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확신
여종에게 아이의 위치를 물어본 고청운은 바로 네 번째 건물의 후원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8월이라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지만, 후원에는 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자란 큰 나무 몇 그루가 있고 청죽도 두 군데나 군집을 이루고 있었기에 저녁 무렵이 가까울 때쯤이면 특히나 시원해졌다.
그가 후원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먼저 마주한 것은 부모님을 위해 비워두었던 두 개의 화단에서 고대하가 무순과 배추를 가꾸고 있는 모습이었다. 직접 채소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해 보이는 모습에 고청운은 울분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아버지, 제가 보기에 이 무순은 그다지 잘 자라는 것 같지 않은데요?”
고청운이 허리를 굽혀 새싹 야채들을 둘러보았다.
“마르기도 하고, 또 연약하게 자라는 것 같은데, 차라리 꽃 종류를 심어 보시는 건 어떠세요? 적어도 꽃을 피우면 보기에 좋지 않을까요?”
고청운이 이 말을 꺼내자, 고대하는 몹시 부끄러워 견딜 수 없어져서 꽤 속상한 말투로 말했다.
“이게 다 쓸 만한 거름이 없어서 생긴 난리가 아니더냐. 이곳은 우리가 살던 임계촌이 아니니, 거름을 줄 수가 없어서 당연히 채소도, 싹도 잘 안 자라는 게야.”
그는 여기에 살면서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비료를 놓고 싶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를 비웃으면 아들에게까지 누를 끼칠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화비(*花肥: 목화등 유지 작물의 개화(開花) 기간에 주는 거름, 혹은 관상용 분재 식물에 주는 거름)를 주셔도 되잖아요. 화비는 냄새가 고약하지 않습니다. 이런 꽃 비료라도 없으면 어찌 다른 부잣집들의 수목이니 화초들이 그리 잘 자랄까요?”
고청운이 건의했다.
“어제 예부의 류 대인(柳大人)에게 물었더니, 그의 아버님도 집에서 특수 제작된 화비로 채소를 재배하시는데 아주 잘 자란다고 합니다.”
류 대인은 꽤 괴로워하며 그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채소들이 너무 잘 자라는 탓에 한동안 매일 풋콩과 동과(*冬瓜: 오이과의 무 같은 식재료로 쓰이는 채소)를 먹게 되자, 아버지에게 집안에서도 채소를 길러보라고 했던 것에 굉장히 후회했다고 했다.
“특수 제작된 화비?”
고대하는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고, 곧장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주 고심하는 얼굴로 반문했다.
“너무 비싼 것은 아니더냐?”
얼마 전까지 부모님의 병환 때문에 고향의 토지나 상가에서 얻은 모든 이윤은 죄다 두 사람의 약값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에 경성으로 올라오면서 집사인 왕순(王顺)과 동생인 고이하에게 고향의 논밭과 상가를 관리하도록 부탁해 두었기에, 현재 몸에 지니고 현금이 너무 적었다. 비록 아들이 준 돈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평소의 근검절약하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자신의 취미 생활에 따로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비싸지 않아요. 제가 미리 집사에게 내일 가서 화비를 좀 사오라 말해 두었습니다.”
고청운은 허리를 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아들은 지금 집도 있고 가산도 있는데다가, 매달 상가와 주택 임대 명목으로 들어오는 돈만 해도 은자 100냥이 넘습니다. 이는 장자에서 나는 농가 수입이나 제 녹봉을 더하지도 않은 금액입니다. 이까짓 비용은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대하는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고청운에게 꽃 심는 것과 관련해 몇 마디 더 질문했다.
그는 앞마당의 몇 포기 안 되는 ‘옥게빙판(*玉蟹冰盘: 국화 품종의 하나)’이라는 국화 값이 얼마나 비싼지 알았을 때 충격이 꽤 컸지만, 난 역시 꽤 값이 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얼굴 가득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경성이라는 곳에서 난이 비싼 줄 알았더라면, 우리가 경성에 올라올 때 네 방에 있던 난을 죄다 가져왔을 텐데.”
고청운이 장기간 집을 비웠지만 그의 방은 아주 잘 관리되고 있었는데, 소진씨가 직접 아들의 방을 자주 청소를 하고는 했던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집 지붕의 까마귀까지 좋아하게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아들이 키우던 난도 매일 정성껏 보살핌을 받으며 계속 번성하게 되었다.
난이 자란 시간을 계산해 보면 이미 2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끊임없이 죽고 다시 살아나며 생명력이 꽤 강해지게 되었다.
이번에 상경할 때 고대하가 화분 한 개만 챙겨 왔다.
아버지가 임계촌의 난초 이야기를 꺼내자, 고청운의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곧이어 그가 온화하게 말했다.
“아버지, 지금까지 잘 자라준 이 난초는 고상하니 말쑥한 우아함을 지녀서 참으로 아리땁습니다. 저희 집에서 키우던 난은 산에서 아무렇게나 캐다가 키우기 시작한 것임에도 꽃에 색도 들어 있지요. 그 색이 잡스럽지 않다고 하나, 값을 크게 쳐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내가 딱히 이것들을 팔러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만.”
고대하는 자신의 의중이 탄로 나자 퉁명스럽게 말하며 그를 쏘아보았다.
“볼일이 있거든 빨리 가서 네 일이나 처리하거라, 괜히 물주는 것 방해하지 말고.”
고청운은 하하 웃으며 착하게 아버지의 말을 따라 정원을 가로질러 나무로 뒤덮여 더 돋보이고 있는 정자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 * *
역시나 고경은 정자에 앉아 격한 감정에 북받쳐 글을 쓰는 사람처럼 열심히 손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고청운은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이 깃펜인 걸 보고 그녀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고청운이 가까이 다가가 쳐다보니, 그녀는 얼굴에 웃음기가 어린 채 예상대로 라틴어로 뭔가를 쓰고 있었다.
“지금 누구와 서신을 쓰고 있는 게냐?”
살금살금 다가간 고청운이 불시에 물었다.
계속 생각에 잠겨있던 고경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눈을 들어보니 자신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고청운이 보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뾰로통해져서 말했다.
“아버지, 놀랐습니다. 어찌 소리도 없이 다가오신 겁니까?”
고청운은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네가 그렇게 열중해 있지만 않았더라면, 이곳은 화원으로부터 그리 멀지도 않으니 내가 방금 화원에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분명 들었을 게다. 결국은 네가 서신을 쓰는데 너무 열중해 있던 탓에 놀란 게야.”
말을 하는 고청운의 마음은 오히려 저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는데, 천진난만한 따님이 이미 심경의 변화가 온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고경의 얼굴에 이렇게 많은 표정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으리라.
고청운은 마음이 쓰렸다.
고경은 그 말을 듣더니, 잠시 후 조금 쑥스러운 듯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 얼른 일어나 고청운의 곁에 있는 돌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더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여종에게 국화차를 올리라고 분부하고 나서야 나지막이 말했다.
“아버지…….”
그녀는 말하려다 멈추었고, 우물쭈물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
고청운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직 먹이 다 마르지도 않은 서신을 한 번 훑어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거 제가 쓴 서신인데요. 한 번 보세요.”
고경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책상 위에 있던 서신을 고청운의 앞으로 밀어 놓고 옆에 있던 둥글부채를 들어 살살 부채질해주었다.
“아버지, 규범에 어긋나는 그런 내용들은 일절 쓰지 않았습니다…….”
“소아야, 넌 참 똑똑하구나. 더 큰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사소한 것을 양보하는 법도 깨우치고.”
곁눈질로 딸을 흘겨본 고청운은 딸이 부채질을 해 주는 정성스러운 모습에 보람을 느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서신 두 통을 집어서 읽기 시작했다.
내용을 다 본 고청운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답답하구나. 어쩐지 이리 대범하게 굴더라니.’
이 서신에는 애정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쓰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둘은 서신에서 서양의 어떤 사건에 대해 토론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참신하기는 했다.
서신의 마지막에 또 사(*词: 서정적인 성격을 지닌 운문시의 일종)까지 썼는데, 그는 꽤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그들이 라틴어로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의 라틴어 학식이 충분하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시 한 수를 써 놓은 것이라는 것을 정말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라틴어로 사를 쓴다고? 이런 것을 생각해 내다니! 정말이지 사서 고생들을 하는구나.’
기분이 불쾌했던 고청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적힌 내용을 다시 한번 곰곰이 따져 봤는데, 억지를 부리지 않는 이상 무슨 꼬투리를 잡을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는 문득 그들이 이렇게까지 ‘순진’하니 우리 맏아들이 서신을 교류하는 데 일조를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정말 그가 네 혼인 상대라 확신하고 있느냐?”
한참 뜸을 들이던 고청운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이번에 고경은 침묵하거나 다른 말로 얼버무리지 않고, 매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바로 그분이 맞습니다. 저와 그는 대화가 제일 잘 통하는 사이입니다. 처음부터 단 한 번도 그와 대화거리가 없을까 걱정해 본 적이 없었고, 그와 있어서 무료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소년들과 접촉을 해 본 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은 최초의 그 사람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상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고경은 사실 스스로도 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기에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고청운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버지, 저는 처음에는 그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그의 독선적인 모습이 싫었거든요. 제가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바로 방 아저씨께 아버지에게 서신을 넣게 하여 혼담을 권하게 하는 것도 싫었고, 아무 때고 제 앞에 나타나서 우연을 운운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또한, 어머니께서 그의 집안의 가풍이 별로 좋지 않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 있어서 그의 집안이 마음에 안 들기도 했는데…….”
고경은 침착하게 절제하며 아까까지 잘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고청운에게 부채질만 계속해 주다가 한참 만에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임계촌으로 내려갔을 때 문득 제가 그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주 깊게 고민을 거듭해 보고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기꺼이 그와 앞날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저는 앞으로 그와 잘 지낼 자신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고경은 부채를 내려놓고 고청운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하얀 치맛자락을 꽃처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아버지, 저는 감정이란 쉽게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어렸을 적부터 말씀해 주셨지요, 만약 한 가지 일을 행함에 있어 그 일에 대한 최악의 결과마저 감수할 수 있다면 그 일을 행해도 괜찮다고요. 지금이 바로 그렇습니다. 나중에 저희의 감정이 옅어져 버린다고 하더라도, 전 잘 지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고청운은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안채 쪽은 조용하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마도 옆집의 연 씨 등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고, 그의 아버지는 다른 한쪽에서 화단에 물을 주고 있을 것이었다. 여종들도 차를 올린 후 고경의 분부에 따라 자리를 떠나 있었다.
아무도 이곳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 저희 둘은 똑같이 많은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견해를 지니고 있는데, 그는 저를 아주 대단하다고 여기지도 않고, 제가 기상천외한 사상을 지니고 있다며 비웃지도 않습니다. 여기저기 유람하며 세상 구경을 해 보고 싶다는 제 소망에도 반대하지 않지요. 되레 저와 이 소망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논의를 해 주고 있습니다.”
고경은 머리를 숙여 고청운의 무릎 위에 가볍게 기댄 채,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저는 제 혼인 상대가 그임을 확신했습니다. 아버지,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하지만 저도 최근에서야 마음을 정했어요.”
방정심은 올해 20살이었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일찍 혼인할 생각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혼담을 계속 거절해 오고 있었는데, 고경은 자신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중간에 그 어떤 우여곡절도 생기지 않도록 바로 이 혼사를 결정하고 싶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을 먼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조만간 자신이 주동적으로 아버지를 찾아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었다.
다행히 자신의 아버지는 서신 이야기를 듣고 자진해서 먼저 찾아왔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너무나도 쑥스러웠을 것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일전에 줄곧 방정심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