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은음(恩荫) (2)
고청운은 큰할아버지 가족이나 숙부 가족 모두와 친했고, 양쪽 집안 다 자신에게 잘해 주었다.
어릴 적에 큰할아버지 고백산이 고청운의 부모님을 설득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글을 깨치거나 할 기회도 없이 지금 같은 나날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때 그는 서당을 다니는 데 돈이 꽤나 필요했었는데, 큰할아버지가 나서준 덕분에 집안의 부담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숙부인 고이하의 경우, 그가 수재에 합격하지 못하고 있던 그 여러 해 동안 온 가족이 함께 절약하고 돈을 모아 그가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었다. 숙모가 이따금 듣기 싫은 말을 했더라도, 숙부는 그런 숙모를 제지하며 큰 갈등이 야기되지 않도록 애써 주었었다.
이에 고청운은 여러모로 생각해 본 결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집안 어른들에게 아예 결정권을 양보해 버렸다. 어차피 그는 누구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더라도 이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럼 어르신들이 누구에게 그 자리를 주실까요? 당신은 예상해 보실 수 있나요?”
간미는 조금 궁금해졌지만, 계집종 한로(寒露)가 고개를 들고 자신을 향해 뜨거운 물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몸짓을 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욕실에 뜨거운 물이 다 준비가 되었다니, 어서 일어나 씻으세요.”
고청운은 심드렁하게 눈을 떴다가 결국 일어나 씻으러 가기로 했고, 채비를 하며 간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대략적으로 할아버지의 생각을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소만, 과연 그 생각대로 결정을 하실지는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오.”
* * *
다음 날, 홍려사로 출근한 고청운은 이미 한 달여간의 시간을 들여 그들과 만나면서 홍려사 사람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한 바와 그는 관 소경과 봉 소경의 도움이 어우러지며, 아주 빨리 해당 부서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업무가 아직 손에 익기 전에 고청운은 먼저 오 시랑의 집을 찾아 방문했는데, 오 시랑이 그 직위를 맡아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청운이 그의 집을 방문한 주요 목적은 홍려사가 독립적인 기관이라고는 하나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어쩔 때는 예부의 지도에 따라 업무를 나누어 처리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이에 예부와 접촉할 일이 매우 많은 만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테니 그와의 관계를 소홀히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고청운이 오 시랑의 집에서 나올 무렵, 그의 손에는 두루마리 그림 한 폭이 들려 있었다.
그는 이를 보며 절로 웃음을 지었는데, 이는 오 시랑이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해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 시랑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지만, 고청운은 이 그림의 가치에 기뻐하기보다는 이 그림 속의 내용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고청운 등 일행이 서양 총독과 담판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는데, 당시 여러 사람들의 표정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는 등 당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매우 뛰어난 생동감 넘치는 그림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고, 회담 초기에 화가 나 있던 자신의 심정도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다만 그가 이 그림에 대해 소소하게 가지고 있는 불만은, 오 시랑이 자신이 화를 내며 책상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냈다는 것 정도였다.
‘아니, 난 한결같이 온화한 모습으로 일관하며 협상에 참여했는데. 그리고 이 주제로 그림을 세 점이나 그리셨다고 하고는 왜 하필 이 그림을 나한테 주신 거지?’
어찌되었건 그래도 고청운은 이 그림을 얻은 걸 매우 기뻐했다.
오 시랑 댁을 방문하고 난 후 고청운은 황제를 모시고 거행되는 아침 조례에 대한 기본예절을 배우는 데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그랬다, 이 역시 배워야 할 게 많은 분야였는데, 여기에다 그의 새로운 홍려사의 직책까지 겹치니 일반적인 4품 관원과는 다르게 그가 배워둬야 할 내용이 더 많았다.
《송사》의 직관지(职官志) 5권에 이르면 홍려사에 대한 묘사가 아래와 같이 나온다.
[홍려사는 외빈의 방문 관리와 연회의 주최 및 위문공연, 황제가 하사하는 연회 및 송별연을 주최하는 일을 도맡는다.]
기본적으로 전 왕조와 하 왕조에서는 이 직무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홍려사의 직책은 주로 외빈을 접대하는 것이며, 외빈이 하 왕조를 방문했을 시에는 그들의 숙박과 식사 및 조정과의 의사소통을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업무범위로는 하사품의 상여와 그들의 영접과 송별등에 대한 업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홍려사는 사례(*司礼: 외교 및 국가의 의례)를 맡아보는 행정 기관으로, 고청운 외에도 좌, 우소경이 각 한 사람씩 있었고, 그 아래에는 주부청(*主簿厅: 보좌기관)이 설치되어 있어, 공문 수발 및 교류 등의 업무를 처리하게 했다. 이 외에도 사의서(*司仪署: 상례와 장례 절차와 조목을 맡아보던 관서) 및 사빈서(*司宾署: 외국 사신이 당국을 방문했을 때의 의례를 담당하는 관서) 역시 홍려사의 직속 관서로, 위아래로 근무하는 인원을 합치면 70여 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하 왕조에서의 홍려사는 이외에도 아침 조례, 의례 지도, 출국 외교 사절, 지방 소속 이(吏)들의 경성 내방과 관련된 분야도 관장하고 있었는데, 이 분야는 모두 고청운이 힘써 배워야 하는 것들이었다. 비록 이러한 의례들과 의례의 주관에 있어 그가 직접 인솔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의례상의 조취를 취해야 하는지 정도는 잘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고청운은 관련된 공부를 시작했을 때 봉건 왕조에 정말 많은 의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걸 하나하나 기억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았다.
예를 들면, 매일 아침 진행되는 아침조례에서 관원들의 입석 순서를 지켜 조정에 드는 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매번 조례에는 4품 관원들만이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황제가 최근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해가 필요할 때 동석하기도 하고, 또한 다른 관원들이 순례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들을 적절한 위치로 배치해 주고 의례 진행을 인솔하는 것이 바로 홍려사의 관원들이었다.
특히 매년 정월 초하루에 열리는 대조회에서는 경성의 모든 관원들이 한곳에 모이게 되는데, 이때 홍려사와 예부는 더욱 바빠져서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을 틈조차 없었다.
“대인, 우리 홍려사는 항상 태상사, 광록사, 예부와 왕래가 잦은데, 매번 조정에 상례나 장례가 있을 때마다 그들과 연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외에는 주로 외빈과 관련된 업무가 주를 이루는데, 관련 업무 중 제일 어려운 것이 바로 외국으로의 출국해서 진행해야 하는 업무지요. 매번 외국의 국왕이 새로운 후계자를 세우거나 혹은 다른 문제가 생기면, 조정에서는 우리를 파견 보내어 책봉에 관여하게 하거나 그쪽의 실태에 대한 것을 알아오게 합니다.”
관 소경은 고청운의 질문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최대한 아는 대로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태상사는 제사를, 광록사는 연회를 주로 주관했는데, 이 두 기관에 대해서는 고청운도 아는 바가 있었다. 외국으로의 출장 업무에 대해서는 때로 한 번씩 다녀오는데 반년이 소요되니 당연히 힘든 일이었다.
고청운은 본 왕조의 친왕(*亲王: 최상급의 작위)에게 봉토가 하사되지 않음을 기뻐했는데, 만약에라도 그들에게 봉토까지 주어졌더라면 사경들은 매일이 멀다 하고 계속해서 지방으로 출장업무를 보러 뛰어다녀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경이라는 직무도 정말이지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직함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이오?”
고청운은 구석진 곳에 있는 나무상자 하나를 쳐다보았다. 이는 그의 취임 후 외국인이 보내 온 선물로, 그도 아까 한번 열어 보았는데, 안에는 보석이니 장신구 같은 것이 들은 것이 아니고 인삼과 영지가 들어 있었다. 이는 대단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팔려고 마음먹는다면 은자 1~2,000냥은 받아 낼 수 있었다.
역시 ‘출세하면 부자가 돤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이를 보며 드디어 이 말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호부와 공부에서 지내면서 만져보았던 그까짓 이익은 낄 자리도 없었는데, 바로 이런 것이 큰 수익이라 칭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관 소경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대인, 이것은 보통 있는 일입니다. 외국의 왕자가 경성으로 건너와 유학 중인데, 그들이 대인의 취임 소식을 전해 듣고는 사람을 보내 전해 주고 간 겁니다. 모든 사경들이 취임할 때마다 모두 이런 것을 받고는 하지요.”
대답하는 모습으로 비춰 보건데 늘 이런 일이 있어왔다는 모습이었다.
생각하는 바가 있었던 고청운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고삼원을 시켜 이 선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직접 도감원(*都察院: 행정 기관을 감찰하는 관청)에 가서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고 알리도록 했다. 만약 그들이 보기에도 이 물건이 받을 만하지 않은 것이라면, 고청운은 이런 선물을 받은 적이 없던 것으로 하여 불필요한 마찰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었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수중에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니 구태여 이런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 * *
며칠 뒤, 고청운을 찾아온 담자례는 보내온 선물을 도감원에서 맡아가겠다고 하지 않고 외려 고청운에게 알아서 잘 간수하고 있으라고만 하고는, 앞으로 이러한 행위는 수용되지 않으며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고청운은 담자례를 보고, 얼른 걸치고 있는 망토를 벗고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는 오는 동안 어찌나 추웠는지 입술이 다 시퍼렇게 얼어있었다.
고청운은 얼른 다른 사람을 시켜 차를 가져 오라고 하고는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이렇게나 추운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다행히 눈이 오지 않았다네. 그런데 어째 자네가 직접 온 겐가? 참, 자네는 계속 도감원에서 근무할 생각인가?”
그의 집무실은 바닥 난방이 되어 있었다.
이 몇 년 동안 담자례는 정6품 경력직으로 도찰원에서 근무해오고 있었는데, 중간에 정7품의 감찰어사로 좌천되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이 품계에서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하여 더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고청운 등 같은 진사 동기들이 보기에는 그의 업무가 힘들지 않을까 생각되었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그 안에서의 즐거움을 찾은 것 같았다.
이렇게 친절한 자세로 나오는 고청운의 모습이 의아하고 또 불편했던 담자례는 찻잔을 손에 쥔 채 약간 불편한 듯 말했다.
“제 상관이 당신과 제가 같은 진사 동기인 것을 알고서는 저한테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음, 도감원 업무가 제게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담자례의 턱수염과 성숙하고 굳세어진 얼굴, 여윈 몸매를 바라본 고청운은 처음 그를 봤을 때 잘생기고 풍채가 늠름했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약간 아련해졌다. 시간은 정말이지 빨리 지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서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동안 전국을 누비며 뭔가 얻은 것이 있지 않았는가?”
고청운이 먼저 침묵을 깨며 그에게 질문했다.
감찰어사는 총 200여 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비리에 대한 위법적인 일들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관원들에 대한 검증까지 해야 하는 고된 일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만큼 쉽게 성과를 낼 수 있는 자리기도 했기에, 이 직위에서 3년에서 6년 정도 근무하다 보면 으레 빨리 승진하고는 했다.
그러나 담자례의 경우, 그의 성정 때문인지 이런 직위적 특성도 다 소용이 없었다. 담자례는 나쁜 일이나 나쁜 사람을 원수처럼 증오하는 성정을 지니고 있어, 너무 감정적이고 또 고집스러워서 자기 눈으로 본 것과 자신의 두 귀로 들은 것만을 믿기 때문에 남들에게 잘 이용당하고는 했던 것이다.
처음 그가 도감원에 들어갔을 때 경성에서는 파란이 일었고, 사장정마저 그에 의해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때때로 근거가 없는 일에도 달려들었기 때문에 자연히 권력가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육택과 담씨 가문이 그를 비호해 준다고는 하나, 그는 남들이 쳐 놓은 덫에 걸리기 일쑤라 자연히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관직 생활 중에 겪은 기싸움의 일화들을 엮으면 책 한 권은 나올 터였다.
이렇다 보니 그는 경력이 풍부한 사람이 되었는지 이제는 예전만큼 충동적이지 않고 차분해졌는데, 매번 탄핵 때마다 관련 증거를 확보한 뒤에야 손을 쓰고는 했던 것이다.
하긴 40대 초반의 나이면 성숙해질 때도 되었다.
“음, 많은 것을 보고 겪으며, 가끔은 밖으로 나가보기도 하면서, 이 세상은 참으로 크고 별의별 것들이 다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담자례는 고청운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더 이상 어찌하여 그가 자신에 대한 태도가 좋아졌는지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대화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