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은음 혜택
고청평이 서신을 읽어 내려가자 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졌고, 정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만이 들려왔다.
계속 허허 웃으며 귀 기울여 듣던 노진씨는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허벅지를 툭툭 치고 웃으며 말했다.
“잘되었구나, 이 할미의 손주는 정말이지 빼어난 재주를 지니지 않았더냐. 우리 집안사람을 관직에 올려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다니, 정말 큰일을 해냈어.”
고청평과 고청안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옆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그들의 처들도 서로를 마주 보았는데, 그들의 눈빛에서는 한 줄기 섬광이 번뜩였다.
“형님께서 화포 개조와 전쟁 배상 협상으로 공을 세우셨으리라고는 정말이지 생각도 못했습니다. 요 며칠간 전 제 동기들과 줄곧 현성에서 모여 외국인과 벌였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우리 왕조가 승리를 거둔 것은 둘째 치고, 배상금을 은자 800만 냥이나 받아냈다고 하지 뭡니까. 그때 저희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조정에서 참으로 일을 잘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그 중간에 형님께서 관여하고 계셨던 거군요.”
고청평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정말이지 우리 형님은 총명하고 대단한 인물이야!’
모두가 같은 형제 사이인데, 어째 이리도 큰 차이가 난다는 말인가. 그는 고청운과 비교 당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만약 그런 비교를 당했더라면 정말로 기분이 나빴을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전자의 말에 의하면 은음의 혜택을 누구에게 줄지는 우리끼리 정하라고 합니다. 전자는 여기에 손을 대지 않겠다면서요.”
고대하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저희 집안의 기둥이 아니십니까? 이에 대해 결정을 내려 주시지요.”
이 씨는 급히 고이하를 바라보고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을 함께 내비치며, 속으로 생각했다.
‘왜 아까 형님은 이 사실을 내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 이미 손을 쓰기는 늦은 건가?’
“이건 뭐 더 말할 것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저희 집안의…….”
이 씨는 재빨리 말을 잇다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두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혜택을 첫째에게 줄까, 아님 둘째에게 줄까. 흠, 당연히 첫째에게 주어야겠지? 둘째는 세심하다고는 하나, 첫째는 장남이고, 애들 아빠도 장남과 장손을 더 잘 챙겨주니 말이야. 됐다, 어차피 이 엄청난 수혜를 다른 집안에 빼앗기지만 않으면 우리 아들 중 누가 되었든 무슨 상관이야, 누가 되든 다 같은 결과일 텐데.’
이 씨는 생각만 해도 가슴 한편이 흐뭇해졌다.
‘9품관이라. 품계야 좀 낮지만, 그래도 벼슬아치가 아닌가.’
그녀는 9품이라도 싫지 않았다.
”그 입 다물지 못하오! 여기 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이 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이하가 큰 소리로 일갈했다.
”당신만 또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소! 아직 어르신께서 입도 뻥끗하지 않았는데 당신은 무엇을 멋대로 결정짓고 있는 것이오!”
그는 즉시 고계산과 고대하 쪽을 향해 돌아서서 진중하게 말했다.
“아버지, 형님, 제가 보기에 이 혜택은 아무래도 문중 분들과 상의해서 결정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적당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백성들이 수긍할 수 있고 또 복종할 수 있는 사람이여야만 우리 전자가 이리 어렵사리 얻어낸 기회를 아깝지 않게 쓰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한 번 보십시오. 전자가 서신에도 이리 적지 않았습니까, 만약 현령의 마음에 차지 않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정원으로 내세운다면, 그 기회가 면직 처리되어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이리 되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반드시 신중히 선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고대하는 뜻밖이라 그의 친동생을 쳐다보았다.
노진씨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이 씨를 탐탁지 않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씨는 너무 화가 나서 자기 집안의 며느리들 앞에서까지 좋지 않은 안색을 내비쳤다. 남편인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굴면 이제 그녀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다만 그녀는 고이하의 매서운 눈빛에 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부부의 연으로 살아왔는데도 난 아직도 언제 나서야 하는지, 몸을 사려야 하는지 파악도 못하고 있었구나! 게다가 우리 집안의 형편이 좀 나아지기 시작한 이래로, 난 부군이 다른 벼락부자처럼 어디 밖에서 이상한 요부를 데리고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도 진즉에 부군의 말을 잘 따르고 듣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그와 소란을 피우다니. 그러면 아니 되었어…….’
고계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둘째 아들은 어릴 적부터 말을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 부모 밑에서 자라 사람됨이 혼자서만 덜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 우리 둘째가 사리에 밝구나.”
고계산이 만족스러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역시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고 마구잡이로 으르렁거리며 빼앗으면 안 되지. 지금 우리 집은 먹고 살 걱정 없이 지내니 얼마나 좋으냐. 예전의 고생스러운 생활보다 얼마나 나아졌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 사람이라면 지금 이 생활이 충분히 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은음의 기회는 전자가 공들여 받아온 건데, 당초 그 아이를 공부시키는 데 애초에 너희 백부님네가 우리 집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셨더냐. 그래, 첫째야, 내일 고씨 가문의 수장과 소명이, 모두를 불러들이거라. 모두 함께 상의해서 정하기로 하고 우리끼리 의가 상하지 말자꾸나.”
고청명이 이렇게나 컸는데도 어른들 입에서는 아직도 그를 '소명이(小明)'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고청운은 고향에서 온 서신으로 이 애칭을 볼 때마다 웃고 싶어졌다.
고대하도 바삐 찬성했다.
“피곤하구나, 더 할 말이 있거든 내일 하자.”
고계산이 피로감을 내비쳤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일동 당황했다.
고대하와 고이하 형제가 급히 가서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으켰다.
노진씨는 겉으로 빙글빙글 웃으며,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 스스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혼자 안방으로 걸어갔다.
* * *
안방으로 돌아온 노진씨가 고대하에게 당부했다.
“큰애야, 조만간 마을 어귀에 사람을 보내 미리 주의시키거라, 무슨 큰일이 생기면 우리는 늘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고대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어머니, 마음 편히 계세요. 무슨 소식이라도 들리면 바로 고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입을 새 옷도 좀 지어주렴.”
노진씨가 또 말했다.
“전자가 보내온 서신 좀 이리 내오거라, 내가 좀 보자꾸나.”
고대하는 그것만은 좀 꺼려졌으나 이내 그러겠노라 답했다.
‘어머니의 수중으로 들어간 서신은 나중에 어떻게든 다시 돌려받아 잘 보관해 둬야 해.’
* * *
고계산과 노진씨가 마저 휴식을 취하러 들어가고 나자, 고씨 문중 사이에서 고청운의 승진과 더불어 특히 은음으로 한 명을 벼슬자리에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다른 집들은 자신들이 여기서 가져갈 몫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대로 괜찮게 담담하게 굴고 있었지만, 고청명과 고청운의 집안을 통해 계속 수소문하고 있었다.
나이든 어른들과 항렬이 높은 어른들은 이번 일로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이번 일로 두 집이 싸우고 서로 미움이 생겨날까 걱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의 관계에도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될 텐데, 그런 상황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임계촌의 마을 사람들조차 이 소식을 분분히 전해 듣고는 이 추운 엄동설한에는 친지들끼리도 잘 왕래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모여들어 이번에는 고씨 가문에서 싸움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며 의견이 분분했다.
이것은 정말 날로 관리가 될 수 있는 하늘이 주신 기회가 아니던가! 이십 몇 년 전에 수재가 된 직후부터 관계를 좀 유지해 왔었다고 하면, 그래도 비교적 쉽게 현아에서 일자리를 찾았을 텐데,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아니 될 말이었다. 적어도 거인 신분은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재들은 직위가 더 낮은 서리 등으로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추측과 달리, 두 가족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하게 보내고 있었다.
* * *
“아니 여보, 문중의 수장 되시는 분도 이 혜택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는데, 왜 기뻐하지 않으십니까?”
이 씨는 이 소식을 접하고부터 다시 좌불안석이 되어, 고신하의 아내 도 씨와 일부러 만나보고 오기까지 했다.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마시오. 아버지께서는 틀림없이 소명이에게 이 벼슬자리를 내어 줄 테니 말이오.”
고이하는 그녀를 한 번 노려보고 잠시 혼자 생각해 보더니, 생각을 바꾸어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에게 제대로 된 설명해줘서 이 맹랑한 아내가 더 이상 밖에서 미움을 사지 않도록 하기로 했다.
”당신도 생각을 해 보시오. 우리 아버지와 백부님이 서로 어떤 사이셨소? 그들은 친형제 지간으로, 이곳에 정착해서는 백부님께서 우리 집 일을 많이 도와주셨소. 특히 전자에게 도움을 많이 주셨는데, 어릴 적 전자가 몇 번이나 큰 병을 앓을 때마다 매번 백부님께서 돈을 빌려주셔서 제때 치료해 줄 수 있었지 않소. 무엇보다 백부님께서는 먼저 전자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득해 주셨으니, 백부님이야말로 우리 전자를 공부의 길로 갈 수 있게 해 주신 은사님이라오.
당신의 두 아들도 이미 이 일은 없던 일인 것처럼 굴고 있지 않소? 그들은 이미 다 서로 생각한 바가 있는 것이오.”
다행히 아들들은 계속 그가 끊임없이 사람됨을 가르쳐 왔기 때문에 그들의 어머니처럼 머리가 가볍지 않았다.
실은 고이하도 이번 일이 매우 아쉽긴 했다.
“백부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그 자리가 우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백부님께서는 안 계시니 그 아련한 마음에라도 소명이에게 이 혜택이 돌아갔을 것이오.”
게다가 고이하는 다른 문중의 사람들도 고청명에게 한 표를 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마을에서 여러 해 동안 교편을 잡았고, 그의 아버지인 고신하도 여전히 문중의 수장이었으며, 현재 그의 남동생인 고청량은 마을에 사탕수수 공장을 차리는 등 그들 가족이 임계촌에 두터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청명이 현아로 가서 관직생활을 하게 된다면, 비어버린 족학의 강사 자리는 또 어느 집 아들을 불러서 대신 맡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시작되었다.
“어쨌든 당신, 이번 은음 지정으로 때문에 난장판을 만들거나 외부인들 사이에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고이하는 그녀의 사람됨이 아쉬웠다.
“절대 형수님께 가서 이상한 말 하지도 말고.”
그는 그들이 조카인 고청운에게 나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카의 마음에만 들 수 있다면, 그의 집에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설사 나중이 없다 하더라도 그와 큰형은 친형제지간이니, 큰 집에 다른 또 좋은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자신을 잊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