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괴로움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니!’
고청운은 그 글귀를 보았을 때 마치 심장 박동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는 숨을 죽이며 계속해서 서신을 읽어 내려갔는데, 서신을 쥔 손의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종이를 꽉 움켜 쥔 채 고영진이 직접 써내려간 그의 낯익은 글씨체를 바라보던 고청운은 지난날 이 아이의 서신을 받을 때면 늘 마음이 즐겁기만 했건만, 이번에는 자신이 글자를 잘못 읽은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마침내 닥쳐왔구나! 오죽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갔으면, 진가아가 서신까지 보내왔을까.’
고청운은 두말없이 문어귀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고영량을 불러 오라고 전했다.
“아버지, 무슨 일이십니까?”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마친 지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전각과 함께 정원에서 놀고 있느라 고청운에게 서신이 도착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방금 막 네 동생이 보내온 서신을 받은 참이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고 하시니, 내일 나대신 휴가를 내 다오. 나는 지금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 휴가 신청서를 작성할 수가 없겠구나. 너도 가능하다면 함께 휴가를 신청해 보거라.”
고청운이 대뜸 말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고요?”
너무 놀란 고영량은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관계를 잘 알기에 아버지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그를 위로했다.
“아버지,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저희가 고향에 돌아갈 땐 증조할아버지께서 병환이 호전되셨을 수도 있어요.”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감싼 채 맥없이 의자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고청운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병환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줄곧 날짜를 뒤로 미루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필 난 이 몇 년간 돌아가서 그들을 뵙지 못했구나.’
“우선은 나가서 네 어머니에게 이 소식을 전하거라. 사람을 불러 고향에 내려갈 짐을 당장 꾸리고, 집사를 불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 한 척을 대절시키라고 하거라.”
고청운은 손으로 얼굴을 한참 가리고 있다 말고 다시 말했다.
고영량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청운을 바라보았는데, 늘 곧게만 서 있던 아버지의 등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버지의 분부를 듣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을 그의 등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같이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도울 겁니다. 분명 별일 없으실 거예요.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증조할아버지께서 줄곧 아버지를 얼마나 아껴주고 마음 써 주셨습니까, 증조할아버지께서 지금 이 모습을 보시면 분명히 불안해하실 거예요.”
고청운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영량은 한숨을 내쉬었는데, 증조할아버지가 아닌 외증조할아버지였다고 대입해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반응이 절로 공감되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위로의 말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바로 경성을 떠날 채비와 일정을 준비하러 문을 나섰다.
그는 방을 나서기 전에 아버지가 계신 방문을 슬쩍 닫으며, 하인들에게 방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해 두었다.
고청운은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리자, 참았던 눈물을 거침없이 흘려보냈다.
‘내가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을까?’
그의 머릿속으로 어릴 적부터 고계산과 함께 했던 정겨웠던 추억들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비록 한때 그렇게 친밀하게 보내지 못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 주었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지라 그 또한 전생의 외할머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이입되어 그들을 곁에서 보살펴 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고, 비통함과 죄송함을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었다.
* * *
이날 밤, 고청운은 방으로 돌아가 쉬지 않고 바로 서재에 몸을 눕혔다.
간미가 그를 보러 왔을 때, 두 눈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는 부군을 보고는 일순간 멍해졌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침상의 머리맡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제가 다 챙겨두었습니다. 배 예약도 마쳤고요. 내일 부군의 휴가 신청만 끝나면 저희는 바로 떠날 수 있습니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 밤은 나 혼자 조용히 있고 싶소.”
간미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때 보인 부군의 연약함이 그녀의 깊은 보호욕과 애정을 솟아오르게 했고, 그녀는 그의 찌푸린 눈썹을 쓸어내려주지 못해 안쓰러웠다.
“그럼 오늘 밤 푹 쉬세요. 정신을 너무 축내시면 아니 됩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당신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려 주실 거예요.”
간미는 작은 소리로 말하고 이불 밖으로 나와 있던 그의 손을 주물러 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고청운이 대답했다.
“잘 알겠소, 안심하시오. 참, 스승님께 말을 좀 전해 주시오, 나는 괜찮지만 단지 마음이 너무 안 좋아 잠시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이라고 말이오. 내 너무 몸에 무리가 되지 않게 하겠소.”
가볍게 한숨을 쉰 간미는 고청운이 눈을 감는 것을 보고 그저 문을 닫고 나가 주는 수밖에 없었다.
* * *
밖에서는 고영량을 비롯한 가족들이 안채에서 간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괜찮으시니 너희들도 어서 돌아가 쉬어라.”
간미가 영요에게 물었다.
“짱짱이는 잠들었느냐?”
영요는 고개를 끄덕인 뒤 침착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는 고영량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잠들었습니다.”
방인소는 뒷짐을 진 채 한숨을 쉬고는 고영량에게 말했다.
“인생을 사는 자 중에 자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는 자가 어디 있더냐? 내 기억으로는 네 증조할아버지가 올해 87세가 되셨던데, 노인이 이 나이까지 살아있는 건 대단한 게야. 지금 네 아버지 심경이 얼마나 죄스럽겠느냐. 마음이 분명 안 좋을 게다. 이번에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 많이 보듬어 드리거라.”
“알겠습니다, 외증조할아버지. 다만 아버지께서 그간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보이신 적이 없었는데 걱정입니다.”
고영량이 속삭였다.
“지난해 전씨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이런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으셨잖습니까.”
다만 문중의 큰 증조부였던 고백산이 별세했을 때도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상심하기는 했었다.
“감정이 어디 같을 수 있겠느냐.”
방인소가 그를 한 번 흘겨보고 말했다.
“별일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어서 해산하자꾸나. 네 아버지의 나이가 벌써 몇인데, 그는 그렇게 연약하지 않다.”
* * *
영요는 고영량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물었다.
“부군, 짱짱이도 이번에는 따라가야겠지요?”
“물론이오. 이제 곧 3월이 다 되어가니,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기후는 더 따뜻해질 것이오. 게다가 배 한 척을 단독으로 대절한 것이라 속도가 빠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상에서도 아주 편안할 것이니 여정에도 적응할 것이오.”
고영량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설명했다.
“한 번 오가는데 3개월 정도가 걸릴 텐데, 짱짱이를 경성에 두고 간다면 마음을 놓이겠소?”
당연히 안심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등주(登州)에 가 있었고, 집안에는 방인소 내외만 남아 있었는데, 비록 두 어르신들이 아이를 잘 보살펴주시기야 하겠으나 그녀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이는 그녀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첫아이를 출산하고 3년간 다시 회임이 되지 않았으니 자신의 유일한 자식에게 가장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아이가 어린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게 하려니 또 마음이 아팠지만 그렇다고 글공부 시작하는 것을 말리진 않았다.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사내아이들이 대여섯 살은 되어야 겨우 글공부를 시켰는데, 그녀의 시댁 쪽은 이보다 1~2년은 더 빨랐다.
* * *
조용한 밤이 지나고, 다음 날 고청운은 아주 일찍 일어났다. 눈 밑이 검게 변해 있는 그는 두 눈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는 걸 느끼고 삶은 계란을 가져다 눈 주위에 굴렸고, 뜨거운 수건을 가져와 찜질까지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심각하게 초췌해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침 조례가 시작되기 전에, 고청운은 휴가 신청서 문서를 이부상서에게 건네주었다.
“신지, 본관이 휴가를 허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즘 일이 너무 많소. 자네도 알다시피 며칠 후면 회시까지 시작을 하는 터인데, 게다가 폐하와 태자 전하의……. 자네가 있는 홍려사에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부상서는 좀 난감했다. 이번 경우는 부모님께서 이미 돌아가셨거나 위중하시다는 것도 아니고, 조부가 위독하다는 것뿐 아닌가.
“대인, 저는 그간 6년이 넘도록 귀향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아들이라고는 저 하나밖에 없는데, 그분들께서는 계속해서 시골에만 머물러 계셔서 만나 뵐 수 없었지요. 게다가 저는 휴가를 단 3개월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주 통상적인 휴가 기간입니다. 그리고 홍려사에는 경험이 매우 풍부한 관 대인과 봉 대인이 있습니다. 노련한 분과 젊은 분이 한 분씩 있으니, 서로 호흡이 잘 맞아 일을 잘 처리해 주실 겁니다.”
“자네 외아들인가?”
이부상서는 잠시 읊조리다가 문득 물었다.
“아버님께서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가?”
“66세 되십니다.”
고청운은 이상하게 여기며 대답하다가 문득 조정의 규칙 하나가 생각났다. 만약 부모님께서 60세를 넘기셨는데 외아들이 그분들의 곁을 떠나 있으면, 아들은 죄를 짓는 것이 되는데, 관리가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가는 관직이 파면될만한 죄였다. 물론 부모님께 아들이 몇 명 더 있고 그 중 하나라도 곁에서 봉양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아들들은 외지에 있어도 죄를 지은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
이부상서는 여전히 읊조리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득실을 따져보고 있었는데, 고청운의 다급한 얼굴과 부어 있는 붉어진 눈을 보며 마침내 운을 떼었다.
“아침 조례가 파하고 나서 본관이 황제 폐하께 말씀을 올리겠네.”
4품 이상의 관리가 보름 이상 휴가를 내려면 황제에게 보고를 드리려야 했는데, 황제의 비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대인께 큰 감사를 올립니다.”
고청운이 크게 기뻐하며 다급히 예를 올렸다.
이부상서의 발언을 들은 고청운은 상대가 자신을 붙들어 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휴가 신청서는 이부를 거쳐야만 했는데, 만약 그를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전달되었더라면 황제를 알현하고 휴가를 청하여 갈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결국 이부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앞으로 많은 골칫거리가 생겼을 것이었다.
물론 고청운은 진즉에 결심을 다지고 있었고, 이도 저도 안 된다면 벼슬을 그만두고서라도 갈 생각이었다. 이런 건 개인의 자유 영역이니, 그런 상황이 된다면 이부도 그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었다.
가까스로 아침 조례시간을 견디어 낸 고청운과 이부상서는 조례가 파한 후 어서방(*御書房: 황제의 장서를 보관하거나 황제가 책을 읽는 곳)으로 직접 건너가 황제를 알현했고, 사정을 들은 황제는 즉각 동의를 해 주었다.
이후 고청운은 홍려사로 돌아가 부하들을 모두 불러들여 자신이 휴가를 낸 사실을 알렸는데, 고청운이 양주에서 부시험관으로 근무했던 사례도 있었기에 그의 안배에 서로 아주 숙달되어 일 처리가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