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감사하다
그들이 선택해 기부를 이어오고 있는 양제원은 원체 유명한 시설이라, 기부한 돈이 잘못 사용될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특히 교제 범위가 넓어진 간미는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일부 다른 집 귀부인들 같은 동호인들을 찾아다니며 함께 자선 활동을 펼치고는 했는데, 역시나 요즘 사치품을 서로 비교하고 뽐내는 풍조가 거세지고 있는 데 비해 간미의 취미는 여전히 고결했다!
고청운은 자신의 출신 상의 이유로, 음식 방면에 조금 신경을 쓰는 것 외에 평소 소박한 생활을 해 왔고, 집이 커짐에도 불구하고 부리는 하인을 많이 두려고 하지 않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간미의 경우, 모처럼 다른 부인의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자신과 함께 이런 생활을 영위하게 한 것에 대해 불평 한 번 없이 외려 이 고된 생활 방식을 달가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고청운은 그녀가 평소 너무 유순하고 부드러워서인지 가끔은 그런 그녀의 노고에 소홀해지게 되곤 했다.
“미아, 모레는 내 휴무일이오. 난 별일이 없는데, 그날 당신은 비는 시간이 있소?”
그는 생각나는 대로 얼른 입을 열었다.
간미는 막 고청운의 염낭을 검사하고 있었는데, 안에 있는 몇 냥의 은전은 여전히 변동이 없었다. 그녀는 고청운의 질문을 듣고도 고개조차 들지 않고, 무심코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럼 우리 성곽 북쪽의 외곽에 위치한 자은사(慈恩寺)로 놀러 가 봅시다.”
고청운이 흥미진진하게 제안했다.
“자은사요?”
간미가 그를 올려다보며 기뻐했다.
“좋습니다, 그럼 휴일날 우리 자은사에 가요! 그나저나 제가 듣자 하니 요요가 량가아와 함께 휴무일에 국공부댁을 방문한다고 하더군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동안 복상 기간을 지켜야 했는데, 계산해 보면 이 기간은 27개월로, 지금 국공부의 사람들은 이미 이 복상 기간을 다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영승언 등 영씨 가문 사람들은 조정과 원래의 근무지로 복귀하는 일에 대해 검토하고 있었다.
국공부가 지금 또 분가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이 시점에 영요가 친정집에 돌아가 보는 건 정상이었다.
“괜찮소. 이번엔 다른 사람 하나 없이 당신과 나, 단둘이서만 갑시다.”
물론 하인도 같이 동행해야 했는데, 이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간미는 그 말을 듣고 반짝이는 눈으로 고청운을 한 번 노려보더니, 그저 흐뭇한 마음에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둘만요? 우리 따님은요? 같이 안 가요?”
아이가 같이 간다면 당연히 기쁘겠지만, 그녀가 그들 부부 둘만 나들이를 나설 수 있는 상황을 더 기뻐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우리 가족끼리 다 같이 한 번 갑시다.”
고청운이 매우 확고하게 말했다.
이내 그는 간미의 손을 잡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아, 나는 당신을 내 처로 맞이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당신은 늘 부드럽고 우아하며, 그 용모마저 꽃처럼 아리따운데, 집안일까지 질서정연하게 소홀함 없이 잘 처리해 주고, 우리 아이들 교육도 매우 잘 시켜주었지 않았소?
그동안 내가 집에 간섭 한 번 안 하게, 신경 한 번 안 쓰이게 너무 잘해 주었소. 내가 당신한테 소홀해도 원망 한 번 안 하니, 이런 내가 당신에게 장가들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소.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소.”
고청운은 ‘그간 나를 이리 잘 지지해 주어서 감사할 따름이오.’라고 준비했던 뒷말은 막상 꺼내지 못했다.
고청운의 말을 들은 간미는 멍해져 있었다. 고청운의 준수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하얀 얼굴에 갑자기 홍조가 일어나더니, 눈에 눈물을 반짝이며 고청운의 허리를 덥석 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고청운은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 그녀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중얼중얼 말했다.
“아니, 내가 혹시 무슨 말실수라도?”
그의 서툰 동작에 울고 웃던 간미는 잠시 더 울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바보, 제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겁니다. 당신이나 되니까 제게 고맙다는 말을 해 주는 거지요.”
그녀는 더 많은 말이 남아 있었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젊었을 때는 사랑이니 하는 것 따위에 집착했었는데, 왜 부군에게는 이런 사랑의 말을 담은 감정 표현을 말하지 않았었을까. 다만 그녀는 해가 갈수록 부군이 늘 자기 자신에게만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더 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백 마디 말보다 그가 수년 간 보여준 행동이 더 설득력 있었던 것이다.
“그럼 승낙한 것이오?”
고청운이 다시 물어보았다.
“네, 당연하지요.”
간미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 다시 원망하듯이 말했다.
“이게 다 부군 탓이에요. 화장이 다 지워져 버렸으니, 다시 화장하러 가야겠습니다.”
“당신은 화장 안 한 게 더 어여쁘오.”
“그저 절 달래려고 하시는 말이지 않습니까.”
간미는 짐짓 화가 난 듯 그를 노려보았다.
* * *
휴무일 전날 저녁 식사를 할 때, 고청운이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일 너희 어머니와 함께 자은사에 다녀오려고 한다. 우리는 오후에나 집으로 돌아올 게야.”
“아버지, 저는 내일 처와 처가에 다녀와야 해서 시간이 없습니다.”
고영량은 입안의 음식을 다 삼킨 뒤에야 “저희 아들도 저희가 데려갈 겁니다.” 하고 부연 설명을 했다. 안 그래도 처갓집에 가면서 손주를 안 데려갔다가는 원망을 들을 게 뻔했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 양탄자 위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고전각이 반응을 보였다. 그 아이는 동그란 눈을 뜨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고영량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옹알댔는데, “바바?” 하고 소리 내며 입을 여니 침이 뚝 하고 떨어졌다.
“네가 신경 쓸 거 없다, 너 혼자 마저 놀고 있거라.”
고영량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다가 아들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마저 노는데 집중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시선을 밥상으로 돌렸다.
“아버지, 저는 내일 이미 벗들과 한 약속이 있습니다. 날씨가 아직 많이 춥지 않은 틈을 타 축국 경기를 하러 갈 생각이에요.”
고영진이 난색을 표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놀러가고 싶었지만, 놀러가는 행선지로 자은사가 뭐가 재미있겠는가. 지금 매화는 여전히 꽃봉오리 상태로 개화하기 전이라, 멀리서 보면 아직 앙상한 가지만 보일 뿐이었다.
오히려 조금 늦게 피는 국화꽃은 보러 갈만 하겠지만, 그는 어차피 벗들과 약속이 돼 있으니 안 갔다가는 벗들에게 약속을 어겼다고 밥을 한 끼 사야 될 것이었다.
고영진은 자신의 작은 금고를 생각하니, 그곳에서 돈을 내보내기가 너무 아까워졌다.
“아버지, 어머니, 저도 가기 싫어요. 지난번에 시 모임 때 나온 작품들을 교정한 뒤 정리하고 책으로 엮어야 해서 시간이 없어요.”
옆자리 밥상에 있던 고경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돈이 부족하지 않은 여식들의 시집 출간은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너희 외할머니를 모시고 같이 갈 테냐?”
방인소가 고청운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더니 그가 시무룩해진 줄 알고 말했다.
“아니면 이 노부가 함께 해 주랴? 기원은 모레 가도 된다.”
방인소가 아주 억지스러운 모습으로 제안했다.
마지막 국물 한 숟갈까지 다 마신 고청운이 해명하며 말했다.
“됐습니다. 다들 너무 많이 고민하지 말거라. 우리가 출타하겠다고 알린 것뿐이니. 나도 네 어머니와 단둘이 가고자 하니, 너희들이 우리와 동행해 줄 필요없다.”
‘이 사람들은 내 말을 어떻게 들은 게야? 내 분명히 우리 내외 둘이 간다고 했거늘, 다들 자기 멋대로 해석하다니.’
간미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얼굴이 다 빨개졌다.
이를 본 방인소가 얼굴이 어두워지며 말했다.
“밥상머리에서 너무 떠들지 좀 말아라.”
방인소의 주의에도 밥상머리 위로는 다들 표정으로 남은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에게 보내는 눈짓으로 난무했다.
고영량과 고영진 그리고 고경은 수시로 고청운과 간미를 보며 은근히 웃음 지었다.
* * *
다음 날, 고청운과 간미는 제대로 나들이를 즐겼다. 생각보다 자은사까지 가는 길이 멀었지만 경치가 아리따웠는데, 가는 길 내내 푸른 나무들은 누렇게 색이 물들어 있었고, 길가에는 아직 들국화가 만개해 있어서 겨울로 접어드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절에서 점을 본 간미는 길한 운수를 나타내는 상상(上上) 괘를 뽑자,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정말이지 다녀오는 내내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전쟁 기간 동안 고청운은 공부에서 덩달아 바빠지면서 틈틈이 자료 찾기에 바빴기에, 그간 책을 만들며 여유를 부릴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 기회에 나들이를 나오니 마음이 편해졌고, 바쁜 와중에 누적된 피로가 싹 가시며 정신이 다시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교외로 나와서 걸어 다녀야겠구나. 늘 경성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지.’
오후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고청운은 사장정이 저녁 식사에 초청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간미에게 다녀오겠다며 한마디 건네고는 바로 약속 장소인 주점으로 넘어갔다.
고청운을 떠나보낸 후, 고경은 간미의 목에 못 보던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을 예리하게 찾아냈다.
“어머니, 이거 언제 사신 거예요?”
고경이 호기심에 물었다. 어머니가 어떤 장신구를 가지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던 그녀였으니, 갑자기 튀어나온 보석 목걸이가 궁금할 법도 했다.
간미는 부드럽게 웃더니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주신 게야, 송죽서재에서 원고료로 보내준 비용으로 사셨다지 뭐니. 아이, 네 아버지가 이렇게 돈을 막 쓰신다. 이런 물건을 사느니 차라리 견실한 땅을 좀 더 사들이는 게 나은데.”
고청운의 책이 계속해서 팔려나가는 것도 다 수입의 일환이었다.
고경은 “아하.” 하는 소리를 내더니 책을 내려놓고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 * *
바쁜 휴무일이 지나고 며칠 더 경축 기간이 진행되었다. 승전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고, 시중의 물가도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서히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11월이 되자, 경성의 소보는 또 각양각색의 기사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수사 장병들이 상경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의식인, 전쟁 후 포로와 공물을 종묘(宗廟)에 바치는 예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이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온 경성이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성 입구에서 가까운 길목들마다 다 사람들로 붐볐고, 온 산천과 강에는 의식에 연주되는 징과 북소리로 요란했다.
바로 이때 고청운은 황제로부터 내려온 교지를 받들었는데, 어찌 이 패전한 연합군을 대해야 하는지 자신이 협상에 참가하여 정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협상 대오에 합류하라는 지시였다.
협상 인력의 우두머리는 좌승상이 나서고, 나머지 대부분은 홍려사 관리들로 조성되어 있었다. 고청운은 홍려사 최고 간부가 지금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식에 생각이 미쳤는데, 그가 이미 사직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라고 하니 마음속에 어렴풋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내 다음 행선지가 홍려사가 되는 걸까?’
고청운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자리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