리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무수한 짐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상생활은 이어졌다. 작은아들의 인륜대사가 잘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딸만 남았는데, 딸은 방희림네 복상 기간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야 해서 요즈음의 고청운은 주로 고전각의 교육에 집중하고 있었다.
소위 학자 가문이라고 불리는 집안들은 적어도 3대가 그 명맥을 유지해야 했는데, 이에 고전각 세대는 매우 중차대한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고청운은 근면함이 서투름을 보완할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의 손자가 아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손자는 제 아버지만큼 총명하지 않을 뿐이었다.
아직 글 깨치는 단계에 있는 고전각은 성실한 면모가 있어 착실하게 그나 방인소의 학업적 안배를 잘 따라오고 있었다. 책을 몇 번 외운다고 한들 계속해서 그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었는데, 말을 잘 듣고 영리한 면모를 발휘하여 고청운을 비롯한 가족들을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고청운은 정성껏 가르치면 언제고 이 아이는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으리라 믿으며, 아이가 황립 서원에 들어갈 수 있게끔 좋은 기초를 닦게 할 거라 다짐했다.
* * *
며칠간의 휴가가 끝난 후, 고청운은 평소와 같이 출근을 했다. 그런데 조정의 대신들이 암암리에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새 황제의 자신에 대한 태도도 이전보다 더…….
‘음? 왜 더 온화하게 대해주시지?’
심지어 황제는 때때로 자신을 어서방(*御書房: 황제의 장서를 보관하거나 황제가 책을 읽는 곳)으로 불러 민생, 제후국, 외국, 산술과 관련된 것들을 묻기도 했다.
고청운은 처음엔 이런 변화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두어 번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어느 정도 담담해졌다.
새 황제가 즉위하니, 조정에서는 또다시 황권 옹호파와 그와 대립하는 파벌의 각축전이 시작되었다.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고청운이 속해 있는 홍려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도 한적하고 별 권력이 없는 관아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큰 파벌 대립구도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극히 적다는 점이었다.
이런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으니, 고청운은 당연히 기뻐했다.
* * *
한편, 9월 9일 중양절에 즈음하여 간미는 명절 선물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집안과 왕래하는 집이 몇 군데 말고는 많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고청운은 그녀의 의문에 대해 꽤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
“미아, 안채의 식구들한테 뭐 들은 것 없소? 새 황제 폐하께서 위엄을 베풀며 즉위하신 이래, 많은 관원들이 사직서를 내고 관직을 떠나버렸소. 그들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오.”
대황자 등이 순순히 왕부로 돌아가 하릴없이 풍류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들을 따르던 관원들 역시 새 황제나 혹은 새 황제를 추종하는 대신들에 의해 결판이 나게 된 것이었다.
고청운은 이들 중 확실한 범행이 발각된 관원들은 몇 사람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목숨을 건져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렴풋이 들리는 것은 있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요즘 제가 하루 종일 바빠서요. 소아는 정혼자가 정해졌으니 사람들이 초청하는 연회에 가기도 그렇고, 대부분 거절하고 있습니다.”
간미가 선물 명단을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둘째 며느리가 회임 중이라는 거죠. 그녀는 이번이 첫 회임이고, 사돈도 곁에 없으니, 제가 어찌 지켜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이 나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간미는 집안 관리에 있어 영요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에 이쪽 업무에 대해서는 많이 홀가분해졌는데, 각 집으로 보낼 예물의 명단 확인 정도만 하면 되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각자 기거하는 거처가 있었고, 작은아들은 내년 5~6월이면 아버지가 될 예정이었다. 그녀는 인생 최고의 경사를 맞아 정신이 너무나도 맑아졌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신이 예전보다 몇 살은 더 젊어진 것만 같았다.
둘째 며느리의 회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고청운도 덩달아 웃음을 띠었는데, 집안에 고전각 하나만 있는 것은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난달 노묘운의 회임 소식을 들었을 때, 온 가족은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이어 두 사람은 예단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대화가 끝나자마자 정원에서 아이들의 비명과 웃음소리가 들려오기에 자세히 들어보니, 고전각의 목소리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고청운은 간미와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말했다.
“짱짱이가 견가아(坚哥儿)랑 또 난리를 치고 있나 보오, 내가 가서 좀 들여다보리다.”
견가아는 육견(陆坚)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는 육훤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전의 해전을 대비하여 육훤은 고청운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아내를 경성으로 좀 데리고 가달라고 했었는데, 이후 전쟁이 끝나고 부상을 회복하고 나자 적장자 육기(陆圻)를 황립 서원에 입학시켜 버리고는 아내와 남은 아들, 딸을 데리고 다시 원래의 부임지로 돌아갔다.
올해 고영진의 진사 합격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육훤은 축하 서신을 보내옴과 동시에 그의 둘째 아들 육견을 경성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내용도 전해왔다. 그는 꼬맹이가 적응하지 못할까 봐 고청운의 집에 일정 기간 머물게 한 뒤 내년 2월 황립 서원에 보내고자 했는데, 육씨 가문의 권세로 볼 때 두 아이를 황립 서원에 입학시키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육훤이 서신으로 구구절절하게 육견을 좀 보낼 테니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을 때 잠시 고민을 좀 해 본 후, 고전각과 함께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고 이에 동의했다. 어차피 한 녀석을 가르치나 두 녀석을 가르치나 가르치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아이들끼리 서로 어울리게 해줄 수도 있어 괜찮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열흘 전, 육견은 경성으로 와 후부의 집사와 함께 매일 같이 서원을 통학했는데, 고전각보다 한 살 위인 꼬맹이는 새 환경이 낯설긴 했지만 적응하는데 사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금 고전각과 육견은 마치 한 사람처럼 거의 매일 붙어 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