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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생활 (444)화 (444/504)

444화. 체념

이어지는 나날 동안, 고청운은 간미가 소진씨와 자주 어울리는 것을 보았고, 두 사람이 웃고 떠들면서 가까이 지내는 걸 보니 사이가 좋아 보였다. 

“저와 어머님이 한 지붕 아래서 지내는 게 처음도 아니니, 저희가 잘 지낼 수 없을까 염려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그간 어머님 곁을 오래 모시고 있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효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기쁜걸요.”

간미는 곁에서 빙빙 맴돌며 그녀들의 사이를 떠보고 있는 고청운을 놀리며 말했다. 시어머니는 함께 지내기 까다로운 분이 아닌데다가, 부군과 관계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와 나눌 이야기가 많았기에 대화거리가 없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 다행이오, 그러면 되었소.”

고청운이 말을 더듬어 가며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여정 동안 고청운은 주로 고영진의 공부를 봐 주는 것에 주력했고, 가끔은 고경에게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 * *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경성에 도착했다.

고청운은 높은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는 이 번화한 도시를 보고 있노라니 이제야 현실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시 필사적으로 현실을 살아갈 때였다. 

그는 고대하와 소진씨가 적응하길 잘 돌보면서 다시 며칠을 더 쉰 후 남은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하기 시작했는데,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연달아 며칠을 바쁘게 보냈다.

이리도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그는 조정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활기’차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영안제는 아직 물러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태자가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중도에 큰 착오 없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회시는 새 황제의 좋은 출발점이 되었다.

다만 고청운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여전히 산발적인 골칫거리들이 산재해 있어 보였는데, 조정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자 어사(御史)들이 매우 흥분하여 온종일 이 사람을 탄핵하거나 뒤돌아서서는 저 사람을 탄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탄핵당한 자들 중에는 태자와 관련된 사람도 있었고, 무관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너무 정신없이 바쁜 나머지 관련자들만 심히 낭패를 당해 곤경에 빠져 있는 형국이었다.

“지금은 그나마 좀 상황이 나아진 편일세.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불온한 동태들이 얼마나 쏟아져 나왔는지. 난 퇴근을 하고 나면 감히 대문 밖을 제대로 나서지도 못했다네. 나도 모르게 무슨 귀찮은 일에 연루라도 될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장수원의 눈 아래에 보이던 검은 반달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부채를 흔들며 차마 지난날을 돌이켜보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히 태자께서는 이런 작태들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지. 여기저기 도처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들에 신경 쓰지 않으시며 초연한 모습을 보이신 것이 되레 여야에서 좋은 말들이 나오게 했다네. 만약 그러지 않으셨다면…….”

그는 마지막 한마디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고청운 역시 그의 의견에 깊게 공감했는데, 일이라는 것은 자고로 성공을 막 거머쥐기 직전의 순간이 제일 위험한 법이었고, 이 시점의 적들 역시 제일 광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고청운은 이 국가가 불온한 동태에 함께 동요하지 않고 이 과도기를 잘 넘기기를 바랐는데, 태자가 모처럼 영안제 같은 황제가 키운 후계자였기에 중도에 무슨 일이 더 발생하지 않기만을 바랐던 것이었다.

“흠천감에서도 이미 길일이 어느 날짜인지 계산해 두었다죠? 새 황제 폐하의 즉위식은 바로 다음 달이라는데, 형님 부서의 준비 상황은 어떻습니까?”

고청운이 질문했다. 그는 고향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새 황제의 즉위식이 끝나 있을 줄 알았는데, 고향에서 돌아와서도 이리 계속해서 바삐 일을 봐야 할 줄은 몰랐다.

“몇 달 동안을 그 일로 싸워댔네. 폐하께서 견디지 못하고 한바탕 호통을 치셨지. 그 덕에 우리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남은 절차라고는 자네의 홍려사가 해야 할 일 말고는 없다네. 이제 자네들이 바빠질 차례야.”

장수원이 호의적이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고청운은 그저 한 번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어차피 관례대로만 행하면 잘못될 일은 없었고, 여러 번 예행연습을 거치면 그만큼 실수할 확률도 적어질 것이었다. 

길에서 담소를 나누던 고청운은 고영량이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얼른 장수원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정말이지 착하고 좋은 아이라니까.”

장수원이 좀 부럽다는 눈으로 고영량을 쳐다보았다.

“이 아이가 매일 자네가 퇴근하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가는 건, 자네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설마 자네를 잃어버릴까 걱정이 돼서 그러는 겐가? ……그런데 자네 살이 좀 빠진 것 아닌가? 몸은 나보다 더 건강한 사람이.”

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하나만 적자고 남은 두 명은 다 서자였다. 이미 거인의 신분인 큰아들과 말을 잘 듣는 다른 두 아들이 있었던 장수원은 부자지간의 정에 대해서는 고씨 집안과 비교하면 늘 뭔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청운은 어쩔 수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건 고청운이 고향에서 병치레를 한 탓이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고영량 형제는 그의 몸이 아직도 ‘허약’하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그가 마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도록 했다. 또 그가 며칠 동안 계속 연장 근무를 하니, 고영량은 또다시 아버지가 너무 피곤해져서 어떻게 될까 봐 이 며칠 동안 직접 와서 그를 지키고 서 있었다. 고영량은 일 처리에 영향만 없다면야 자신이 대신 일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청운은 아들의 수법이 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아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날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높은 능률로 해결했던 것이었다. 

경성의 현재 추이를 파악한 후, 고청운은 다시금 대문을 걸어 잠그고 남은 복상 기간 동안 조용한 나날을 보냈고, 안심하며 새 황제의 즉위식 날짜를 기다렸다.

* * *

6월 26일은 역사에 깊은 각인을 새로 새기는 날이었다. 바로 이날 영안제는 태자에게 정식으로 황위를 양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청운은 비록 영안제를 모신 시간이 많지 않고, 황제와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으나, 마음속으로 그의 퇴위를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미 현실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기에 그는 적어도 새 황제가 젊고 분명 예기도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천자가 바뀌면 신하도 모두 바뀌었는데, 즉, 윗사람이 바뀌면 아랫사람도 바뀌는 법이라 새 황제의 등극으로 일부 관리들은 꼬리를 사렸고, 고청운의 행보 역시 이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좋은 소식은 있었다. 바로 새 황제가 내년에 다시 은식(*恩式: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과거 시험)을 열 예정이었던 것이다. 

새 황제는 회시만 은식을 열고, 향시는 추가로 은식을 열지 않기로 했는데, 고청운은 그 결정이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지금은 건국 초기가 아니라서 인재가 그렇게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8월, 고영량 남매대(代)의 복상 기간이 끝났다. 

그 후로 한 달 뒤, 고청운은 고경과 방정심이 라틴어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운명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집의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가씨가 이미 넘어간 마당에 자신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될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고청운은 더 이상 눈감고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했고, 이번에는 반드시 어지럽게 뒤섞인 문제를 명쾌하게 처리하여 해답을 마련하고자 했다. 

* * *

고청운은 딸과 대면하기 전에 먼저 간미와 이 일에 대해 의논했다. 

“심가아요? 그와 소아가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어요?”

의심스럽다는 듯 다시 한번 반문한 간미는 부군의 얼굴이 매우 언짢아 보이기는 했으나 외려 침착한 것을 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부군, 2년 전에 심가아가 저희 집을 방문했을 때, 한 번은 제게 외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저는 그 청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함께 외국어 공부를 하러 다녔는데, 그때는 소아도 저와 함께 외국어를 공부하러 다녔을 때이니 생각지도 못하게 그와 소아가 만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었네요.”

갑자기 들린 이 소식에 간미는 마음이 좀 언짢았는데, 이는 자신의 딸이 은밀한 일을 벌였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풍조가 아무리 많이 개방되었다고는 하나, 젊은 남녀 사이에 서신을 교류하는 것은 떳떳한 행위가 못 되었다. 남녀교제로 허용되는 범주로는 기껏해야 모두가 모인 모임에서 담소를 나누는 정도였고, 그 와중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미덕이었다. 

고청운은 간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기에 재빨리 부연 설명을 이어나갔다.

“괜찮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이 서로 직접 서신을 왕래한 것은 아니고, 량가아를 통해 서신을 전달했다는구려.”

“어쩌다 량가아까지 여기에 끼어들었답니까?”

간미는 머리가 아파 왔다.

“분명 소아가 동의한 것이겠지요. 세 녀석은 어려서부터 사이가 각별해서 늘 공통의 비밀을 가지고 번번이 우리를 속여왔죠. 그리고 보아하니 우리 집에 이미 심가아가 정착할 뿌리를 심어 놓은 것 같네요.”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일전에 부군이 방정심에 대해 머뭇거리며 혼담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결정을 못 내리고 있을 때만 해도, 그 소년을 사윗감으로 유력하게 보며 호의를 베풀었었다.

방정심은 하늘이 내려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그 젊은 나이에 이미 탐화로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던가. 그와 조건을 비교할 만한 젊은이는 많지 않았다. 그는 사람됨 역시 뛰어났는데, 자신의 몸을 낮출 줄 알았고, 점잖고 안정적이었으며 딸에 대한 정이 매우 깊었다. 그 외엔 용모도 빼어나니 그 어떠한 경성의 공자들이라도 그와 견줄만한 인물은 없을 것이었다. 유일한 단점은 그의 조부 세대에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었다는 것이다. 

좀 더 나쁜 것은, 지난 3년간 그가 자신의 딸을 한결같이 애정하고 있던 모습 탓에 간미의 마음이 그를 향해 기울었다는 점이었다. 방씨네 부부 쪽은 시부모로서 어울리기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방정심이 만약 자신의 딸과 말이 좀 통하기까지 한다면 아이들의 밝은 결혼 생활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책 읽는 것에 전념해 왔기에, 여러 분야의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앞으로 이만큼 수준 높은 대화가 가능한 부군을 찾는다는 것은 좀 어려운 조건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소아와 방가의 아들의 일에 동의하겠다는 말이오?”

고청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딸만 좋다고 하면, 전 괜찮습니다.”

간미가 그의 안색을 자세히 살피며 말을 계속했다.

“량가아와 심가아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일을 벌여 왔지 않습니까? 량가아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보고 진행했을 거예요.” 

“흥, 이놈의 자식이.”

고청운은 콧방귀를 끼더니 소매를 뿌리치며 밖으로 나서려고 했고, 막 떠나기 전에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소아에게 물어보겠소. 정말 마음에 든다고 하면 이 혼사를 빨리 진행시켜야 하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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