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은식(恩式)
봉 소경은 고청운이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거절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뒤이어 봉 소경은 고청운에게 다가오더니 그를 따라 희뿌연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비가 한차례 오려는 모양입니다. 비가 오면 고사장에 들어간 응시생들이 고생하게 될 텐데, 올해는 정말로 좀 시험장의 지붕이 제대로 수리 점검을 마친 상태였으면 좋겠습니다.”
회시가 치러지는 해에 비가 오게 되면 좀 걱정이 되었는데, 시험장은 이미 지어진 지 수십 년이 넘은 건축물이라 비가 새는 일이 잦았던 것이었다.
“수리를 잘 마쳐 놓지 않았겠는가.”
고청운은 이번에 새로 등극한 황제가 개최하는 은식이니 아랫사람들이 시험 준비를 허투루 할 리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대인께서는 시험 중인 아드님이 걱정되시는 것이지요?”
봉 소경이 천천히 걸으며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저희 집 장남도 지금 시험장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제 저녁에 비가 오니 아이가 걱정되어 밤새 한숨도 잠을 못 잤습니다.”
고청운 역시 그 말에 깊이 동감했다. 그간 있었던 일을 자세히 가늠해 보면, 자신의 집 둘째 아들은 운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었다. 회시부터 혼사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갑자기 생겨나는 일들에 계속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노씨 집안의 둘째 아가씨 역시 20세가 넘도록 아직 성혼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봉 소경의 경우 고청운과의 나이는 비슷했는데, 그의 큰아들은 고영진보다 몇 살 위로, 경성의 유명한 청년 인재 중 하나였다. 이번에 그는 방상괘명(*金榜题名: 전시에 급제하다는 뜻의 사자성어) 할 가능성이 매우 크게 점쳐지고 있었다.
물론 그 점은 고영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급제 석차가 좋지 않더라도 전려 출신의 아버지와 장원 급제한 큰형이 있지 않은가. 또한,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가 어릴 때부터 경성에서 자라 교육환경이 좋았고, 최근 참가했던 문회에서도 좋은 명성을 얻고 돌아왔으니 걱정할 게 없었다.
고영진이 시험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였던 히죽대던 모습을 떠올리며 고청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큰아들도 어렸을 때는 활발하고 귀여웠지만, 다 커서는 어릴 적과 다르게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을 갖추었는데, 작은아들은 어려서부터 다 자라서까지 줄곧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고청운은 아이가 회시라는 큰일을 목전에 두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 녀석이 너무 대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고청운은 자신이 시험을 치렀던 그때를 기억해 보니, 좀 긴장을 하고 있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심리적인 부담을 잘 제어하여 시험에 임했었던 게 떠올랐다.
“며칠 동안 꽃샘추위가 연달아 오지 않은 것이나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오.”
고청운은 문득 소진씨가 일전에 고영진의 과거 시험 합격을 빌미로 후원에 세운 작은 불당이 생각나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보우하실 테지.”
막 이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서둘러 복도 쪽으로 되돌아갔다.
* * *
좋은 예감은 소식이 없지만 안 좋은 예감은 꼭 들어맞는다고, 고청운이 그 말을 한 지 이틀도 안 되었는데, 총 3개의 장으로 이뤄진 회시에서 마지막 장의 시험을 치르던 날 정말로 난데없이 북풍이 불어오더니 기온이 삽시간에 뚝 떨어져 말 그대로 전형적인 꽃샘추위가 들이닥쳤다.
고청운은 이틀 전에 자신이 내뱉은 말을 도로 삼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에 시험 응시생이 있었기에 고택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중에 무슨 사고라도 생기지는 않을까 고영진과 진교를 걱정했다.
* * *
길고 길었던 9일의 시험 기간이 드디어 끝이 났다. 고청운은 시험에 응시했던 두 사람을 시험장에서 집으로 데려왔는데, 고영진의 피곤이 엿보이는 얼굴과 아래턱에 올라온 수염들을 바라보고는 얼른 의원에게 보여 맥을 짚게 했다.
곧 의원은 고영진과 진교 모두 괜찮다는 말을 해 주었고, 다만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피로할 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고청운과 간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겨우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영양을 보충하고 원기를 회복하는 것뿐이었다.
* * *
고영진은 하루 자고 일어나더니, 좀 더 쉬라는 고청운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작성했던 답을 써 내려간 후 고청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버지, 어서 빨리 이것 좀 봐주세요. 보시고 이 정도면 합격할 수 있을지 한 번 의견 좀 알려 주세요.”
고청운은 고개를 숙여 답안을 좀 읽어 보다가 다시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
“네가 쓴 답안이 어떨지는 네 스스로 느낌이 있을 것이 아니냐?”
“물론 저는 제 답안이 아주 잘 작성된 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시험관도 아니고 그들이 어찌 생각할지 알겠어요?”
고영진이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저는 두 번 다시 회시에 참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번 시험장에 입장할 때마다 옷을 홀딱 벗고 준비된 물웅덩이를 지나야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어찌나 흉흉한지, 흥, 그런 것들이 다 보인단 말이에요.”
고청운이 깜짝 놀라 다급히 그를 아래위로 훑으며 살펴보았다.
“누가 너를 건드리기라도 한 게냐?”
그는 당연히 시험장에 진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몸수색이 얼마나 갑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괴로운 일일 테지만, 정해진 규칙이 이러하니 참아야만 했다.
“아니에요.”
고영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소성(江苏省)에서 온 거인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정말이지 꽃처럼 아리따웠습니다. 음, 젊은 시절의 사씨 아저씨보다 조금 떨어지는 정도였어요.”
그는 당시 상대방이 물에 입수할 차례가 되었을 때, 자신이 그 사람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하기가 좀 거북살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나쁜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해당 인물이 진짜 사내인지 아닌지를 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고영진은 ‘조금’이라는 뜻의 손짓을 취하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런데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실은 아주 욱하는 성정이더군요. 제가 보니 그의 눈빛이 아주 매서웠습니다. 옆에서 지키고 있는 인력만 없었더라면, 다른 거인과 즉석에서 싸움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고청운이 느닷없이 질문했다.
“그의 성이 혹시 구(欧)씨가 아니더냐?”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의 이름이 구진(欧缜)이었습니다.”
“그는 네 예전 스승인 구 선생님의 아들이다. 8년 전에 양자로 왔다고 하는구나. 지금껏 계속 고향 집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연유로 양자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강소성에서 부시험관으로 있을 때 보니 그가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더구나. 음, 성정이 좀 욱하기는 했지.”
고청운이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네가 그와 교류를 해 보고 싶다면, 며칠 뒤에 구 선생님의 댁으로 찾아가 보거라. 아이의 인품은 좋은 것 같더구나.”
아이의 성정이 나빴다면, 구 선생님이 양자로 삼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장정이 일전에 자신에게 귀띔을 해 준 바로는, 불쌍한 아이인데 다행히 그의 외숙인 구 선생님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었다.
“나이가 그렇게 많은데도 양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나요?”
고영진이 혼자 중얼거리며 일부러 고청운을 슬쩍 주시해 보았다.
고청운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매만지며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안심하렴, 네 외증조할아버지께서는 너를 양자로 삼겠다고 하지 않으실 게다. 너는 이미 너무 커버려서 데리고 있기 힘들지 않더냐.”
지난해 고청운은 임계촌에 들렀다가 고향에 내려온 김에 방가촌(方家村)을 한번 다녀왔는데, 주목적은 괜찮은 양자감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연 씨가 재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 일에 무척 신경 쓰고 있었다. 거기에 방씨 가족도 이 문제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는 고대하가 제안했던 아이를 한번 만나 보았지만 결국은 이런저런 연유들로 인해 양자로 들이기엔 부족함이 있어 보여, 양자 문제는 잠시 이렇게 또 중단되게 되었다.
이번 일을 통해 고영진은 처음에 자신이 방택의 양자로 가게 될 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영진이 헤헤 웃으며 일부러 어수룩한 척 머리를 긁적거리며 있다가 고청운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는 외증조할아버지와 외증조할머니를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더 좋아요.”
고청운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한 평생을 방인소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당시 방인소가 양자는 필요 없다고 선언했었을 때 사심이 있었기에 그 기회를 빌어 순순히 동의했던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완벽한 후계자를 찾아드리고 싶었다.
“그만, 이제 곧 장가까지 갈 녀석이 이렇게 어린아이나 할 짓을 하다니.”
고청운이 한마디 면박을 주고 나서 고영진의 옆에 앉아, 답을 옮겨 적은 종이를 받아 들고 진지하게 읽어 내려갔다.
장가라는 말을 들은 고영진이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며 말했다.
“5월에 성혼하는 건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아닌가요?”
하지만 고청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녀석, 설마 내가 자기가 산동(山东)으로 물건들을 자꾸 부치고 있다는 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노씨네 둘째 아가씨는 올해 이미 20살로 시집가기 가장 좋은 시기를 넘겨버렸기에,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이에 좋은 날짜를 알아보고, 두 집안은 5월에 혼례식을 올리기로 정했다. 이미 수많은 혼란을 곁은 후라 그때는 고영진이 시험에 합격하든 아니든 간에 혼례식을 먼저 챙기기로 모두가 다 동의했다.
이 일정의 옥의 티라고 하면, 예식이 예정된 5월에는 고대하와 소진씨의 복상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시점이라는 것인데, 이에 혼례 관련 일부 절차를 생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당연히 손자의 혼사가 더 중요했던 두 노인은 고영진이 지금이라도 당장 혼례를 치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보지 못해서 조급해했다. 늘 증손라고는 고전각 하나뿐이라, 집안에 아이가 너무 적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영진의 답안을 한 번 들여다본 뒤, 고청운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이갑(二甲)에 들겠고, 운이 안 좋으면 삼갑 정도에 미치겠구나.”
“네?”
고영진의 얼굴에 순간 기쁜 빛이 스쳤다.
“아버지, 다행입니다! 하하, 제가 형과 비교되는 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저는 이갑으로 합격만 되어도 좋아요. 한림원에 갈 수만 있다면 다 좋습니다. 아이, 아버지께서 시험관이셨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이번 시험의 시험관이었다면, 너는 다음 시험을 봐야 했을 게다.”
고청운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그에게 눈을 한 번 희번덕거렸다. 이번 회차의 회시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그가 새 황제에 의해 부시험관으로 선정될 것이라는 소문은 확실히 있었으나 이 풍문은 나중에 그냥 풍문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덕에 고청운은 정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는데, 비록 부시험관이 된다는 것은 웬만해서 찾아오지 않는 절호의 기회이기는 했으나, 그 때문에 고영진과 진교의 시험 참가가 허가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청운은 그렇게 하면서까지 부시험관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실력으로 미루어 보아 나중에라도 시험관이 되어 보고자 한다면 기회는 또 있을 테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고영진도 당연히 이러한 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고영진이 하하 웃으면서 고청운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가요, 아버지. 저희 진외당숙(*진교를 말함)께서 계신 곳에 가 봐요. 시험을 어찌 보셨을까요?”
“네 진외당숙이 너처럼 못 기다리고 조급해하고 있을 줄 아느냐?”
고청운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대로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진외당숙은 요 몇 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를 했지. 그간의 경력도 있는데다가 내가 보니 올해 기출 된 책론 문제가 그에게 유리한 문제더구나. 분명 시험을 잘 쳤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