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시박(市舶)
다음 날, 아침 조회를 마친 고청운은 평소대로 홍려사 쪽으로 걸어가다가 예부의 오 시랑과 만나 함께 길을 걷게 되었다.
향시가 열리는 해인 올해 4월에 주임과 부시험관 차출이 다시 시작됐는데, 이번에 시험관으로 나설 예정인지 묻는 오 시랑의 물음에 고청운은 즉석에서 바로 생각이 없다고 밝혔고, 오 시랑은 이를 들으니 못내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현재 그의 품계로는 시차(*试差: 조정에서 파견하는 향시의 시험관)를 나가게 되면 당연 향시의 주임 시험관으로 선발되어 한 성의 향시를 주관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홍려사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야 비로소 업무의 두서가 손에 잡히기 시작했기에, 마음속으로야 너무 가고는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청운은 황제에게 친지 방문 휴가를 내고 고향 어른들을 만나러 고향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방인소의 건의로 잠시 가고자 하는 마음을 누르고 이 새 직무 적응 기간이라는 과도기를 넘기고 나서 차후에 다시 기회를 보기로 했다.
홍려사는 정말 한가한 관서였기에, 일이 바쁘지 않을 때는 여유 시간이 꽤 많았는데, 그는 이런 여유 시간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결코 한가로움을 즐기는 성정이 되지 못해, 시간이 생기면 쓰고 싶었던 포수 양성 과정에 대한 목록을 완성해 육훤이 있는 병부의 수사(*수군) 부서에 전달하고 의견을 묻고는 했다.
이 일이 끝나자, 고청운은 슬그머니 다시 체력 훈련을 하며 며칠 뒤 열릴 축국 경기를 준비했고, 그 외에는 시박제거사(*市舶提举司: 항구 도시에서 상선을 관리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수입품을 관리하는 부서)에 관심을 돌렸다.
시박제거사는 일반적으로 시박사로 약칭하기도 했다. 고청운은 역사자료를 살펴본 결과, 시박사가 당나라 때부터 존재하기 시작하여 송나라 때에 부흥했다가 전 왕조에서 그 기세가 좀 잠잠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부서는 쇄국적인 정책에 영향을 받아 한때 폐지되었다가 본 왕조에 이르러 비로소 재개된 부서로, 본 왕조에서는 해안가에 형성된 도시에 시박사를 설치했는데, 그중 양성의 시박사의 규모가 가장 커서 해상 무역을 주관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이전에 단지 시박사에 대한 직책을 얻어들은 적이 있을 뿐, 깊이 알고 있지 못했으나, 지금은 시간이 좀 여유로워진 만큼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다.
시박사는 주로 해외 무역에 대해 조세를 징수하여 이를 호부(户部)에 귀속시켰는데, 외국의 선물들도 이 부서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그들 홍려사는 때때로 시박사와 접촉할 일이 있었다.
고청운이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을 모두 훑어보고, 관보들도 다 읽은 후, 내부적인 제도를 운영하는 시박사는 해외 무역에 대한 관리가 매우 엄격한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생에 보았던 세관 자료를 힘겹게 회상하면서 자신이 이제는 그와 관련된 기억을 아주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긴 그때의 그는 이쪽 방면으로 관심을 기울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내용을 다시 회상해 보고자 노력했으나, 금방 한계에 부딪쳤다.
‘사회에 나가기 전에 충분히 공부를 해뒀어야 했는데…….’
고청운은 재차 탄식하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구석에 정교하게 세공된 물시계의 시간을 살피고는, 다시 자신의 품속에 있는 회중시계를 더듬어 시간을 확인해 보더니 황실 장서루에 가서 몇 권의 책을 더 빌려 보기로 결심했다.
이 회중시계는 며칠 전 그의 생일 때, 아이들이 함께 돈을 모아 사준 생일선물이었다.
하 왕조가 해상 통행 금지령을 철회하여 해양을 개방한 뒤 외국과의 해상 무역이 잦아지자 회중시계라는 문물도 바다를 건너왔는데, 가격이 너무 비쌌다. 또 고청운은 물시계와 태양으로 시간을 가늠하는데 익숙해져 미처 이를 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후 정신없이 바삐 지내다 보니 회중시계에 관심이 있었던 사실조차 잊어버렸다가 아이들이 문득 자신에게 회중시계를 사다 줄 때가 되어서야 그 사실을 떠올렸다.
생각을 마친 고청운은 한껏 입꼬리가 올라간 채 품속을 더듬어 시계를 간수한 후 장서루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는 아직까지는 이런 정보를 조합해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의 직위는 시박사와 크게 연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잘 보고 있는 업무에 참견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냥 자신이 앞으로 정말 시박사에 유용한 제안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예를 들면 기술 서적을 수출할 수 없게 한다든가, 어떻게 하면 본 왕조의 경제 발전에 따라 관세를 조정할 수 있을까 등등 이런 사상이 정말 쓸 만하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남에게 이런 유용한 사상을 알려주고 싶었다.
게다가 그가 아는 사람이 시박사에서 근무하고 있기도 했다.
고영량의 장인인 영승언이 상복 기간을 다 마치고 바로 국공부를 떠나 성남의 사중 사합원 운영을 도맡으며 기복(*起复: 관리가 복상 후 기용되는 것)한 것이었다.
그가 이전에 근무하던 호부의 자리에는 이미 다른 이가 앉아 있었기에 그는 경성을 떠나 지방직으로 근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이에 그의 품계가 고려되어 산둥성 등주(登州)에 있는 시박사의 정5품직인 해당 지역 시박사의 최고 관리자가 되었다.
게다가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시박사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고청운은 이쪽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 * *
장서루에서 공번충과 마주친 고청운은 퇴근 시간이 되자 일부러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공번충은 책을 안은 채 안에서 나오다가 나무 밑에 서 있는 고청운을 보고는 짐작 가는 바가 있어 그에게로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도 또 아들 일이 물어보고 싶어진 겐가?”
공번충이 그를 놀리며 말했다.
“내 언제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제가 무슨 어미 닭처럼 아이들 뒤를 졸졸 쫒아 다니는 줄 아나봅니다. 게다가 공 형이 한림원에 있는데 내 뭐가 걱정 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가 이렇게 물어 온 이상, 고청운은 당연히 아들 일로 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고청운은 예전에 공번충이 아주 까칠하고 도도한 사람인 줄 알았지만, 오래 만나오며 그와 친해지자 그가 아주 어울리기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번충은 여전히 웃기만 할 뿐, 말없이 다른 의미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청운은 그를 침착하게 한 번 돌아보고는 먼저 발걸음을 내딛어 앞서 걸어갔다. 그는 길에서 아는 관리들을 만나 인사말을 건네기도 했는데, 이미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긴 터라 마주치는 관원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참, 휴무일에 축국 경기가 있는데 보러 가십니까?”
고청운이 물었다.
공번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은 싫네.”
고청운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의 품안에 안긴 다섯 권의 책을 바라보았다.
“천문학 연구를 시작한 겁니까?”
관련된 얘기를 꺼내자, 공번충의 표정이 살짝 살아났다.
“그렇네, 머리 위에 있는 별이 총총한 하늘에 자꾸 빠져들게 되더군.”
고청운은 말이 없었는데, 이 방면에 대해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었다.
“자네는 요즘 홍려사에서 어떻게 지내는가?”
공번충이 그에게 다시 물었다.
“바쁜가?”
“아직도 손에 들려있는 업무에 겨우 적응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때로는 아직 갇혀 있는 포로들도 보러 가줘야 하고 말이죠. 그런데 솔직히 얘기를 하자면, 포로들 중에서 특히 그 총독 말입니다, 얼마나 여러 곳을 다녀보았겠습니까. 어찌나 식견이 넓은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제 식견과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고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예전에 이미 배워둔 외국어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부서에서 내부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외국어들을 더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가 꼭 직접 배우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자네 홍려사에도 인재가 아주 많을 텐데, 필요한 통역만 있으면 되지 않은가?”
공번충이 매우 진지하게 건의했다.
고청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공 형 말이 맞습니다. 틈틈이 남는 한가한 시간에만 스스로 공부를 좀 해 보고, 다른 일로 바빠지면 잠시 그만 둘 겁니다.”
정말 재주는 배워두면 다 도움이 된다고, 그는 사전에 미리 익혀 두었던 외국어 학습의 경험이 있으니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려사의 관리들은 다른 부서와 달리 대부분 한 가지 이상의 특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적어도 어떤 특정 나라의 국정, 문화, 언어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은 하 왕조 주변에 있던 외국에 대해선 아주 소상히 알고 있는 반면, 서방 국가들과는 정식으로 접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정이 좀 달랐다. 이 몇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관원은 아직 희소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꼭 그가 나서서 배우지는 않아도 되었다.
고청운은 시박사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나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외국의 산술 서적, 수리 서적 등 기술 서적을 계속 번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다 건너 과학 기술의 발전에 언제나 관심을 쏟고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을 가늠해 보던 그는 아직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 퇴직 후의 여가 시간이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 * *
어느새 두 사람이 서로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에 다다르자, 공번충은 잠시 멈춰 서서 진지하게 고청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에게 한번 고영랑 이야기를 해 볼까? 그는 매우 영민하여 하나를 보면 열을 깨우치더군. 일도 아주 잘하고, 대인관계도 좋네. 자네의 첫 관직 생활을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더 나은 것 같네.”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얼이 빠졌다가 다시 정신을 붙잡고 웃으며 말했다.
“제자는 스승보다 뛰어나고 후세 사람은 옛 사람을 초월하는 법이라지요. 저는 공 형의 말이 아주 기쁘게 들립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헤어졌다.
공번충과의 대화는 그에게 잠시나마 요긴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되었다.
고청운은 하늘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곧장 집을 향해 돌아가려고 했지만, 가는 길목에 행인이 너무 많고 또 몇 개의 골목은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붐벼서 어쩔 수 없이 길을 우회해서 집으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