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배상 (1)
“참, 자네는 몇 가지 언어를 할 줄 아는가?”
오 시랑이 다시 물었다.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압니다.”
고청운은 솔직히 대답했다.
“영어를 배우고 나면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아, 이 1년간 제법 실력이 붙었습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 고청운은 그저 사전에 방비하면 우환이 없다는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헛되이 배운 것이 배우지 않은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계속 배움을 이어 갔을 뿐이었다.
방금 오 시랑이 그에게 물어본 것처럼, 홍려사에는 많지는 않지만 이런 외국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즘 같아서는 바다 밖으로 진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해안 쪽만 찾아보아도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오 시랑은 대답을 듣자마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쓸고는 말했다.
“이번 담판의 주요 안건은 배상을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네. 폐하와 내각의 뜻은 그들을 우리 속국으로 만드시려는 것 같은데, 절대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인가를 잘 보아야 한다네.”
고청운의 앞에서 오 시랑은 관료주의적인 고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그가 고청운을 이쪽으로 오게 하며 먼저 손을 건네 은혜를 베풀었으니, 앞으로 이 둘의 사이는 더욱 좋아질 것이었다.
“대인, 그들이 우리의 속국이 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지 싶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로부터 너무 먼 곳에 자리하고 있기에 관리하기 어렵지요. 그곳까지 한 번 왕복하는 데에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차라리 실질적인 이익을 요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속국이 되는 것에 분명히 동의하지 않을 테고, 차라리 쌍방이 함께 죽자면서 맹렬히 달려들 겁니다.”
고청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승전 소식 이후 민간에서는 속국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조정 대신들 중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번에 적군의 중요 인물 세 명이 수군의 손으로 넘어와 있었고, 상대 군함 역시 붙잡아 둔 것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포로로 잡은 적군 병사들까지 더하고 통상을 금지하는 것까지 결정한다면……. 이 모든 사항이 협상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오 시랑은 그의 말을 듣고 읊조리다가 한참 후에야 물었다.
“협약서를 작성해야겠지?”
고청운은 그에게 차를 따라 준 후에야 비로소 소맷부리에서 상주문 한 부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며칠이나 되는 시간을 들여 고안해 낸 것으로, 그는 그저 이 내용들이 미성숙한 의견을 정리한 것일 뿐이지만, 오 시랑의 고견을 끌어내기라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담판이란 전쟁의 종결을 선포하고 패전측으로 하여금 막대한 양의 은자를 배상하게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무역항을 설립하게 하여 하 왕조의 관청에서 정식 발급한 허가증이 있어야만 본 하 왕조와의 통상이 가능하도록 하고, 불법 점거하고 있던 크고 작은 섬들을 반환하게 하며 그들 세력이 미치는 세력권 내에서 하 왕조의 사람들과 외국인의 처우를 동등하게 할 것 등의 행위도 요구해야 할 텐데, 어쨌든 반드시 받아야 할 이득은 쟁취해야 했다. 이번 전쟁을 무의미하게 종결지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뭐? 은자 천만 냥?”
오 시랑은 상주문의 내용을 끝까지 다 자세히 보기도 전에 눈에 들어온 그 숫자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침 자신의 입안에 내뿜을 찻물이 들어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액수가 너무 적은 겁니까?”
고청운은 다소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이건 그저 저의 초보적인 구상일 뿐이며, 구체적인 배상 액수는 모두의 토론을 거쳐 통과시켜야 할 안건이라고 사료됩니다.”
“이, 이 액수가 적다고?”
오 시랑은 손에 쥔 상주문을 덜덜 떨며 약간 이상하다는 듯이 고청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유가 충분한 듯 아주 당당하게 말한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말을 이었다.
“물론 적습니다, 대인. 그들은 해상의 패왕 같은 자리를 누리고 있던 나라입니다. 대부분의 해상 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고, 아주 많은 배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매우 부유하지요. 만약 그들이 우리나라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거나, 다른 국가와의 전쟁으로 인해 쇠락해 가고 있는 단계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들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건 지금보다 매우 어려웠을 겁니다.”
서방 국가들의 상황을 본 고청운이 판단하기로는 지금 시대는 전생에서의 약 17세기 말 정도의 상황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는 전문적으로 염탐해 보기도 했었는데, 지금까지는 아직 서방 세계에 증기기관이 출현한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여기 제시된 금액은 우리 왕조의 1년 치 세수 수익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잖은가.”
오 시랑은 최근 몇 년 동안 해외 무역으로 인한 세수 보충이 없었다면 이 정도 금액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도처에서 무역을 행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황금과 은들이 다 그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고 있을 테니, 이 정도 금액은 분명 내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저 그들이 이만한 대가를 내놓을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인 거죠.”
고청운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포로로 잡혀 온 이들 중 신분이 제일 높은 자는 총독 자리를 맡고 있던 자입니다. 한 명 더 그러한 인물이 있는데, 신분이 정확하지 않은 젊은이이나 아마도 그들 자국 내에서의 지위가 낮진 않을 겁니다.”
“해상 무역으로 정말 이렇게까지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단 말인가?”
오 시랑이 중얼거렸다. 이들 오씨 가문은 대대로 학문에만 전념해 온 선비집안으로서 돈만 생기면 대지 매입에 써오고는 하였다. 그렇게 생긴 토지를 활용하여 지금은 강남 일대 여러 곳에 면화를 심었는데, 오히려 쌀이 더 잘 팔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해외 무역의 흥행 사태에 합세할 생각 없이 지냈기에, 그저 해외 무역에 대한 이익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귀동냥을 하는 수준에 그쳐 있었다.
고청운은 확신을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역시 관념의 문제였다. 일찍이 서양 사람들은 해양 제패의 중요성을 깨달은 반면, 그가 밟고 있는 땅에서 함께 살고있는 이들은 육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솔직히 고청운은 이번에 전쟁으로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해양의 중요성을 모두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 시랑은 다시 한번 고청운이 작성한 상주문을 집어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시간이 이미 반주향(*약 15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뒤이어 그가 자신을 뒤따르던 몸종에게 분부했다.
“아사(阿辞)야, 네가 가서 다른 사람들을 좀 불러들이거라.”
“네, 나리.”
오 시랑의 뒤에 있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고청운을 힐끗 보고는 얼른 방을 나갔다.
* * *
선향 한 대가 다 타들어 갈만큼 시간이 꽤 지나고 나자, 협상단에 속하는 관원들이 다 모여 들었다.
모두들 자신의 품계에 따라 자리를 잡고 두 줄로 나뉘어 앉았는데, 공교롭게도 고청운은 오 시랑의 아랫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의 뒤로 홍려사 소속의 관리들이 자리에 앉았고, 그들 맞은편 줄에는 예부의 관리들이 앉아 양쪽이 확연히 갈리게 되었다. 고청운의 맞은편에는 마침 장수원이 앉아 있었다.
오 시랑이 홍려사의 봉 소경에게 부탁하여 고청운의 조서를 먼저 한 번 읽어 내리도록 하였다.
고청운의 예상대로 은 천만 냥을 배상하라는 조항을 듣자마자 아랫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따금씩 시선을 고청운에게 던졌는데, 오 시랑이 돌연 큰 기침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봉 소경은 더욱 큰 목소리로 읽지 못한 그 뒤의 다른 조항들을 마저 읽어 내려야 했을 것이었다.
장수원은 고청운을 바라보며 살짝 웃어보였고, 고청운도 한 번 따라 웃었다.
“이 협약서는 고 낭중이 작성한 것이네. 본관은 자네들이 이 협약서의 조항들에 의구심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제 이 조약을 직접 작성한 본인에게 자네들한테 설명하는 일을 맡기고자 하네.”
오 시랑은 말을 마치고 고청운을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고청운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소매를 한 번 털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보상 문제에 대해 설명했는데, 내용은 아까와 비슷했다.
“그들이 수십 년, 거의 백 년 동안이나 바다를 제패하며 축적한 재산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서양의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와 전쟁을 벌인 건 오직 요주의 총독 관할로 있던 주둔군으로,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진 그들의 본토는 아니었지요.
사실대로 말해서 채찍은 길더라도 말의 배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지금 우리의 군력으로는 그들의 본토를 수복할 정도가 못됩니다. 그나마 이 먼 거리가 장점으로 작용한 거지요. 섬과 부근에 주둔시킬 수 있는 병력은 한정되어 있고, 그들이 관할해야 할 지역이 아주 많아 힘이 분산돼 있던 덕분에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이겨서 다행입니다.”
고청운의 말이 끝나고 잠시 발표가 멈춰진 틈을 타 장수원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은자 천만 냥이라니, 그들이 그렇게 따르겠습니까? 듣자하니 수사에서도 이미 많은 전리품을 거둬들였다고 하는데.”
“그들은 은자 천만 냥 정도는 충분히 여유 있게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들은 전 왕조 말기에 전란을 틈타 요주를 점령한 지 40년이 넘도록 자원을 개발하고 있었고, 설탕과 쌀을 주로 수확하여 수익을 창출했죠. 이 두 가지 품목 다 굉장히 값어치가 있는, 돈이 되는 산업입니다.”
고청운은 장수원을 한 번 보며 감칠맛 나게 말했다.
“전략적 위치로 보면 요주의 위치는 극히 중요한 곳입니다. 그곳은 해상 밖 외부 세력이 우리 땅의 내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줄 수 있는 장벽과도 같은 곳이지요.
또한, 우리 왕조와 무역 거래를 하고 있는 곳들과도 밀접하고요. 그래서 이 요주가 저희 손에 있어야만 주변 바다에서 저희가 더욱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거고, 다른 이들도 우리를 위협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 다른 세력이 이 위치에 껴들어서는 안 됩니다.”
고청운은 표준어를 매우 정확하게 잘 구사했고 발음이 또렷했으며, 말 속도도 서두르지 않았는데, 훤칠한 키와 뛰어난 외모, 차분한 기질이 어우러져 사람들을 설득하게 만드는 기품이 있었다.
어느새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집중해서 그의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지루함이 느껴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