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408)화 (408/504)

408화. 허심탄회 (2)

잠시 멍하니 웃고 있던 고영진은 고청운이 자신을 이해해주자 가슴속에 얹혀 있던 큰 바위 하나를 땅으로 내려놓은 듯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오늘 밤은 아버지랑 함께 자고 싶어요.”

고영진은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는데, 워낙 맑은 눈으로 청하니 가련하게까지 느껴졌다. 

고청운은 고영진이 모처럼 이런 모습을 드러내자, 지난 2년간 아들이 고향에 머무르느라 한참 동안이나 함께 지내지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고영진이 경성으로 돌아와서도 일로 바빴던 데다, 2년도 채 안 돼 아들이 혼인을 치를 것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오늘 밤은 같이 잠에 들자꾸나.”

“하하, 정말 잘 되었습니다! 그럼 아버지,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사람을 불러 어머니께 말씀을 전하라 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밤은 무슨 책을 읽을 예정이십니까?”

고영진은 크게 기뻐했지만, 어머니 혼자 빈방을 지키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저 머리를 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청운이 책 이름을 말하자, 고영진은 벌떡 일어나 문 앞에서 대기하던 계집종에게 어머니께 사정을 전하도록 일렀다. 

고영진의 흥분된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고청운은 오늘 밤 비로소 고영진의 한 수에 당했다고 생각했다. 이 비기는 방인소가 늘 당하던 것이었는데, 자신한테까지 사용되어질 줄은 몰랐다.

* * *

동쪽 정원.

어렵사리 유모와 함께 고전각을 재운 영요는 침실로 들어서자 고영량이 흰 내의를 입고 한 손엔 책을 든 채 발을 물에 담그고 있는 것을 보았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고영량이 “아들이 잠에 들었소?” 하고 물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 낮잠을 너무 오래 재웠는지, 밤에 잘 때가 되어도 기운이 넘쳐서 한참을 떠들어대다가 이제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정말 사람 괴롭히는 악동이 따로 없네요.”

영요는 곁에 앉아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희미하게 흥분한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다.

“방금 집에 돌아온 동생이 아버지께 뭔가 걸린 모양이오.”

고영량은 책을 다음 장으로 넘기며 웃었다. 그는 다시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을 시켜 자세한 상황을 물어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만일 동생이 정말 아버지를 화나게 한 것이라면, 때맞춰 잘 등장해 남동생을 구조해 주어야 할 테니 말이다. 

“부군, 아버님께서…….”

영요가 입을 열었다. 

고영량은 입을 가리고 웃던 영요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촛불 아래 비친 그녀의 피부는 부드러워 보였고 몸매도 여전히 아리따웠는데, 두 눈은 마치 별빛이 반짝거리는 것 마냥 빛났다.

“저는 이전에 아버님께서 매우 엄숙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사적으로 알게 되고 나니 온화한 분이시더군요. 고향에서 막 돌아왔을 때, 아버님께서 짱짱이를 품에 안으시고 뽀뽀를 하시더니 어깨 위에 올려놓으시기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영요는 이전에 아들이 단정치 못하게 시아버지의 가슴팍에 물을 한 바가지 끼얹는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어머니는 도리어 그런 시아버지를 놀려댔다.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 때 그녀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시아버지는 가벼운 말투로 외증조할아버님에게 말까지 건넸다! 허나 모두의 표정이 평범했던 것을 보면, 이런 상황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영요는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아버지가 규방의 자매들이 추측하던 ‘황량선생’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발견했는데, 밖에서는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말수가 없는 그녀의 시아버지가 집에서 이런 모습으로 지낸다는 사실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자신도 때려죽여도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이러한 모습이 아주 일상적인 모습인 듯했다. 

“아버지는 원래 그러시오. 우리 형제자매는 어렸을 때 모두 아버지의 목에 올라 타 다녀 보았는데, 어머니께 듣자니, 내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목마로 삼아 타고 다녔다고 하오.”

고영량은 예전의 일이 생각나는지 얼굴이 온화해졌다.

“아버지께서는 손자는 안아주더라도 자식은 절대 안아서 키우지 않는다는 그런 엄격한 어른이 아니셨소.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나에게 있어 아버지란 절대 무서운 분이 아니셨지. 다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 때만은 매우 화를 내셨다오. 한 번은 가규로 정한 법규에 맞추어 나를 벌주셨는데, 그 누가 말려도 듣지 않으셨소.”

“가규요?” 

영요는 자신이 그간 들어왔던 다른 집안의 가법 조례들을 생각하니 흥미가 동해 물었다.

“무슨 벌을 주셨나요?”

고영량은 자신이 실언한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자신의 처 앞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께 맞아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부짖었던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그의 체면에 너무 큰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다행히도 영요가 그를 재촉하려 할 때, 마침 그녀의 계집종인 산호가 문으로 들어서며 건너편 정원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고영량은 오늘 밤 고청운과 고영진이 함께 잔다는 말에 은근히 질투가 일었다. 간미와 고경이 함께 한 방에서 잠드는 건 매우 당연하게 여겼으면서 말이다. 

‘동생은 정말 때를 잘 맞추는 아이였지. 틀림없이 아버지께 어리광을 부렸을 게야. 정말 얼굴이 두껍기도 하구나, 이렇게까지 장성해서 그런 짓이 가능하다니.’

옆에 있던 영요는 이 소식을 듣고부터 부군의 얼굴빛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부군, 무슨 생각을 하세요?”

영요는 그 속이 꽤나 궁금했다.

“다음에 동생한테 과거 시험 대비로 어떤 문제를 내줘야 할지 생각 중이었소.”

고영량의 말투는 자못 진지했다.

현재로서 고영진의 학습 환경은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의 집에만 해도 진사가 셋씩이나 있어서 죄다 그의 공부를 도와주던 것이다. 

이갑(二甲) 진사가 2명, 장원 1명이라니. 정말 호화스러운 인력이 아닌가.

“그럼 마저 잘 생각해 보셔요. 문제를 추리시면 저희 큰오라버니한테도 한 부 더 전해 주시겠습니까?”

영요가 다급히 말을 이어 붙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아직 상중이었는데, 큰오라버니는 2대라 이미 복상 기간을 끝마쳤다고 하나 직접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건 당분간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고영진이 무슨 문제를 대비해 풀거나 하면 그대로 따라 시킬 수는 있었다. 그녀의 큰오라버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낸 기출문제는 효과 만점이라고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고영량은 곧장 응낙했다.

* * *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흘러 9월 27일이 되었다. 이날은 길일이자 흠천감(*钦天监: 명청 시대의 천문대)에서 점해준 육황자와 주아의 성혼식이 거행되는 날이기도 했다. 

수군의 패전 여파로 인해 방씨 가문 쪽에서는 이번 혼사를 조용히 준비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애썼다. 원래는 성혼식도 더 늦어질 줄 알았는데, 황제가 엄명으로 성혼식은 처음 날짜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동안 경성의 분위기는 줄곧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경사로 인해 혹은 모두들 황제의 의중을 헤아린 것인지 조금은 풀린 분위기가 형성되어 다들 은연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주아가 황실로 시집가는 날 하객 수는 매우 크게 증가했고, 늘 존재감이 없던 육황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을 한 번 새로이 하는 날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방자명도 경성으로 귀환했다. 

* * *

당연히 방자명이 돌아온 것은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경성으로 오기까지의 길에서 쓴 시간을 제외하면 9일 동안의 휴가가 주어졌다. 

방인소와 연 씨는 그를 보고 상당히 흥분했다. 고청운의 두 아들은 방자명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고경은 방자명의 용모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단지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 들은 기억이 났다.

“어떻습니까? 많이 크죠?”

고청운은 방자명을 데리고 개축한 자신의 집을 한 바퀴 걸으며 웃으며 말했다.

“식구가 많지 않아 장소가 너무 남더군요. 이것 좀 보세요. 정원에 따로 공간을 두어 이리 화초를 심어 두어, 매일 자갈길을 따라 산책할 때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거창한 인공산이니, 인공 폭포니 하는 것까지는 설치하지 않았지만, 푸르른 나무 아래 붉은 꽃이 만발한 곳을 산책하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확실히 느끼는 바가 달랐다. 

방자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자네 집 후원 쪽은 왜 빈터로 두고 있는가?”

“일단 아무것도 심지 않은 채 두고, 부모님께서 상경하시면 그때 원하시는 채소라도 좀 가꿔보시라고 남겨 두었습니다.”

고청운은 옛날 고대하와 소진씨가 상경해 지냈던 2년을 생각해서 이렇게 한 것인데, 지금도 임계촌에서 두 어르신들은 뒷마당에서 채소를 기르고 있었다. 이는 몇십 년 된 그들의 습관 같은 것으로, 설령 직접 경작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생활이 나아졌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런 식으로라도 생활 속에 의지할 거리를 찾으려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은 어떠신가?”

방자명이 또 물었다.

“그저 그런대로 참고 견디고 계십니다.” 

이 말을 꺼내는 고청운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방자명은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두 사람은 모퉁이를 지나다가 마침 새로 심은 모란꽃 몇 송이를 보고는 정신이 들어 서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방 형이 제게 보내준 모란꽃이 활착하지 못할까 많이 걱정했습니다. 이런 꽃이 얼마나 귀합니까, 물과 흙이 맞지 않아 잘 키워내지 못할까 봐 정말 신경 많이 썼지요.”

방자명이 부채를 흔들며 담담하게 웃었다. 

“이 꽃이 무슨 귀중한 것이라고 그러는가? 고작 은 몇 냥의 가치도 되지 않는데. 내가 있던 지역 도처에 널려 있던 품종일세. 생명력이 강해 아주 잘 살아남지. 내 다음에 몇 개 더 뽑아서 보내주겠네.”

“낙양 지역의 모란이 천하의 제일이라던데, 이게 제가 생각한 그 진품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고청운은 흠칫 놀랐다. 그는 이 꽃이 여전히 자신을 국화 도둑 정도로 보고 있는 스승님의 애장품 종인 그 국화와 견줄만한 품종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내 이제 막 낙양에 전근 갔거늘 어찌 그런 귀한 진품을 자네에게 보낼 수 있었겠는가? 진품이라면 아직 엄두도 못 내네. 나는 그곳을 떠나기 전에 자네가 줄곧 알록달록한 꽃을 좋아했던 것이 기억나서 그냥 보낸 거라네. 현학과 부학에서 지낼 때, 야생 난을 키우고는 하지 않았는가? 자네 집안의 품격을 생각해 조금 새로운 품격을 더해주고자 목란을 보낸 게지. 잠깐, 자네 어디까지 생각을 한 겐가?”

방자명은 일부러 정색을 하며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래요, 방 형 말이 맞아요. 제가 깊게 착각한 겁니다.”

고청운이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두화(*斗花: 고대 귀족 여성들의 풍습. 봄철 진기한 꽃을 키워 길러 머리에 꽂아 누가 더 우월한지 승패를 가르는 놀이의 일종)가 경성에서 아주 유행이라지? 

올해 9월에는 자칭 십팔학사(十八學士)로 불리는 귀한 동백도 몇 번이나 보았지. 이 전쟁만 아니었다면 올 9월에는 국화 감상 같은 모임 자리도 있었을 텐데…….”

이 시기는 또 마침 한창 문회를 열 때라서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출몰하기도 했다. 

다시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거론되자, 고청운과 방자명은 침묵했다.

1