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서신 (2)
그가 상쾌한 마음으로 방에서부터 걸어 나올 때, 마침내 소진씨가 정신을 차렸다. 왠지 모르게 그녀는 매번 울고 나면 마음이 많이 편안해져 더 이상 울기 전처럼 괴로워하거나 하지 않았다.
“시부모님께서 아직 보지 못하셨는데, 서신을 벌써 거두셨어요?”
소진씨는 그의 모습을 보고 한번 노려보았다.
고대하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아뿔싸, 오늘 너무 기뻐서 그만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것을 잊고 말았구나.’
그가 낙담하여 서신을 가지러 돌아갔다 오자, 소진씨는 그와 어느 시간대에 맞추어 어머니에게 고명 부인이 된 소식을 알려야 하는지 상의했다. 어머니가 너무 크게 기뻐하셔서 기복의 편차가 크지 않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만일 정말로 즐거움이 극에 달해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이 좋은 소식으로 인해 아들에게까지 누를 끼칠 수는 없었다.
“기회를 봐서 차근차근 얘기해 보시오. 어머니께서는 이미 격랑을 다 겪어보신 분이니, 너무 갑자기만 알리지 않은 것이라면 별일 없을 게요.”
고대하는 크게 괘념치 않고 그녀에게 당부했다.
”내 보아하니 새해가 되어 관청에서 부인들의 고명 소식을 보내올 텐데, 반드시 그 전에 어머니께 잘 말씀드려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하시오. 이번 춘절은 남동생네도 아직 마을에 있으니, 제수씨와 같이 가서 말씀드려 보시구려.”
”그걸 당신이 전하지 않고요?”
소진씨는 그를 힐끗 보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참, 영감님, 그 은음의 정원을 누가 혜택 볼 수 있게 해 주시려고 생각하십니까?”
비록 고계산은 하루 중 반나절 이상을 침상 위에서 누워 지내고 있었지만, 계속 치료를 진행하고 있는데다가 돈을 아끼지 않고 보양 음식을 먹게 하여 정신은 아직 또렷했다. 다만 몸이 좀 허약해졌는데, 고계산보다는 노진씨의 몸이 조금 더 건강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이 일에 참견하려 들지 않을 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할 것은 아니니.”
고대하는 가벼운 표정으로 나무상자 안의 물건들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내 짐작에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분명 큰조카 소명(*小明: 고청명의 아명)이에게 건네주려 하실 것이오. 아버지와 백부님의 관계가 그리 깊으셨으니 말이오. 게다가 백부님께서 돌아가신 지금, 우리 집안에야 청운이가 있으니 우리 쪽은 어찌해도 백부님 댁보다는 잘 지낼 수 있지 않소.”
그는 여기까지 말한 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상자를 더 뒤적여 함께 전달된 은표 몇 장을 꺼내 들고 금액을 다 합산하여 보았다. 이는 그가 당초 큰손자 소석이가 상경할 때 들려 보냈던 금액보다 배나 많은 돈이었는데, 아들이 서신에서 언급한 약값이 이것이구나 싶어, 고대하는 얼굴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은 아들을 돕기 위해 그들이 경성에 집을 구매할 때 돈을 좀 내서 힘을 보태려 했는데, 그때 갔던 돈이 지금 또다시 아들이 자신의 부모님께 드리는 약값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대하는 가끔 자신의 아들이 여느 집 딸들보다 더 세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이는 늘 많은 일들을 사전에 잘 강구해놓았다가 알맞게 처신하고는 했던 것이었다.
소진씨는 고대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말 또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별로 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누구에게 준다고 한들, 저는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그녀는 집안의 두 노인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에휴, 사람이 늙으면 정말 탈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시부모님께서 요 몇 년간 몸이 좋지 않으셔서 자주 아프시니 말입니다.”
최근 2년 동안 양가의 총 네 명의 노인이 서서히 노쇠하여 병들게 되었는데, 그들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도대체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때 소진씨는 밖으로 걸어 나가 여종을 불러 옆집에 있던 고청운의 숙모인 이 씨에게 이리 건너오라고 전하도록 했다.
“형님, 절 찾으세요?”
사람이 보이기도 전에 이 씨의 큰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고대하는 몸을 돌려 안채로 들어갔다.
“자네에게 상의 할 일이 좀 있네.”
“아유, 전자가 부친 물건이 또 왔어요?”
부잣집 마님 같은 차림새를 한 이 씨는 낯익은 상자를 보더니 눈이 반짝 뜨이는지 얼른 잰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와 들여다보았다.
소진씨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는데, 고대하가 안에 있던 물건들을 벌써 다 꺼내어 진열해 두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집이라고 표식이 붙은 상자를 들어 이 씨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전자가 사람을 시켜 보내온 명절 선물이라네. 도대체 인편에 이런 것을 가져다 주라고 부탁하다니. 너무 많이 부칠 수는 없으니 이 정도만 부친 모양이네.”
사돈 쪽에 보낼 물건도 있을 것이었다.
이 씨는 즉시 물건을 받아와서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바삐 말했다.
“전자는 그냥 우리를 위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 뭘 또 해마다 그리 먼 곳에서까지 우리에게 선물을 보내온대요. 우리 전자는 정말 좋은 아이예요. 유능하고, 효성 깊고, 배려심도 많잖아요. 그 애보다 더 나은 아이는 아마 없을 거예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나무상자에서 손을 떼지를 못했는데, 그 안에는 책 두 권만 달랑 들어있다고 해도 좋았다.
소진씨는 이 씨와 너무 많은 불필요한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동서가 현성에 가서 살게 된 후 더욱 말이 유창해지고 있음을 느꼈는데, 지금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 씨는 틀림없이 한창 또 다른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을 것이었다.
“한 가지 더 있다네, 무슨 상황이냐면…….”
소진씨는 고청운의 승진으로 노진씨가 고명을 받았다는 소식을 직접 전해 주었는데, 은음에 대한 이야기는, 음, 우선은 잠시 알리는 것을 미루기로 했다.
“어머나, 어찌 이렇게나 좋은 일이!”
이 씨가 힘차게 발을 구르며 감탄에 젖자 그녀의 머리위에 꽂혀 있는 술이 달린 금장식이 몇 차례 따라 흔들렸고, 그녀의 얼굴에는 과장된 놀라움이 역력했다.
“우리 전자가 정말이지 유능합니다. 몇 년밖에 안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승진을 하다니요.”
그녀는 반갑고도 부럽다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자신의 형님은 평소에 말없이 잠자코 있는 성정으로 보이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은 정말이지 특출 난 재능이 있어 다른 사람들이 어찌해도 그를 따라갈 재간이 없었다. 예전에 자신은 어떻게 해서라도 서로 비교라도 해보고 그 뒤를 쫒아가 보려고 해 보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고청운의 품계와 직위는 나날이 높아져만 가자 이제는 그럴 의욕조차 사라지고야 말았다.
만약 자신의 부군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함부로 자랑하지 못하게 제제만 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매일 같이 연회장을 돌아다녔을 것이었다. 매번 다른 부인들이나 규수들이 그녀를 향해 던지는 부러운 시선을 느낄 때마다 그녀는 온몸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아들들이 과거 시험에서 한 단계만이라도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이 씨는 고청운이 매번 보내오는 선물에 장신구 따위 없이 책 두 권만 들어 있어도 그저 무척이나 기뻐했다.
“형님, 참 좋은 일이 아닙니까. 우리 어머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이 씨가 마저 말했다.
“아마도 병의 반은 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소진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은 일이기는 하지. 다만 어머님께 어떻게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는가? 전자의 말이, 어르신들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말을 전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데.”
“나는 또 그게 얼마나 큰일이라고요.”
이 씨가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말했다.
“형님, 안심하세요. 제가 좀 이따가 어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결국 시부모님께도 분명 소식을 알리는 사람들이 올 테니, 얼른 우리 쪽에서 먼저 알리는 것이 낫겠지.”
소진씨가 말을 마치자, 그들의 시어머니인 노진씨가 들어오더니 고청운이 물건을 보냈느냐고 물었다.
소진씨와 이 씨 역시 먼저 알고 오신 것이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이 집에서 고청운과 관련된 일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재빨리 후원에 보고부터 하고는 했던 것이다. 사실 고계산과 노진씨는 이미 오래 전에 사람을 시켜 상황을 물어보게 하고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 후, 고대하 부부와 고이하 일가족은 호탕하게 고계산이 지내는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 * *
이들이 후원 쪽을 통해 노부부의 거처로 향했을 때, 고계산과 노진씨는 이미 부축을 받고 나와 안채 응접실에 먼저 앉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 안부 인사를 올리고 나서 한참 만에 한 사람씩 다들 자리에 앉았고, 같이 있던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야 노진씨가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 물었다.
“그래, 듣자하니 전자가 물건을 보내왔다고?”
고대하가 고계산을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그의 정신이 맑아 보이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보내온 것이 있습니다. 제가 막 서신을 읽자마자 건너온 참입니다.”
고계산은 간혹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엔 정신이 또렷하게 깨어 있었고 아직 사람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매번 이렇게 해야겠느냐. 내게 먼저 가져와 같이 보자 그리 일렀거늘, 다음번에는 명심하거라.”
노진씨가 그를 원망하며 한마디 했다.
“하하, 두 분께서 쉬고 계시는 것을 보고 제가 그만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먼저 뜯어보았습니다.”
고대하가 일부러 머리를 긁적이며 어수룩하게 웃었다.
“에헴, 전자가 서신에 뭐라고 써 놓았더냐?”
고계산은 그들 모자가 한참 동안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껴들었다. 그의 말투는 기력이 좀 없어 보였으나, 정신이 워낙 또렷하여 고대하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위력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청평과 고청안도 서로를 쳐다보았는데, 그들의 눈빛에도 기대가 서려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정말 희소식입니다. 우리 전자가 다시 한번 승진을 했다고 합니다. 4품관으로 승진했다고 하니, 지부만큼이나 높은 위치에 오른 겁니다.”
이 씨가 먼저 입을 열어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전자가 큰 공을 세웠다며, 이번에 어머님께서는 폐하께서 하사하신 고명인가 하는 봉호를 받게 되실 겁니다. 정식으로 고명 부인이 되시면, 형님과 같이 이제 폐하께서 주시는 녹봉을 받으시는 부인이 되시는 거예요.”
“뭣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다들 아주 커다란 기쁨에 차올라 있었는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친지들이니 가족의 승진 소식을 싫어하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더욱 몸을 곧게 펴고 자세를 고쳐 앉은 노진씨는 얼굴의 주름살이 마치 꽃과 같이 옅게 드러났는데, 그녀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가 다 기쁨을 표출하고 있었지만 막상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말도 안 되느니라.”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오히려 함박웃음이 지어져 있었고, 마치 방금 무슨 대단한 영약을 먹은 듯 생기가 돌고 있었다.
“이것은 절대 헛소리가 아닙니다. 그렇죠, 형님?”
이 씨가 노진씨에게 곧장 대답했다.
”동서 말이 맞습니다. 어머님, 제가 전자가 써서 보내온 서신을 직접 읽어보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머님께서는 이번에 정말로 폐하로부터 고명을 봉증 받으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봄이 오면 황후마마께서 바로 지시를 내리실 겁니다.”
소진씨가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기쁨에 젖어 크게 즐거워했다.
“첫째야, 어서 서신 좀 가져와 읽어보거라.”
고계산은 기뻐서 얼른 고대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대하가 머뭇거리자 맞은편에 있던 고청평이 말했다.
“할아버지, 백부님,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고대하도 더는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은음으로 관직에 올릴 수 있는 정원을 1명 할당받은 일도 조만간에 알려야 했기에,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읽으라고 눈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