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암조(暗潮)
안절부절못하는 방서를 데리고 서원을 나선 고청운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이미 변성기에 접어든 방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잘못했어요, 반드시 반성하여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으니, 송구스럽지만 이 일을 아버지께 말씀을 안 드려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의 목소리에는 애원하는 어조가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불가능하지. 내 반드시 서신을 써서 이 일을 알릴 게다. 다만 네가 앞으로 내게 보여줄 행동 여부에 따라 내가 서신에 적을 내용에 영향을 좀 끼칠 수는 있겠구나.”
고청운이 눈앞의 방서를 살펴보니, 소년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다. 갸름한 체격을 가진 그는 크면 클수록 얼굴이 방자명과 6~7할 가까이 닮아 있었는데, 피부는 희고 준수했지만 얼굴선이 부드러워 중성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 말에 방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반드시 잘하겠습니다. 제게 분부하시는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
고청운은 방서가 반항아로 변해 버린 줄 알았는데, 송행지의 말과 같이 그가 의외로 이리 빨리 수긍해 버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고청운은 그에게 이런 사단을 벌인 경위와 이유를 묻기 시작했는데, 그 말을 들은 후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듣자하니 주아가 육황자에게 시집을 간 후, 황제는 이번 혼례로 인해 늘그막에 깨달은 바가 있어 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남은 황자들을 친왕으로 봉해 버렸는데, 그중에서 육황자는 예친왕(礼亲王)으로 봉해져서 최근 황제에 의해 종인부(*宗人府: 중국 명나라, 청나라 때에 황족을 감독하고 그 보첩, 봉작, 상휼, 소송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보내져 일을 보게 되었다.
작위와 함께 직무가 생기고 나자 예전의 그 까까머리 황자가 달라졌기에 황자비의 유일한 동생인 방서 역시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서원에서 귀족 자제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내게 되었는데, 방서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다가 몇 번 그들의 부추김으로 수업을 빼먹고 놀러 가게 된 것이었다.
고청운은 그가 바깥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그간 바깥 세상에 접촉 기회가 많이 없었어서 호기심에 사람들에게 이끌려서 한바탕 어울리다 자연히 신세계의 황홀경에 빠져 이전에 하지 않던 이상한 짓을 하게 된 걸 알게 되었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았으니 고청운은 해결책이 생겼지만,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상공관(*相公馆: 사내가 있는 기루)에 갔다가 신세계를 보았다는 말을 하며 자신을 데려갔다는 방서의 말에, 고청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헉, 혹시 누가 방서를 그쪽 세계로 인도한 것은 아니겠지?’
그는 방서의 용모를 한 번 더 살펴보고는 이러한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일을 당사자의 면전에서 말하기 곤란했다.
* * *
고청운과 방서는 고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미리 연락을 받고 와있던 방인례와 왕 씨가 이미 도착한 것을 발견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멀쩡히 잘 지내다가 우리 서가아가 난데없이 무슨 잘못을 벌였다는 게야?”
방인소는 유일한 종손(*從孫: 형이나 아우의 손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터라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 말이 나오자 방인례와 왕 씨가 얼른 방서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방서를 보자마자 서둘러 그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고청운은 방서에게 고영량을 찾아보라며 내보내고는 그간의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방서가 상공관으로 이끌려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르신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청운아, 이게 의도적인 것 같으냐? 아니면 그냥 별 뜻 없이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 같으냐?”
최근 점점 격렬해지는 황위 다툼, 그리고 막 친왕에 봉해진 예친왕, 그리고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방자명과 고청운까지……. 하지만 이런 것은 성급히 말하기 곤란한 일들이었다.
아마 방서는 소년 시절 특유의 일시적인 궁금증 때문에 그냥 가 본 것일 수도 있었고, 혹은 흑심을 품은 자의 간계에 이용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함께 간 소년들에게는 도대체 어떤 배경이 있는지, 당분간 방인소네는 상대방의 목적에 대해 알 수가 없을 것이었다.
세상에는 동성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어 상공관 같은 곳은 암암리에 존재해왔는데, 방자명의 외아들인 방서가 혹시 남들에 의해 안 좋은 쪽으로 꼬이기라도 한다면 과연 그 결과가 어찌되겠는가? 구설수에 휘말려 방서의 정신적인 건강이 흔들리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꼬투리를 잡힐 지도 몰랐다. 주류 사회가 이런 일을 여전히 경시하고 있는 이상, 이 사실은 가문의 명성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모두가 방씨 가문과 고씨 가문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을 테니, 고청운은 다시 생각해보면 자신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인례와 왕 씨는 깜짝 놀랐다.
“다행이다. 이 정도면 다행이야!”
왕 씨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우리 집 서가아가 하마터면…….”
만약 손주가 나중에라도 혹여 사내를 좋아하게 된다면, 자신의 집안에는 대지진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은 서가아에게 분명히 잘 일러야 합니다. 그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요. 올해 벌써 고향에 내려가 시험에 응시할 때도 되었으니. 세상 물정을 좀 알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청운은 방자명이 집에서 아이를 너무 과보호한다고 생각했기에 사내아이는 특히 너무 순수하게만 키우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일러준 적이 있었는데, 방자명이 요절해버린 막내아들 때문에 방서를 심히 중시하고 보호하게 된 것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무단결석 사건은 고청운 등 사람들의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해주는 일련의 사건이 된 셈이었다. 그들은 지금 방서가 속한 황립 서원의 갑원반이 그저 일률적인 공부만을 시킬 뿐이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번에 아예 방서에게 서원에는 휴가를 내게 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러고 나서 그의 곁에 고영진을 붙여 진사들이 넘쳐나는 집안에서 매일같이 둘을 함께 공부시키고 축국 경기도 좀 하게 하기로 했다.
고청운은 방서와 고영진이 함께 지내게 되면 분명 그때의 새로운 세계를 맛본 감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둘째 아들은 교우 관계가 넓고 잔꾀도 매우 많으니, 방서의 정신 상태를 문제 되지 않게 재정립시켜주는데 보탬이 될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고청운과 간미는 양가의 하인들을 상대로 남몰래 한 차례 조사를 진행하여 수상한 행동을 보인 하인 두 명을 내보내기로 하고, 구실을 찾아 그들을 직접 되팔아 다른 곳으로 가게 했다.
어둠의 마수가 뻗치고 있는 배경 아래에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침이 없는 법이었던 것이다.
다만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 싶어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고, 모든 일은 희망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신선이 싸우면 무릇 사람들에게는 재난 상황이 닥칠 뿐이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그저 신중, 또 신중하게 행동하며 지내는 것뿐이었다.
고청운도 이참에 홍려사에 아예 틀어박혀 각국의 정보 자료를 보거나 자신이 빌려온 책을 읽고 외국 책도 번역하며 이 시기를 보내 볼 생각이었다. 한때 업무가 바빠지면서 고청운은 여러 자리에서 자신을 불러도 극구 거절했고, 옆에서 아무리 그의 옆구리를 찔러대도 멍한 척했다.
* * *
이런 나날이 반 년 동안이나 계속되면서 중간에 홍려사와 한림원의 축국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이 경기에서는 홍려사가 이겼다. 고영량이 밀착 방어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고청운이 노장의 매서운 노련한 맛을 살려 한 골 차이로 홍려사의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이어 고경의 계례식도 성공적으로 치러졌는데, 계례식 이후 그의 집을 찾아 혼사를 논하고자 하는 방문객이 늘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계례식이 성공적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어서 고택은 고영진의 신부 집안인 노씨 집안에 정식으로 납폐를 보내 그들의 혼인 일자를 확정했다.
두 가지 큰일을 다 치른 뒤 고청운과 간미가 고경의 혼사를 생각하고 있을 때, 상성에서 고청운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병상에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이 소식을 접한 고청운은 멍해졌다. 그는 비록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건강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갑자기 가 버리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랬다, 그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부군?”
간미는 그가 정신이 나가 있는 모습을 보고는 손을 뻗어 서신을 가져와 읽었고, 처음 몇 줄만으로도 고청운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연세가 80세를 넘으셨으니 호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고청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하지만 그의 마음은 너무나 괴로웠다.
‘또 이렇게 한 명의 가족을 떠나보내게 되다니.’
고청운은 여러 이유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 적어서, 깊은 정을 나누지 못했던 것이 더 안타까웠다. 그러나 너무 속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슬픔은 큰할아버지인 고백산이 세상을 떠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큰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고청운은 본심과 다르게 아직도 그 슬픔이 다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규정에 따라 고청운은 소공(*小功: 상례의 오복제도(五服制度)에 따른 상복, 이때의 상복을 소공복(小功服)이라 하고, 소공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를 소공친이라고 한다)을 지내야 하였는데, 복상(*服喪: 상중에 상복을 입음) 기간은 5개월이었다. 아랫세대인 고영량 등의 복상 기간은 그보다 짧은 3개월이었다.
“제가 바로 사람을 시켜 창고에서 숙마포(*熟麻布: 소공복을 짓는 재료)와 소공복을 꺼내오게 하겠습니다. 부군, 누구를 분상(*奔丧: 먼 곳에서 친상(親喪)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급히 돌아감) 보내실지 잘 생각해 보세요.”
간미가 그가 챙겨야 할 것을 알려 주었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미가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임계촌의 부모님이 진씨 집안에 갈 것이 분명하나, 고청운네 쪽에서도 분상을 보내기는 해야 했다. 외할머니는 아직 병중이지 않은가.
사실 이 일은 딱히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것이 외가의 문상으로는 관직이 있는 고청운과 큰아들이 휴가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결국은 매인 곳 없는 작은아들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내년 3월에 회시가 있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촌 형인 진교의 경우 복상 중엔 시험을 치지 못하니, 총 6년을 기다려 다음 회시 시험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청운은 매번 얽히고설킨 친척 사이와 기나긴 복상 기간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이 중간에 다른 간섭이나 예절에 얽히지 않고 편안하게 무사히 과거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게 참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간미는 나가서 상복 등 물품들을 챙겼고, 고청운은 사람을 불러 고영진을 불러오게 하였다.
“아버지, 절 찾으셨습니까?”
고영진은 이미 간미로부터 진씨 집안의 부고를 먼저 들었기에 속으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다.
“저보고 상성에 가란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알겠습니다. 저는 마침 아직 그 지역을 가본 적이 없네요.”
“음, 보아하니 무슨 사정인지 이미 알고 있던 게로구나.”
고청운이 다가와 아들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제자리에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면서 말했다.
“지금은 9월이니, 네가 내려가는 길에 임계촌에 한번 들러 네 증조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도 좀 뵙고 오거라.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보니 그래도 12월이나 내년 1월쯤엔 돌아올 수 있을 게야. 다만…….”
분상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면 분명 내년에 있을 회시 시험에 지장이 있을 것이었다.
이제 와서 보니, 고청운은 집안에 아들이 몇 없다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정말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